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 거센 눈보라. 높은 빙산. 이곳은, 칼바람의 산맥이다. 방랑자들의 살을 찢는 것 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분다고 해서 칼바람의 산맥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험난한 곳을 어떤 옷도, 장비도 없이 오르는 한 드래곤이 있었다. "젠장. 얼어 죽겠군. 나오지 않는다면 죽여버리겠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 걸음씩 정상에 가까워지던 그 용은 마침내 가장 높은 빙산의 정상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마찬가지로 크게 외쳤다.
"아모르! 나와라! 너의 목소리를 들려라!"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그의 목소리는 공허한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엄청나게 거대한 목소리가 들렸다.
"건방지구나, 크리스. 하지만 여기까지 올라온 걸 보면 근성이 없는 것 같진 않구나. 꼭 그걸... 알아야만 하겠느냐...?"
처음엔 노한 듯 울리던 목소리는 점점 누그러져 마지막엔 조심스럽게 묻듯이 울렸다. 그리고 그 드래곤, 아니 크리스는 기가 차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 알아야만 하겠냐고? 그래. 평생 모르는 채로 살아왔어. 그러니 빨리 나에 대한 진실을 말해."
"아아... 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진실은 언제나 차갑고 날카로우며 가장 약한 부분만을 찌르는구나... 너에 대한 진실... 그래. 들려주마. 하지만 마지막으로 묻지.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고 부숴놓을 가혹한 진실 앞에서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말이다."
아모르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고 크리스는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도망. 후회. 그딴 걸 할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그러니 평생을 기다려왔지. 하루하루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그러니 말이나 해."
크리스의 말은 낮게 시작했다가 찢어 갈길 듯이 으르렁거리며 끝났다. 아모르는 묵묵히 듣기만 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 부모님과 일족의 원수, 홀로 살아남은 너와 네 누의의 원수, 그리고 마음이 찢길대로 찢긴 너를 보듬어준 그녀의 원수. 정녕 알고 싶단 말이지... 좋다. 말해주마."
"길게 끌지 말고 빨리 말해! 그리고 그 이름들을 입에 올리지 마... 네가 있는 그 구름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그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
크리스는 나지막이 말했고 아모르는 말을 이었다.
"편한 일이 없었던 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생. 그리고 항상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던 사건의 주인공들은... 아니, 주인공이라 하는 게 맞을까."
아모르의 마지막 말에 크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분노를 담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 중 입이 움직였다.
"한 놈이란 말이지... 당장 말해."
"그래. 말해주마. 그건 바로 다크닉스란다... 빛의 파괴를 위해서. 모든 것의 타락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네겐... 빛을 따르는 모든 존재의 말살을 위해서."
"다크닉스? 고맙다."
크리스는 짧게 말하고 뒤로 돌아서 산맥을 다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모르의 말이 그의 발을 멈추게 했다.
"잠시만, 크리스. 아니, 루시퍼라 부르는 게 맞으려나."
"내 스스로 버린 이름이다. 입에 올리지 마. 찢여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자신의 살을 도려내듯이 말을 뱉은 크리스는 마지막 마디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은 증오와 혐오로 가득 차있었다.
"어떻게 부르던. 다크낙스가 어째서 너에게 그런 일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왜 하필 너일까? 어째서?"
아모르의 물음에 크리스의 온몸이 멈췄다. 크리스는 간신히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빨리 뱉어..."
"네가 그와 같기 때문이다. 빛의 대한 믿음, 행복한 가정, 하나뿐인 형제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연인. 이 모든 걸 가지고 있었지. 너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너를 보면 볼수록 견딜 수 없었겠지.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올랐을게다. 이제는 깨지고 부서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그 과거가. 그래서 너를 파멸시킨 것이다. 너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아모르의 긴 말이 나직이 이어지는 동안 크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모르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크리스는 고개를 들고 아모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향한 크리스의 눈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렸다. 피눈물,이었다.
"어째서... 단지...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에!! 흐아아아!! 흐으아아아!! 크아아...! 커헉! 커헉...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네게 모든 것을 선사한 그 빛. 그 원천마저 내가 하나하나 부숴주마. 너희가 이세상에 빛이란 게 존재한 적이 없다고 믿을 때까지!!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 찢여 발겨서 죽여버릴 것이다! 으아아아!! 타천사의 맹약!"
푸르던 하늘에 거친 눈보라를 뚫고 붉게 물든 크리스, 아니 루시퍼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맹세하지, 아모르. 네놈과 네놈을 따르는 모든 존재들을 하나도 흔적도 남지 않게 부숴버리겠다고. 이것은 타천사의 맹약이며 이 맹약을 지키지 못한다면 내 목숨 따윈 가져가도 좋다, 타천사여."
루시퍼의 몸을 검디 검은 마나가 감싸듯 훑고 지나갔고 빛나는 그의 눈은 이제 빛의 파괴만을 위해서 푸르게 빛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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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구나, 나의 아들아. 결국 이것이 너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이 너를 이끄는 곳까지 가보거라.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말거라."
크리스는 이미 빙산을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고 잠잠하던 하늘에 공허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