
※ [전설의 인룡] 1화에서 아기의 눈 색깔이 \'노란색\'이라고 언급했는데, \'파란색\'으로 수정했습니다.
- 디아른, 너 설마...
실피드보다 수십배는 잔소리가 지독한 엘라임이었다. 디아른은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양, 풀죽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인간을 데려오기라도 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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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른은 고개를 푹 숙인채로 속사포로 쏟아질 잔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앙다물면서 변명할 거리를 한창 생각 중이던 디아른에게 드디어 엘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쳤구만, 미쳤어...
엘라임의 잔소리를 들을 때, 조금이라도 잔소리를 줄이려면 다음과 같은 단계가 필요하다. 우선 첫번째. 최대한 불쌍하게, 그리고 반성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라. 디아른은 엘라임의 잔소리가 슬슬 시작되겠구나, 싶어서 이미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엘라임의 말은 디아른의 푹 숙인 고개를 번쩍 들게 만들었다.
- 얘는 뭘 먹어서 이렇게 귀엽다냐?
\"...?!\"
디아른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엘라임은 팔로 싸르카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손가락으로 싸르카의 볼을 살살 간질어주었다.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꺄르륵대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싸르카를 흐뭇한 아빠미소로 바라보는 엘라임이 살짝 낯설게 느껴진 디아른은, \'저거 변태아냐?\' 하며 살짝 거리를 띄웠다.
- 디아른.
앉은 상태에서 슬그머니 뒤로 내빼려던 디아른은, 깜짝 놀란 마음에 말을 더듬고 말았다.
\"으, 응?\"
- 이 아이가 누군지는 알고 살린거야?
디아른은 뜻밖의 질문에 또 다시 당황해, 멋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그, 글쎄. 블루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지긴 하던데.\"
디아른은 말하고 아차 싶었다. 인간에게 블루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헛소리를 엘라임이 용납할리가 없었다. 인간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기보단, 적대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 엘라임이었기에, 더 숨기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엘라임이 무슨 바람이 났는지, 계속 예상밖의 말을 했다.
- 허허... 참, 이것도 운명이다.
\"뭐... 뭐라고?\"
- 운명이라고. 너 아무 생각없이, 불쌍해서 얘 데리고 온거지?
디아른은 들켰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으으... 너 요즘 독심술이라도 배우는거야?\"
- 독심술은 개뿔. 너도 이정도 살아보면 대충 다~ 보일거다. 하여튼 간에, 물의 정령왕인 내가 봐도 이 아이는 분명한 블루 드래곤이다.
\"뭐, 뭐? 진짜로? 네가 보기에도?\"
디아른이 노란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되물었다.
- 그렇다니깐. 너도 블루 드래곤의 기운이 살짝 느껴지지 않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인간이라서 확신은 못하겠어.\"
엘라임이 디아른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을 하더니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히 말했다.
- 이런 경우가... 아주 가끔씩 있긴 하지.
디아른이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응? 무슨 경우?\"
-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용의 힘을 잠재하고 있는 경우. 아마 수천년에 한번꼴로 나올까말까?
\"그러면... 이 녀석은 자기가 용인걸 알고 있는거야?\"
- 전혀 모르고 있지. 자신이 인간임을 굳게 믿고 있어. 마치 네가 너 자신을 용이라고 믿고 있듯이.
디아른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계나 정령계에서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백년간 살아온 디아른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인간\'이 \'드래곤\'의 힘을 가질 수 있다니?
- 하지만 그 인간의 성향에 맞는 드래곤이 자신의 힘을 인간에게 넘겨주지 않는 이상, 완전체로 각성은 불가능이야. 한마디로 이런 특별한 경우의 인간들은 십중팔구 자신이 드래곤의 힘을 갖고 있다는 걸 평생 모르고 살다 죽는다는거지.
\"아, 그러면 아직 완전한 용은 아니구나?\"
- 응. 그러니까 한마디로 \'용이 될 수 있는 길\'이 트인 거나 마찬가지지. 물론 그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같은 성향을 가진 드래곤뿐이야.
디아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곤의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못한 존재인 인간들에게 있어서 그 힘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불안정한 것이다.
\"휴, 다행이네.\"
- 일단 이 아이를 데려온 것은 잘했어. 이 아이가 그런 특별한 존재임을 권능의 소유자들에게 각인시키면 그들도 이해는 해줄거야. 하지만...
\"하지만...?\"
- 네가 만약 이 아이에게 무단으로 힘을 넘겨줄 경우에는, 넌 사형이다.
사형. 드래곤들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 자신의 수명을 다하고 평화로운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사\'가 가장 드래곤들에게 편안하고, 명예로운 죽음이다. 물론 큰 죄를 짓는다던지 하는 드래곤들은 드래곤계에서 \'추방\' 당하거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를 한 드래곤은 \'사형\'시킨다. 이 두가지의 형벌이야말로 드래곤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다.
물론 디아른에게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사형이라는 말을 들으니,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리는 없으니, 안심해도 돼.\"
- 그래. 곧 권능의 소유자들이 너에게 청문회를 열거니까, 그때 할 말들 생각해놓고 있어. 그리고 싸르카는 내가 재워놓았으니, 안심하고.
\"에에... 곧 있으면 또 아까처럼 일어나서 울건데?\"
- 걱정 마. 너처럼 마법으로 재우는 것과 편안히 재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라임이 손을 흔들며 점점 흐릿해져갔다. 엘라임이 사라져가면서 나지막히 외쳤다.
- 싸르카가 좀 더 크면 연락하라고!
디아른은 엘라임이 사라지자, 한숨을 푹 내쉬며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싸르카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아기를 그냥 못본척하고 지나쳐야했을지도 몰랐다. 남의 운명에, 그것도 삶과 죽음에 관련된 운명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앞으로 너를 어떻게 한다냐...\"
틈만나면 시끄럽게 울어댈 것을 생각하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남의 운명을 멋대로 헤집어놓은만큼 확실하게 책임져줘야겠지. 14살쯤 되면 또래의 여느 인간들처럼 살게하리라.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지켜내야한다. 엘라임의 말대로, 곧 있으면 \'생명의 부름\'을 남용한 죄목으로 청문회가 열릴 것이다. 그때만 제대로 버티면 할 수 있다.
\"...엄마가, 지켜줄게.\"
디아른은 무슨 꿈을 꾸는지, 자면서도 헤실헤실 웃고 있는 싸르카의 토실토실한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어만지면서말했다. 그녀의 노란색 눈동자가 그윽하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