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http://m.dragonvillage.net/talent/board/novel/30?mode=read&b_no=21071&
-
운명이 없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저 멀리 대장장이의 자식이거나 영주의 시종 집안에서 태어났으리라. 또한 운명이 있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가까워 보이기만 하는 이상을 쫒는 도시의 노름꾼들, 내지는 막연한 낭만만을 꿈꾸는 몽상가들이 태반일 것이다.
진정 운명의 진의와 무게를 아는 자들은 왕들뿐이다. 그들에게 운명은 어느 날 하늘에서부터 떠오는 선물상자 따위가 아니다. 운명이란 그들에게 안에서 금을 발견할지도, 독을 마실지도 모르는, 금기로 무장한 함정들의 소굴이다.
운명은 절대로 갑작스럽지 않으며, 그것이 왕의 인생에 작용하는 것은 단 한번뿐이다. 그 한 번이 일어나는 시기는 왕마다 제각기 다르지 않고 똑같다. 탄생의 순간. 그 때 그것은 그것에게 간택받는 자들에게 누군가에게는 근사하며, 누군가에게는 원망스러울 길에 발을 딛게 한다.
그 길 역시 운명의 영향을 받는다. 왕의 길은 단 한 번의 만곡 없이 쭉 앞만을 향해 있도록 파여 있다. 왕은 별다른 선택 없이, 아무런 자유 없이 정해진 길만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의 종점을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볼 줄 안다. 가까워져가는 종점에서 평안한 끝을 본 왕은 보장된 안식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간다. 반면 소름끼치는 악몽과 끝나지 않는 고통을 예견한 왕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망설이거나 뒤로 내빼려 한다. 하지만 뒤에서부터도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며 걸음을 재촉하는 어둠에 끝끝내 정해진 파멸을 맞닥뜨리게 된다.
수많은 길들 중 한 곳에 하얀 왕이 발을 딛었다.
운명은 그에게 관대했다. 그의 길은 봄날의 평원처럼 평탄했고, 그 끝은 무난한 안식을 넘어 빛나는 명성과 그의 백성들의 번영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명성과 번영보다도 더 밝게 빛나는 것은 영원이였다. 죽어서도 영겁의 시간 동안 우주의 기억 속에 남을 영원한 이름. 그 이름이 그의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얀 왕은 운명에 감사하며 길을 나아갔다. 그는 자신에게 왜 이런 완벽한 길이 주어진 것인지, 다른 왕들의 길은 어떠한 모습일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평탄한 길을 가졌던 다른 모든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특별했다. 그의 눈에 별빛이 깃들었다. 그는 자신의 길과 종점을 넘어, 다른 이들의 길을 관측할 수 있는 혜안을 얻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보게 된 길은 금빛 왕의 길이였다.
그의 길은 맨 처음부터 눈부시게 도금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 자신마저도 온몸이 금빛이였다. 그가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은 하얀 왕 자신의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워 보였고, 그는 그 금빛 왕이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저 멀리서 그 왕을 조용히 기다리는 시커먼 어둠을 보기 전까지는.
금빛 왕은 시야가 이상하리만치 짧았다. 그는 자신을 삼켜가는 그림자를 보지 못하고 유유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 어둠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천장은 밑의 공간을 옥죄였다.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것은 끝이 없어 보이는 세상의 망각이였다. 그가 이대로 계속 어둠에 가까워진다면 최후에는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영원히 잊혀지리라.
하얀 왕은 반대편에 위치한 자신의 길 위에서 몇 번이고 금빛 용을 불렀다. 그 어둠은 다른 모든 파멸보다도 더더욱 끔찍했고, 심지어 그 앞의 수십 리가 새카만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금빛 용이 방벽 안으로 들어서면 그의 목소리가 닿을 리가 만무했다. 하얀 왕은 그걸 알고서 더더욱 절박하게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를 불러세우고 싶었다. 어서 그 어둠으로부터 돌아서라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금빛 왕은 그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미소를 머금은 채 앞만을, 오직 앞만을 향해 나아갔다.
-
칼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뺨 위를 스쳐지나갔다. 그 속에 드문드문 섞인 눈의 박편이 살이 드러난 곳 위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늘 그렇듯 하늘 위에는 구름 한 점조차 없었지만, 그렇다고 태양빛이 강한 것도 아니였다. 설원의 날씨는 특이하지만 변칙적이진 않다. 희한한 곳이다.
밑으로 보이는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새하얗다. 보통 이런 높이에서는 작은 숲이나 들이 조각보처럼 맞물려 있는 경치가 보여야 정상인데, 이곳의 경치는 조각보보다는 하얀 이불에 가까웠다. 짙게 드리운 눈의 담요가 온 땅을 뒤덮었고, 중간중간에서 얼어붙은 빙판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게다가 이렇게나 높은 곳에 있는데도, 양 옆에는 그보다도 더 높게 우뚝 솟은 설산들이 울타리처럼 연쇄되어 있었다.
나는 의외로 스릴을 좋아하는 편이다. 원래 하늘을 나는 용이기 때문에 이런 높이에도 익숙해져 있다. 그렇기에 평소 같았으면 이 신묘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마냥 즐기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밑에서부터 계속해서 들리는 앓는 소리 때문에 도저히 경치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에요, 메르디스?" 나는 그날 벌써 일곱 번째로 그에게 물었다.
"응!" 확신 넘치는 그의 의도와 달리, 그의 대답은 켕기는 신음이 되어 내뱉어졌다. "정말로…으극, 괜찮으니까 묻—"
그가 갑자기 켁켁대기 시작한 탓에 대답의 전문은 듣지 못했다. 메르디스는 헛기침을 수차례 하며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울부짖는 바람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네요. 다시 쉬어갑시다."
메르디스의 것과 대비되는 강한 날갯짓이 옆의 바람을 흐트러뜨렸다. 바툴이 몹시 걱정스럽고도 언짢은 표정으로 메르디스와 그의 등에 탄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치만 방금 전에도 쉬고 왔잖아…"
"반대로 좀 물읍시다. 전에 쉬었던 횟수가 뭐가 중요합니까?"
—또다. 최근에는 바툴이 메르디스에게 저런 식으로 딱딱하게 구는 경우가 늘었다. 평소에는 신하가 왕을 대하는 것처럼 메르디스에게 예를 갖추는 바툴이 그를 지적한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화가 나 있다는 증거이다.
바툴은 두말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 보이는 납작한 산봉우리를 향해 방향을 꺾었다. 메르디스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그를 따라 봉우리 위로 주저앉듯 착지했다. 그는 땅 위에 발이 닿자마자 쿵하고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고, 움직임이라곤 옆구리가 거친 숨과 함께 조금 들썩거리는 정도였다.
"이래서야 오늘 안에 도착은 할 수 있을지…" 바툴이 그를 굽어보며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이 모든 곤란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늘 아침, 메르디스가 뜬금없이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간 건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계휙은 바툴 몰래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이였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바툴은 그의 속셈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우리를 다시 동굴로 돌려보내려 했었다. 몇 시간 째 계속된 만류와 설득의 반복 끝에 바툴은 자신도 함께 따라나간다는 전제 하에 외출을 허락해주었다.
…여기까지는 조짐이 좋았지만, 비행을 계속할수록 어쩐지 메르디스가 계속해서 뒤쳐지는 것이였다. 몇 리 가지도 않았는데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그의 상태를 보아하니, 바툴이 그의 건강을 두고 그렇게나 소란을 피울 것만도 했다.
"대체 저희가 가는 곳이 어디길래 이렇게까지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걸까요?"
"아마 도시겠지." 바툴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산맥 사이로 보이는 눈안개로 가려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이 방향으로 가면 나오는 건 그것밖에 없다."
"도시?"
"네놈이 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도록 할 거라고 하셨으니까. 난 썩 내키진 않지만 그분의 뜻이니 어쩔 수 없군."
잊혀진 것들. 요즘들어 많이 듣게 되는 단어이다. 그들이 내게 알려주고자 하는 그 잊혀진 것들이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메르디스에겐 매우 중요한 것들임이 분명했다.
말이 나온 김에 메르디스를 돌아보니, 그는 아직도 쓰러져서 숨을 고르던 참이였다. 그는 자리에서 끙끙대며 일어서려 했지만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바닥에 엎어져서 눈을 감았다.
"진지하게 묻는 건데, 진짜로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뭐?" 바툴이 신경질적으로 그르릉거렸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 말을 걸어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게…그 도시라는 곳이랑 이곳이 얼마나 먼 거예요? 너무 멀면 정말로 오늘 안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잖아요."
바툴은 김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야. 그런데 지금은 이미 두 시간은 훌쩍 넘겨버렸고. 아마 계속 이 속도로 간다면 진지하게 하룻밤 밖에서 자는 것도 고려해봐야 할 거다."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인간화하면 되지 않아요? 메르디스가 저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면 바툴이 둘 다 태우고 갈 수 있잖아요."
바툴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의 시선이 신경쓰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런 당연한 걸 왜 생각을 못했지?"
"그러게요." 나는 열없이 웃었다.
바툴은 일어서서 뒷편에 쓰러져 있는 메르디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코 끝으로 메르디스의 머리를 살짝 건드리자 그의 눈이 조금씩 떠졌다.
"메르디스님?" 바툴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대할 때의 그 띠꺼운 태도와 정반대라서 조금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응, 듣고 있어…"
"인간화. 아직도 할 수 있으십니까?"
"되는데 인간화는 왜?"
아무 말 없이 메르디스 위로 등을 구부린 그의 뒷모습에서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일단 해라" 라고 말하는 듯한 기가 뿜어져나왔다. 메르디스도 그의 뜻을 잘 알아들은 모양이다. 새하얀 빛이 그의 몸을 휘감았고, 그는 끝내 빛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넋을 잃고 빛을 쳐다보다 그 눈부심 때문에 눈을 꾹 감았다. 용이 인간으로 변신할 때에는 부족에 따라 제각기 다른 색의 빛을 발산하는데, 지금까지 붉은용들이 변신할 때의 새빨간 빛은 자주 보아왔지만 하얀 빛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감은 눈 뒤로도 검붉게 비치던 빛이 걷힌 뒤, 나는 눈을 천천히 떴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하얀 용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었고, 그곳에는 그의 빈자리를 차지하기엔 터무니없이 조그마한 소년이 뉘여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나는 봉우리의 끄트머리까지 가서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그곳에 나를 제외하고 인간의 모습을 한 이는 메르디스라고 하기엔 심하게 어려보이는 그 소년뿐이였다.
"제가 당신과 저 애를 둘 다 태우고 갈 생각입니다. 도착할 즈음엔 원기를 충분히 회복하실 겁니다." 바툴이 소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고마워. 역시 바툴은 상냥하구나…"
…확실히 메르디스의 목소리다. 원래부터 높고 가는 목소리여서 그런지 소년의 모습에서 괴리감이 전혀 들지 않아서 하마터면 어물쩍 넘어갈 뻔했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게 메르디스일 리가 없다. 머리카락도 똑같이 하얗고 눈도 똑같이 연푸른빛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저히 메르디스라고 인정할 수 없다.
"잠깐, 잠깐만요!" 보다 못한 내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뭔가 이상하잖아요."
둘은 뭐가 문제냐는 듯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무안해진 나는 더욱이 말을 더듬으며 어버버거렸다.
"이상하다니 뭐가?"
"그, 그야 메르디스는 저렇게 어리지 않으니까요. 용의 인간화는 실제 나이와 비례하는 게 법칙 아니였어요? 일단 바툴보단 어리다지만 그래도 제 또래의 어린애로 변신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메르디스님은 그 법칙에서 예외이실뿐더러 나보다 나이도 많다."
—잠시 뇌가 기능을 정지한 듯 혼란스러웠다.
"…네?"
"당연한 것 아닌가? 그만한 연세가 있으시니 그만한 대우를 해 드리는 거지." 바툴의 말은 졸지에 이상한 쪽이 오히려 나인 것으로 못박았다. "그리고 모든 용이 정해진 법칙에 얽매이진 않아. 메르디스님 같은 경우는 태생부터가—"
그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의 뒤에 웅크려 있던 소년—아니, 메르디스가 다급하게 그를 향해 손을 젓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무언가를 기억해낸 듯 아차하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메르디스님이 예외라는 것만 알아둬라. 네가 알아봤자 쓸데없을 정보를 알려줄 필요는 없지."
바툴은 내게서 신경을 끄고 돌아서서 메르디스를 들어올려 제 등에 얹었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을 구긴 채 내 앞으로 머리를 내려놓았다. 순간 울컥했지만 난 따지지 않고 그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딛었다.
그의 목 위에 엎드려 몸통 위로 기어가고 있으니 마치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안 가 하얀 손 하나가 내 쪽을 향해 내려왔고,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메르디스가 힘겹게 나를 등 위로 끌어올려주었다.
바툴은 우리가 몸을 추스릴 새도 주지 않고 바로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의 비행은 메르디스를 타고 날던 것과 다르게,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높이 날았다. 내가 흥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바람이 괜스레 걱정되서 그의 목을 꽉 잡은 반면, 메르디스는 제법 신이 난 듯 보였다. 그는 계속 두리번거리며 때때로 바툴의 어깨를 짚고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어차피 메르디스도 용이셔서 자주 날아보셨을 텐데."
나와 나이가 비슷해보이게 변한 그에게 존댓말을 쓰자니 은근히 어색했다. 메르디스는 늘 짓곤 하던 특유의 방실방실한 웃음을 내보였다. 용의 모습일 때의 그의 표정하고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루사는 그런 케이스지? 용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보다 인간화한 상태로 있는 게 더 편한."
"아…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너, 용의 모습으로 변했던 적이 한 번도 없잖아. 나같은 경우는 어느 모습이든 딱히 상관없어서 그냥 용의 모습으로 지냈었는데, 인간의 모습도 좋은 점이 많구나."
"예를 들어?"
궁금해하며 내가 묻자, 메르디스는 다시 밑으로 펼쳐진 눈밭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 지그시 대답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남의 등을 빌려 비행하는 것도 인간의 모습일 때에만 가능하지."
그렇게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그의 여유로운 태도와 어우러져 무언가 그를 방해해선 안 될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가 바툴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점과 겹쳐 보니 새삼스래 신경이 쓰였다.
그새 내 머리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나이가 많길래 나이가 꽤 많은 축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바툴마저도 깍듯이 대해주는 걸까? 칠십 년? 백 년? 아니면 몇천 년도 더?
"설마 그 정도일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현재 살아있는 용들 중 천 년을 넘긴 용은 이 세상에 '굴 베나메' 단 한 마리 뿐이였고, 그는 무려 현재까지도 왕위를 지키고 있는 검은용들의 초대왕이였다. 검은용들의 위세가 예전같지 않은 지금도 베나메 한 마리 때문에 다른 부족들이 검은용들을 건드리지 못하는 추세인데, 외딴 설산들 사이에 숨어사는데다 소속된 부족도 불명인 용 한 마리가 어찌 그와 같은 세월을 살아왔을 수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고민이다. 생존하는 마지막 초대왕과 나이가 비슷한 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돼지가 날 수 있다는 헛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공기가 조금 따스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해가 보이지 않아서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다 왔습니다." 바툴의 목소리가 나를 졸음에서 깨웠다.
밑을 바라보자 커다란 구덩이 하나가 보였다. 자연동굴처럼 보였지만, 모양은 용의 손이 닿았던 것처럼 끄트머리가 깔끔한 원형이였다. 앞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산맥들이 구덩이를 빙 둘러싸고 있었고, 그 그림자 속에 갇힌 나는 그 앞에서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멀리서 보면 아마 우리들은 산맥들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바툴은 아무런 귀띔도 없이 곧바로 구덩이를 향해 수직낙하했다. 풍향이 거칠게 꺾여 얼굴을 강타했고, 덜 깨 있던 머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무심코 짧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조차 바람소리에 쉽게 묻혀 없어졌다. 간신히 옆을 돌아보자 메르디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죽을 힘을 다해 바툴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펄럭하는 소리와 함께 바툴의 날개가 낙하산처럼 펼쳐졌고, 그는 능숙하게 구덩이의 끄트머리 위로 활공하며 내려왔다.
나는 신기해하며 그의 등 위에서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벽면은 전부 얼어붙어 반짝반짝 빛났고, 구덩이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중앙을 향해 나선형으로 내려가는 얼음 계단이 눈에 띄었다. 계단은 어느 지점부터 밑의 심연에 삼켜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메르디스를 재촉하며 그의 손을 붙잡고 땅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확실히 신기하네요. 이런 게 눈밭 한가운데에 있다니…"
"들어가 보지 않을래?"
"들어갈 수도 있는 거예요?"
기대에 차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계단 위에 올라섰지만, 얼음이 바스러지는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다시 굳은 땅 위로 뒷걸음질쳤다.
옆에서 바툴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거 안 무너져. 그냥 메르디스님이랑 같이 내려가라."
"바툴은요?"
"난 여기 남을련다. 용의 모습으로 내려가기엔 계단이 너무 좁고, 그렇다고 불편하게 인간화하고 싶지도 않아." 그는 메르디스에게 주의를 돌렸다. "제가 동행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저 밑은…"
"알고 있어." 담담히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 어딘가에서 애석함이 배어나왔다. "적어도 몇백년동안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겠지. 곧 다시 올라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바툴은 잠시 그를 검사하다 고개를 돌렸다. "…정 그러시다면." 그가 마지못해 웅얼거렸다.
그렇게 메르디스와 나 둘이서 계단 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밑의 새카만 심연은 괜한 공포심을 자극할 뿐이여서, 나는 차라리 저 위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햇빛에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았다. 계단의 중턱으로 내려오자 위는 아예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발밑의 어둠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겁먹은 건 아니죠?" 옆에서 머뭇머뭇 발을 내딛는 메르디스에게 지분거렸다. 의미없는 놀림이라도 주고받아야 이 긴장감을 어떻게든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메르디스가 애써 웃으며 호응했다. 그가 불안감에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도 그와 똑같이 불안해하고 있었으니까.
계단은 끝이 없는 듯 보였다. 밑을 향해 끊임없이 빙빙 돌며 내려가는 그 형태를 눈으로 쫒자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한 걸음. 달라진 건 없다. 두 걸음. 세 걸음. 아직도 달라진 건 없다. 밑으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그림자에 싸인 심연뿐이다.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네번째 걸음을 내딛었을 때부터였다.
어둠 속에서 구조물처럼 보이는 무언가의 끄트머리가 솟아올랐다. 가까이로 다가갈수록 그것의 형태가 더욱 잘 보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제각기 다른 수많은 구조물들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걸음을 앞으로 내려가면 구조물 하나가 자세히 보였고, 다시 한 걸음 내려가자 다른 하나가 저 밑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단순히 커다란 돌덩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게 왜 이런 구덩이 속에 있는 건지 신기했지만 그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밑에서 계단이 그것의 바로 옆을 지나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동안 메르디스를 따라가는 것조차 잊고 그것에게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구조물은 누군가가 만든 커다란 탑이였다. 돌덩이조차 아닌 거대한 얼음덩어리에서 깎아낸 탑. 마치 조각사가 만들어낸 작품처럼 창문이나 층들을 받치고 있는 기둥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섬세했다.
계단과 탑의 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매료된 나머지 계단의 끄트머리에 서서 탑의 표면알 향해 팔을 뻗었지만, 미처 닿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이 내 것을 잡아끌었다.
"위험하니까 일단 밑으로 내려가자." 메르디스가 뛰어가듯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그 역시 나와 같이 들떠있어서인지, 계단에서 미끄러질 위험은 아예 잊어버린 듯 보였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실컷 볼 수 있을 거야."
"설마 이보다도 더…"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니만큼 가장 잘 지어진 탑들 중 하나지. 하지만 네가 좋아할 만한 건 그 외에도 언제든지 남아있어."
"여기가 대체 어딘데요?"
메르디스는 제자리에서 빙 뒤돌며 나를 앞으로 끌어내렸다. "도시."
어두컴컴했던 구덩이 속은 느닷없이 밝고 새하얀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투명한 계단 밑으로 보이는 것은 수많은 반짝이는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이였다. 한동안은 건물들이 발산하는 신비한 빛 때문에 형체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빛이 사그라들며 윤곽이 드러나자 그것들이 얼음탑과 마찬가지로 전부 얼음으로 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을 떡 벌린 채 그 장관을 바라보기만 하던 나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메르디스는 옆에 서서 씩 웃고 있었다.
"이것들—" 손가락으로 발밑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전부 누군가가 만든 거죠?"
"그럼! 한 마리가 전부 만든 건 당연히 아니고, 여러 용들이 힘을 합쳐서 함께 만든 거야."
잠시 정신을 빼앗긴 채 멍하니 서 있다가, 메르디스가 손을 잡아끌자 그제서야 몸이 삐걱이며 움직였다. 계단은 어느새 몇 개 안 남아 있었다. 끝까지 내려오는 와중에도 메르디스는 한시도 참지 못하고 나에게 이곳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귀찮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져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끝까지 듣기야 했지만.
"루사는 부족들이 네 개만 있는 줄 알았겠지만, 사실 아주 예전에는 다섯 개였어."
"네…?"
부족이 붉은용, 푸른용, 황색용, 검은용까지 합해 총 네 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본 상식이였다. 그 어느 책에서도 다섯번째 부족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가장 현명한 장로들조차 부족이 네 개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말은 상식을 벗어난 허황된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안 믿기겠지만 그래도 사실이란다. 아주 옛날에는 분명 다섯번째 부족이 존재했던 때가 있었지. 이 거대한 구덩이 속에 이 도시를 지은 것도 그 부족의 일원들이야."
"얼마나 옛날이길래…"
"적어도 팔백 년. 아님 천 년도 더."
…예상보다 훨씬 경악스러운 대답이다. 정말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천 년이면 베나메의 나이보다 조금 적은 정도 아녜요?"
'베나메' 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메르디스는 곧바로 건물들에게서 돌아서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베나메를 알고 있는 거야?" 그가 기대하는 듯한 기색으로 물어왔다.
"당연하죠. 검은용들의 왕이고 현존하는 마지막 초대왕이잖아요? 검은용들이 아닌 다른 부족의 용들도 모를 리가 없는 왕인데."
"그런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개인적으로요?"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말했다. "어떻게 왕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을 수 있어요? 제아무리 귀족이래도 저같은 애가 초대왕과 친한 사이일 리는 없죠."
"아…그렇구나. 하긴 당연한 거지." 흥분에 높아져있던 메르디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갑자기 의기소침해진 그의 태도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들었다. 너무 대놓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나? 메르디스라면 충분히 그런 황당한 질문도 할 수 있다는 걸 왜 감안하지 못한 건지…
일단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아무튼, 아무튼 그래서 그 부족이 이 도시를 지은 이유가 뭐에요?"
"자신들이 살 곳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이 땅에 살던 인간들에게 터전을 만들어주려 했던 게 커. 지금은 용들의 땅 곳곳에도 인간들이 숨어들어서 살아가고 있지만, 예전엔 용들의 영역 규제가 심했었어. 그래서 많은 인간들이 세계의 끝자락이자 그 부족의 땅이였던 이곳으로 밀려난 거야."
"자의로 인간을 도운 용들도 존재했었군요."
"자의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 왕의 의지가 곧 그 왕이 다스리는 부족의 의지잖아?" 메르디스는 설명을 해가면서도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그 부족의 왕이…자기 땅에 사는 다른 종족들도 중요하게 여겼거든."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적의 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의 모습이 아닌, 마치 오랜 친구가 들려준 그날의 경험담을 늘어놓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 왕은 이름이 뭐였어요?"
"에즈 아카데."
그 이름을 마치 노래의 가사처럼 읊조리는 그의 눈 속에 낮선 무언가가 비친 것처럼 보인 것은 단순히 조명의 눈속임이였을까. 분명 오래되고, 끝날 것 같지 않으면서도 애석해져 가는 무언가가…
발밑이 조금 딱딱해진 것을 느끼고 밑을 내려다보자, 바닥은 더 이상 얼음이 아닌 돌로 되어 있었다. 도착했다. 이 거대한 굴의 밑바닥.
바람은 거의 없다시피했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제 귓속에서 웅웅거리며 피가 흐르는 소리밖에 없었다. 유일한 빛은 까마득히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희미한 햇빛 한 줄기뿐임에도 불구하고, 얼음 건물들은 그 옅은 빛마저 흡수하여 스스로 더욱 밝은 빛을 발산했다. 그래서인지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이 도시는 태양빛이 닿는 바깥 설원만큼이나 밝았다.
메르디스와 함께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들 사이의 길 안으로 들어섰다. 전부 얼음으로 지어져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건물들과 거리는 붉은용들이 만든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 못 보던 것이 있었는데, 거리의 양변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혀 있는 길다란 말뚝같은 것들이였다. 그것들의 위쪽에는 안이 비치는 상자같은 게 달려있었다.
"저게 뭐죠?" 나는 말뚝을 가리키며 메르데스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이구나. 인간들은 밤눈이 우리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아서 저걸로 길을 밝혀줘야 했어. 위쪽의 등에 불을 붙이는 식이였는데, 그게 얼음으로 되어있다 보니 자꾸 녹아서 좀 번거로웠지."
"이런 것도 지어줬다니…그 왕은 인간들을 꽤 배려해줬나 보네요."
"응? 아아, 뭐 그런 셈이지."
메르디스는 어딘가 쑥쓰러워 보이는 모습으로 헤실거리며 웃었다. 딱히 그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는데, 그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더욱 더 활기차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튼 이곳은 그 왕과 그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서 만들어낸 곳이야.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인간과 용 사이의 완전한 이해는 결국 불가능했는지, 인간들은 전부 용들을 피해 도시의 한 쪽에 몰려 살았지만 그래도 왕의 제제 덕분에 큰 마찰이 있진 않았어."
"인간들이 많이 살았나요?"
"굉장히 많았어. 용보다 인간이 더 많아보일 정도였는걸? 살 곳이 마땅치 않은 탓에 그나마 호의적이였던 다섯번째 부족의 보호를 받고자 한 거지."
비록 환경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어난 결과라지만, 인간과 용의 공존이란 인간을 향한 경계가 느슨해진 지금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하물며 그 옛날에는 어떠했겠는가?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모든 용부족이 서로 친밀하게 지냈었지만, 인간들과의 관계는 오히려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나빴었다고 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어린 나조차 당시 인간들의 처지를 그리 알고 있었는데, 되려 인간을 보호하려는 왕이 있을 수 있다니. 회의적이면서도 신기했다.
메르디스는 들려주는 것은 역사학이나 철학이 아니였다. 그것은 이야기이고, 단순히 그뿐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옮다고 설득하려 하며 끈질기게 머릿속을 좀먹는 학문들과 달리 이야기는 아무도 설득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같이 원칙적인 용들이였다면 터무니없다며 비웃었을 그의 말을 어느 순간부터 진지하게 듣고 있었던 것은.
"봐봐. 저기 오른쪽에."
메르디스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내 뒷편을 가리켰고, 나의 시선은 치닫다 못해 천장을 뜷고 나온 기대감에 가득 차서는 기어가듯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이번에도 역시 건물이다. 하지만 이번에 본 것은 마치 자신은 다른 건물들과 다르다며 과시하는 것처럼 대놓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돔 형태의 지붕 밑의 짧지만 넓직한 원형 뼈대는 마치 투명한 반지의 구멍 안에 유리구슬을 끼워넣은 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만드는 과정에서 조금 특별하게 건축한 건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미약한 빛을 몇 배는 증폭시킨 심히 눈부신 광선을 내뿜었다.
메르디스가 다른 건물들을 두고 굳이 왜 보여주려 한 것인지 단번에 이해가 가도록 만드는 풍채였다. 당연히 엄청나게 중요한 건물이겠지, 이렇게나 화사하게 지어놓은 걸 보니.
"어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정말…" 숨이 턱 막히는 탓에 잠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말 멋져요. 이런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데…"
"도시도, 극광도. 전부 그런 거야. 잊혀져버린 채 더 이상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거지."
"하지만 이런 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저는 백 년도, 천 년도 더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메르디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은 깨우친 것 같구나.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무엇을 부탁한 건지."
그의 몸에서부터 희미한 하얀 빛이 뿜어져나왔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소년의 형상이 스러지고, 그 안개 속애서 흰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음이 비춰주는 신비한 빛 덕분인지 그의 새하얀 비늘이 마치 얼음이 서린 눈처럼 반짝였다.
사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방금부터 끊임없이 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그가 반드시 그 의문을 설명해줄 거라 믿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접 묻는 방법 외에는 답을 들을 길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 메르디스."
"왜 그러니?"
"그런데 이 거리 위에는 어째서 아무도 없는 거죠?"
발소리도, 용들이 대화하는 소리도. 이곳에는 그 무엇도 없다. 나와 메르디스 외에는 그 누구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화려한 얼음탑들 안에서부터는 말소리가 아닌 공허한 울림만이 메아리쳐 나왔다.
"전부 떠났으니까." 그리 말하는 메르디스의 목소리 역시 메아리만큼 공허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왕이 나약해지면 백성들의 결속력도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법이란다. 당연한 거야. 온 부족들이 큰 위험에 빠졌고, 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 위험을 저지했어. 그 대가로 모든 걸 잃어버렸지."
"그 다음엔…"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요?"
"다섯번째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지. 전부를 잃어버린 왕을 어떻게 따르겠어?"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굴 속의 침묵은 텅 비었으면서도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화사한 건물들은 주민이 없으니 그저 얼음덩어리에 불과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마냥 환상적이였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니 한때 누군가 살던 곳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가만히 앉아 눈을 감은 메르디스의 모습은 죽음을 묵념하는 이의 자세와 같다. 그 죽음이 다섯번째 부족의 멸망인지, 왕의 파멸인지, 아니면 잊혀진 모든 것들의 망각인지는 그 자신만이 알 터였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 다음엔 이 얘기는 한동안 하지 않기로 해요." —질문을 거듭할수록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 같으니까.
"모두가 잊어버린 그 옛날의 이야기를,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요?"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힘없이 웃고는 어떻게인 것 같냐고 되물었다.
-
그러합니다
폰으로 적은다음 복붙한거라 이상한 부분이나 오타가 있을 수 있읍니다ㅠ지적해주시면 환영
4화: http://m.dragonvillage.net/talent/board/novel?mode=read&b_no=21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