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술집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곳 벧엘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런 곳에 멀쩡한 술집이 있는 것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대화가 흘러가는 것도.
오래 전에는, 이곳도 누군가의 꿈과 희망이 있던 도시였을 것이다. 벧엘이라는 이름만큼 이곳도 밝은 불을 비추며 온정을 내비추던 때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벧엘은 치안 나쁜 무법도시에 불과했다. 과거의 영광 같은 건 단지 노인들의 추억팔이에서만 잠깐 반짝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도시에서 구석진 곳에 늦은 밤까지 남아 있는 건 대부분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이 마을의 살벌한 분위기를 읽지 못한 멍청한 여행자거나, 어두침침한 도시에서도 특히나 깊고 은밀한 비밀을 품고 있는 이들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분위기는 후자 쪽에 가까웠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붉은 머리의 남자 하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와 조심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실력은 정말 확실한 거겠지. 이번 일에 걸린 돈이 한두 푼이 아니야. 해내지 못하면 너도 나도 죽은 목숨이라고."
불안한 듯 얘기하는 한쪽에 후드를 쓴 이가 웃으며 답했다.
"실력이라면 걱정하지 마. 그쪽도 이미 봤을 텐데, 나 일 처리 하는 거?"
후드를 쓴 이는 자신만만한 투로 대답했다.
후드의 자신감은 마냥 허풍이 아니텄다. 후드의 실력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직접 보아 알고 있었다. 스치며 지나친 후 지갑을 슬쩍 훔쳐 자연스레 가방에 넣는 건 가히 예술에 가까운 솜씨였다.
거기에 치안경찰의 주머니를 터는 대담함까지. 치안이 아무리 나쁘다 한들 경찰은 경찰이었다. 시의 지원을 받고 무기를 든 경찰을, 그것도 혼자서 도둑질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실력과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드는 눈앞의 상대가 일의 중요도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자, 그럼 그걸 훔쳐오면 되는거지? 황비의 보석."
그가 훔치겠다고 장담하는 황비의 보석은 아주 오래 전, 이 나라가 왕정체제일 때 황비에게 대대로 물려오는 노란 다이아몬드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이건 완벽히 정신나간 짓이었다. 수많은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 황비의 보석을 훔치겠다니.
입헌군주제인 현재도 그 보석은 여왕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고, 귀중한 국보인 만큼 보통의 경호가 붙지 않는다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시간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보석이 호위에 둘러싸인 채로 이 근방을 지나가는 그 하루 동안 일을 마쳐야 했다. 그는 이 정신나간 짓을 해내겠다며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후드를 믿어도 될지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으면 좋으련만, 사내에게도 역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선택은 최대한 빨라야 했다.
"좋아, 선불로 20포르텐을 주지.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 나머지 30포르텐을 주마."
50포르텐이라니, 터무니없는 값이었다. 50포르텐이면 겨우 한 달 동안 밥만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한 번의 의뢰에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 의뢰가 국가적으로 보호하는 물건을 훔치는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보통은 놀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어림도 없는 돈이었지만 후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다음에 뵙도록 합시다 의뢰인 나으리. 저번에 얘기 전했던 그 꼬맹이에게 연락하지."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가게를 나가려는 후드의 목덜미에 사내의 손이 뻗쳤다.
"잠깐, 이왕 동업하는 거 얼굴이나 보자고."
하지만 후드는 냉소적인 답변으로 응수할 뿐이었다.
"알잖아, 이 바닥에서 얼굴 팔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돈 받고 도망치는 일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라고."
하지만 후드의 대답을 듣고도 사내는 쥔 손을 쉽사리 놓지 않았다.
"이왕 만난 거 얼굴 알아서 나쁠 거 없잖아. 그러지 말고 한번 보여달라고. 그렇지 않다면 혹시 보여주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냐?"
"이유라니, 과대망상이 심하시네. 바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여기서 오래 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나름 뻔뻔한 답변이었지만 사내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눈앞의 이 자는 분명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는 호구였다. 그것도 정말 아주 대물인 호구.
어디선가 철컥 소리가 들렸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후드에게는 너무 익숙한, 38구경 리볼버가 장전되는 소리였다.
총은 이런 가난한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작과 공수에도 큰 돈이 들어가는 데다, 이미 치안이 나쁜 이 도시에 총을 들여오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제대로 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후드는 제대로 호구잡혔다는 뜻이었다.
후드는 항복의 의미로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는 사내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발차기는 시원하게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사내를 뒤로 넘어뜨렸다. 후드는 휘청거리는 사내를 붙잡아 배를 가격했다.
이렇게 되면 총을 쥔 주인 입장에서도 행동하기가 애매했다. 사내의 몸이 후드를 가리고 있어 섣불리 총을 쏘았다간 동료만 해치는 꼴이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은색의 날붙이가 총을 쥔 손을 향해 날아들었다. 너무 순식간이라 볼 새도 없이 주인의 손에 기다란 붉은 선이 그어졌다.
후드는 잠시 멈칫하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어느 새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이 주인의 손목에 다시금 깊은 상처를 남겼다. 총은 불 한 번 뿜어보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졌다.
후드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달려드는 한 명의 복부를 찔렀다. 죽을 만큼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분명 몇 달간은 꼼짝없이 요양해야 할 상처가 새겨졌다. 후드는 쓰러지려는 남자를 휙 돌려 칼을 쥐고 있는 한 명을 쳐냈다.
다시 한 번 후드의 단검이 긴 포물선을 그렸다. 칼을 떨어뜨린 이의 목에 얕은 상처가 생겼다.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벤 자국은 아주 깔끔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완전히 죽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더 건들면 살려보내지 않겠다.
명백한 의사표시였다. 그는 검도 줍지 않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시 달려들려던 붉은 머리의 사내는 다시 한 번 복부를 얻어맞은 후에야 잠잠해졌다. 후드는 쓰러진 그에게로 가 쭈그려 앉았다.
"자아, 이제 왜 나를 공격했는지부터 말해 보실까? 총까지 들고 온 걸 확인했으니 우발적 범행입니다, 같은 소리 할 생각은 말고."
사내가 대답을 않자, 후드는 사내를 쿡쿡 찔렀다.
"살아있는 거 다 아니까 자는 척 하지 마라. 진짜 영원히 재워주기 전에."
그제서야 사내는 눈을 뜨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내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눈 굴러가는 소리 들린다. 네 무덤이 여기가 될 수도 있어."
"눈을 굴리다니, 말을 왜 그렇게 섭섭하게 해? 우리도 원해서 이런 건 아니었다고."
"누가 시켰는데?"
"그걸 알려주면 내가 호구등신이지."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가던 중, 사내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사내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피 흘리는 팔을 부여잡고 권총을 든 주인장이 후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손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살기등등한 눈은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이건 좀 위험할 수도..."
"건방진 자식, 죽어라아아아아아아아!"
좁은 가게에 총성이 울렸다. 다행히 크게 기합을 넣은 것 치곤 그의 사격실력은 형편없었다. 총알은 그의 볼을 스치고 가 애꿎은 창문을 박살냈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후드가 벗겨지고 아름다운 은발이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은발은 현재 나라에서 최대의 자본과 기술을 가진 워커 가의 상징이었다. 그가 은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도 혼혈이던 뭐던 워커 가의 일원이라는 뜻이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가져오는 의미는 아주 컸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위쪽 사람이 이제는 얼마 없는 벧엘의 것까지 빼먹을 지도 모른다는 신호임과 동시에, 어쩌면 피해오던 정면 상대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씨앗이었다.
"젠장, 어딘가 재수없다 했더니 높으신 분들 쪽이었냐! 여기 볼 게 뭐가 있다고!"
바닥에 깔린 상태로 소리치는 사내를 가볍게 밟은 채로 은발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닥쳐봐 좀,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내 이름은 그레이. 이 구역 최고의 좀도둑이자 워커의 버려진 막내아들이다."
그레이는 그리 말하고는 밑에 깔린 사내를 한번 더 짓밟았다.
"소개가 더 필요하냐? 정 그러면 저승에 가서 듣던지."
어느 순간 주인의 손을 벗어나 그레이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이 얼떨떨하게 서 있는 주인을 겨눴다. 장전부터 조준까지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너, 그거 언제...!"
"그건 알 거 없고. 내가 워커 가에서 난 거 발설하면 죽인다. 어디 있던 찾아가서 죽일 거야."
그레이는 싸늘한 시선으로 발 아래 깔린 사내를 쳐다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혹시라도 소문이 나는 날에는 너희 둘 목은 더 이상 그 몸에 붙어있지 못할 거야."
그레이는 작은 비수를 던져 주인의 팔에 다시 한 번 얕은 상처를 내어 놓고는 돌아섰다. 그렇게 협박을 마치고 술집을 나오는 그레이의 발걸음은 방금 전투를 치르고 온 것 치고는 심하게 가벼웠다. 그는 온통 황비의 보석 생각에 빠져 있었다.
"황비의 보석이라니, 탐나는걸?"
그 작은 탐욕이 불러올 국가 전체를 흔들 만한 거대한 사건을 알지 못한 채, 그레이의 계획은 하나하나 세워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