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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우리가 언제나 만나던 장소, 만나던 시각에 그 자리에 서있던 난 항상 그녀가 오던 숲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지만 해가 저 수평선을 넘어갈 때까지 그녀의 꼬리 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자리에 나온 난, 또다시 해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있었다. 그녀가 약혼했다는 것을 알고, 그 혼인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애달픈 이 마음을 달랠 수 없을 것 같았으니. 그리고 기다림은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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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제는 이 연서의 마무리를 지을 때인가 보구나... 내가 바라오던, 둘이서 오손도손히, 또 알콩달콩히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사는, 그런 마무리는 아니지만...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면 더 이상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야... 날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그대가 너무 싫고, 밉다가도, 또다시 그 사랑을 버리지 못해 미안하고, 또 미안해... 혼인식 전날 이제는 많은 추억이 깃은 그곳으로 향하는 내 머릿속엔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 이것 좀 보시오! 타오르는 불처럼 붉은 것이 그대처럼 아름답지 않소? '
' 저 푸르른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오. '
' 그대가 좋아하는 머루요. 음? 이 상처? 별것 아니라오. 하핫... '
' 그대와의 이 하루가 백일처럼 길었으면 좋겠소... 그렇다면 그대와의 백일몽 속에서 살 수 있을 터이니. '
' 어라? 볼에 뭐가 묻었소...!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이제 됐소! '
' 난... 괜찮소...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절대...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
그리고 마침내 보름달이 유난히 밝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난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붙잡았다. 그저 머릿속을 비우며 벌써 이름 모를 들꽃들이 만개한 그곳에 도착하자 생각했던 대로 그가 나를 바라보고 밝게 웃었지만 내 눈에 그 햇빛처럼 빛나는 웃음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아직도 이곳저곳 붉게 물든 상처들이었다. 아무 감흥이 없던 평생 동안도 지루하단 생각이 든 적이 없건만, 그와 떨어져 있던 고작 그 하루의 시간들은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인 내가 말이 없자 운랑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나를 불렀다.
" 그대가 올 줄 알았소. 오늘은 어디로 가려고 하시오? "
" 할 말이 있어서 왔소. 이제 앞으론 나를 찾지 마시오. 다시는 나와 만나려 하지도 마시오. 왜냐고 묻는다면... 이제 당신에게 질려서라고 해두겠소. 어제 호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말이오. 그럼 이만... "
" 잠시만!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시오? "
빠르게 말을 내뱉고 차갑게 돌아서는 내 손목을 당황한 듯이 잡은 운랑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이러지 마시오... 제발... 제발 더는 나를 유혹하지 마시오... 그 슬픔으로 물든 고운 눈으로 나를 보지 마시오... 내 발길을 무겁게 하는 그 눈으로...
" 말했잖소. 이제 그대에게 질렸다고. "
"... 거짓말... 스스로가 제일 잘 알 것 아니오... 그 떨리는 손을 보고 말해보시오! 그러니 제발... 그대 나를 떠나가지 마오... 제발... "
아니야... 아니야... 제발... 왜 그대는 나 같은 나쁜 년을 잊지 못하는 것이오...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속이고 헛된 희망을 심어준 날 그냥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오... 그러니 제발... 그대를 다치게 한 나를... 끝까지 그대에게 상처만 주는 나를... 그리고 아직까지 그대를 연모하는 나를... 제발 이제 그만 잊어주오...
" 이러지 마시오! 우린 이어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소... 그러니 이 손, 그만 놓아주시겠소? "
차오르는 눈물과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으며 난 조금의 연민과 서늘한 미소만을 담아 싸늘히 말했다. 마지막 마디를 뱉으며 떨리는 손을 움켜잡으며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자 난 기어이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아아, 내 손을 놓지 못하고 그칠 것 같지 않는 장마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대는, 아직도 나를 놓지 못하였구나. 정녕... 정녕 내가 그대를 놓아야 하는 것이오...? 생각을 마친 난 여전히 눈물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애절히, 또 간절히 바라보는 운랑의 손을 뿌리치고 숲 속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밑으로 축 처진 큰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새하얘진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난 주저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울어버렸다.
" 미안하오... 흐윽... 더 이상... 더 이상 이런 나 때문에 그대를 아프게 하기 싫었소... 부디... 이런 못난 나를... 그대에게 상처뿐인 나를... 끄흑... 끝까지 당신을 놓지 못하는 나를... 부디 잊고 행복하게 살아주오... 흐아... 흐아아아아아!! "
구름 한 점 없는 미칠듯한 푸른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하는 빗물을 가르며 내 비통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순간 나를 미칠 듯이 노하게 한 것은, 죽어버리고 싶었던 나를 붙잡은 한 가지가 그 잘라내고픈 약혼이라는 것이었다. 풍운랑은 어쩌면 내가 죽는 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니. 부디... 이런 그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나를 부디 용서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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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대체 왜... 대체 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오... 피할 수 없는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그대를 말릴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난 왜 이리 무기력할 뿐인가... 곁에 두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그대를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오? 원통하고 비참한 마음을 참을 수 없던 난 하늘을 바라보며 응어리진 슬픔을 토해냈다.
" 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 대체 왜!! 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실 것이라면 그녀의 고통이라도 덜어내시지... 어찌 그녀가 그 창으로 저를 찌르게 하셨습니까... 그녀를 미워하려고 했습니다... 원망하려고도 했습니다... 제가 떠나야 그녀가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 생각해 그녀를 떠나보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결국 이 못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녀를 잊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면 제가 그녀에게 빠져들게 하지 말으셨어야 하셨습니다... 그녀를 잊지 못하는 전... 이렇게 무기력하고 비참하니... "
지금 그녀도 나처럼 누군가를 울고 있을까... 그 고운 얼굴에 번지는 눈물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건만... 이번에는 이 못난 내가 그녀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구나... 제발... 제발 그 눈물이 눈물 흘릴 자격도 없는 나의 눈물인 이 비보다 일찍 그치고 다시는 흐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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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벌써 내일이 약혼이구나. 미르듀스 가문이, 그리고 그 아이가 그렇게 된 직후 반강제로 이뤄진 약혼이 벌써 내일로 다가오다니... 시간도 야속하구나... 그 아이를 잃고 난 후... 아무것도 상관없었으니. 하지만... 물의 수호자님... 그분을 보면 자꾸만 잊고자 했던 기억이 떠올라... 그 무엇보다, 그 아이가... 설마... 진짜로... 이렇게 생각하며 누각에서 구름 한 점 없는데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난 들려오는 발소리에 화창한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저건... 화미호? 다 젖었군. 젖은 꼬리를 끌며 무표정보다 더 무표정한 얼굴로 누각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미호를 본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 다 젖었군. 숲에서 무얼 한 것이오? 혼인식이 내일인ㄷ... "
푸화악! 내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 몸 전체에 불꽃을 피어나게 한 화미호는 그렇게 몸의 물을 순식간에 말렸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수증기가 터져 나왔다. 윽... 연기를 손짓으로 날리며 미간을 찌푸린 내게 미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툭. 투툭. 빗방울이 처마 위로 가볍게 떨어지듯 미호의 눈물이 축 처진 듯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정녕 그대는... 이 약혼을 원하시오? "
이건 무슨 질문일까. 갑자기 이런 걸 왜 묻는 거지? 이 약혼을 원하냐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마음에 두는 사람이 없어도 정략혼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음에 두는 사람... 있었지. 내 마음을 전부 차지했던 한 존재가. 하나 지금 이런 마음을 드러낼 순 없다. 이렇게 생각한 난 그녀의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려 아직도 흐르는 수정 같은 눈물을 닦아주며 건조하게 말했다.
" 원하지 않을 리가. 나쁠 게 없는 혼인 아니오.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
" 결국... 진심은 하나도 섞이지 않았구려. "
하, 너무 딱딱하게 말했나. 기왕에 들킨 마당에 더 이상 숨길 연유도 없지. 난 그녀의 눈물을 훔치던 손을 멈추고 아까보다 훨씬 생동감있이 말했다.
" 들켰구려. 왜, 그래서 슬픈 것이오? 예비 신랑이 예비 신부에게 마음이 없어서? "
" 그럴 리가. 난 오히려 고맙다오. 내가 지금 그대에게 할 말을 생각하면 말이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난 이렇게 생각하며 여전히 그 단단히 결심한 듯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뗀 그녀의 말은 나를 조금 놀라게 했다.
" 누군가를 깊이, 아주 깊이 사모하면... 그러면 누구든 미X 짓을 하게 된다 들었소만...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미X 말처럼 들렸소. 하지만 지금의 난... 아무래도 미쳤나 보오. "
"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픈 거요? "
"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시오... 제발... "
방울방울 빗물 같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내게 자신을 놓아달라 간청했다. 놓는다고? 하... 놓는다라...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누군가를 잡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건만...
" 애초에 그대를 잡은 적도 없소. 그저 무기력했을 뿐이지. "
" 정녕... 정녕 그렇소? 고맙소... 고맙소... "
이제는 입을 가리며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난 속삭였다. 이 상황에 고마워해야 할지... 씁쓸해해야 할지...
" 지금 보니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을 연모하고 있는 것 같소만... 지금 이 순간으로 우리 둘의 약혼은 파기요. 아아, 걱정할 필요는 없소. 호 가문과 미호 가문의 긴밀한 관계는 깨지지 않을 터이니. 가주의 권위는 이럴 때 편리하단 말이지... "
부드럽게 말한 난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그녀를 뒤로한 채 몸을 돌려 아직도 흐르는 빗물을 뚫고 누각 밖으로 나갔다. 아, 그 말을 잊었군.
" 난 지금 내 마음을 따르려 하오. 너무 오래 걸린 말을 전하려 하는데... 그대도 너무 늦지 않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말을 전하시오. 나처럼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
마지막 말을 전한 난 용으로 변해 네 발로 힘차게 빗물로 미끄러운 땅을 박차며 빙하 지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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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구나... 그녀가 그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날이. 혹 이 눈물이, 이 비가 그 불구덩이의 뜨거운 불길을 조금이라도 잠재울 수 있다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 난 오늘도 그녀와의 시작과 끝이 돼버린 그 장소에서 눈물을, 아니 비를 흩뿌렸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은 난 저 멀리의 무언가를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 하, 이젠 너무 그리워서 헛것도 보이나 보구나. 미호가 이곳에 왜 온단 말인가.... 아니다, 헛것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저렇게 있으면 좋겠구나... "
하나 내 앞에 선 그녀는 헛것이 아닌지 나를 보고 미약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를 본 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내 눈에서는 내가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가냘픈 눈물 한 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 나 아직 그대를 원하고, 그대 아직 나를 원한다면, 정녕 그렇다면... 그 눈물을 거두고 다시 내 곁으로 와주겠소? "
저런 질문이 어디 있단 말이오. 애초에 모순 자체인 질문이. 난 한 발짝, 또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한 뼘이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따스한 숨결이 지금 이 순간이 미치도록 현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다.
" 한순간도 떠난 적 없었소, 그대의 곁. "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 난 그녀의 보드라운 볼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잡고 입을 맞췄다. 처음은 짧게, 그리고 또 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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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입을 뗀 난 뜨거운 숨을 뱉고 웃으며 말했다.
" 이제 우리 둘이서 오손도손히, 또 알콩달콩히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사는 것 밖에 남지 않은 듯한데... 어떠시오? "
" 그것 외에는 바라는 게 없소... 아, 아이도 한 두 명 정도... "
"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아이를 생각한단 말이오? 이거, 생각보다 앙큼한 여자구려. "
" ... 그러지 마시오오... "
" 농이었소, 농.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게 좋으려나? "
맑게 갠 내 마음처럼 푸른 하늘 위로 우리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래서 아이는 역시 두 명이 좋겠어... 한 명이면 그 아이가 너무 적적할 터이고 세 명이면...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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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익.후. 실.수.로. 다.음.편.이... 큼! 죄송합니다 모르는 척 실수로 다음편 올려버리는 거 한번 해보고 싶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하려고 끝까지 모아서 썼습니다! 모쪼록 이어서 잘 감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제가 썼는데 미호가 연서의 마무리를 지을 때라고 할 때 울컥했어요... 전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을 어떻게 죽여야 좋을까 고민하는 옆집하고는 다르네요... ( 그 옆집은 과연 누굴까요... 후후 ) 큼큼! 그래서 저 앞으로도 사극 계속 쓸까요? 아니면 그냥 연재하는 거 계속 올릴까요? 이거 의외로 단편이 본편보다 추천이 많은... 아, 그리고 여우비는 제 세계관과 이어지니 운랑과 미호, 그리고 무엇보다 호는 ( 언젠가 ) 다시 나올 거랍니다! 오늘도 이런 장문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