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행렬 속에 섞여들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광인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갔다. 두텁게 쌓인 잿가루에 발이 푹푹 빠졌다.
둘러본 사방엔 숯덩이가 풍화된 신전처럼 자리를 잡고, 꺼지지 않은 잔불이 간헐적으로 열기를 내뱉었다. 달아오른 공기에 폐가 저몄다. 멀리서 망령처럼 성큼 다가온 안개가 발치에 늘어졌다.
남자는 지독하게 무거운 몸이 의뭉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짊어진 거대한 십자가를 발견했다. 각자가 범한 죄의 크기라도 되는 양, 행렬에 참여한 이들은 제각기 십자가를 품고 있었다. 남자의 반신을 훌쩍 넘는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십자가는 가벼웠지만, 그의 힘보다 무거운 듯 연신 상체가 꺾였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걸음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눅눅하게 젖은 상의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로서는 당장에라도 이 의미 없는 고행을 내던지고 싶었지만, 수백의 광인들이 자아내는 흐름은 사람 하나를 휩쓸기엔 충분했다. 그는 이리저리 치이며 앞으로 내몰렸다. 검은 행렬이 안개 사이로 더디게 파묻혀갔다.
발치를 겨우 따라 붇던 안개가 더는 낮지 않다는 걸 깨달을 때쯤, 그는 냇내를 맡았다. 그리고 또 다른 냄새도 함께. 텁텁한 공기 사이로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남자는 불현듯 무언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서는 걸 느꼈다. 그를 따르게. 그를. 장작을 자칭하는 독생자여.
남자와 가까운 곳에서 걷던 광인이 돌연 십자가를 들어 자신을 내리그었다. 그 끝이 뭉툭해서 남자는 광인의 동공이 풀리기 전까지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다. 광인의 가슴부터 복부까지 붉은 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아니,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몸뚱이가 허물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합당한 수순을 밟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녹아내린 세상에 천천히 붉음이 싹을 틔웠다. 남자는 이제서야 그네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살점과 피로써 녹아내린 땅을 덮으려는 것이다. 깊숙이 파묻힌 유지를, 추락한 권좌를, 교활한 이의 표상을 아득한 곳에 매몰시키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십자가를 잇는 밧줄을 더듬었다. 도무지 매듭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끝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슬오슬 돋아나는 두려움에 남자는 실소를 흘렸다. 점점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허공을 더듬었다. 마치 맹인의 그것과 같이 무의미하고, 무작위적이나 더없이 필사적이었다. 남자는 저 땅 깊숙이 누워있을 신성에 빌었다. 구하소서. 우릴 구하소서.
화답하듯 일순 안개가 그의 손에 이끌렸다. 광인들의 긴긴 행렬이 급작스레 드러났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긴 공백을 넘어 그에게 닫았다. 맥동하는 시선에 남자는 전율을 되내었다. 이내 작위적인 이끌림을 벗어난 안개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그와 광인들 사이에 회색의 베일이 둘러젔다.
그는 독특한 무게감에 손을 흘겨보았다. 손에 검신이 검붉은 롱소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천천히 굳어가는 용암처럼 꿈틀거리는 붉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검이었다. 흑색 무리의 짖물린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뭐지. 뭔가 저건. 악마다. 아니야. 악마의 성운이다. 아닐지도 몰라. 저게 우릴 먹을 거야. 설마. 웅얼거림이 번졌다. 이내 그들의 아우성으로 잿빛 동공이 가득 찼다. 짐승의 소리로 언어를 흉내 내는 모양새였다. 찢어지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당장 그 검을 버리라며 고함쳤다. 우리는 또다시 추락할 것이라고, 신은 기도를 외면하고, 선지자는 어머니 땅의 품에 안기며, 유황을 처바른 남자가 자신들을 문 앞으로 내몰 것이라 소리쳤다.
돌연 광인 하나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기점으로 삼아 흐름이 무너졌다. 수십 개의 손이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엉성한 자세로 휘두른 검이 가장 가까이 있던 광인의 허리를 반쯤 갈랐다. 절단면에서 피 대신 잿가루가 솟구쳤다. 세 된 비명이 반도 나가지 못하고 멈췄다. 웃음이 차올랐다.
짓처드는 손들이 남자를 끌어내렸다. 남자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이내 광인들의 시야 역시 남자와 비슷해졌다. 잘려나간 다리가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남자는 뇌를 지저대는 전율을 삼켰다. 고작 검 몇 번 휘두른 거로 팔이 떨렸다. 그는 검을 다른 손으로 옮기며 비적비적 일어났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달려 나온 광인을 반으로 갈랐다. 이번엔 깔끔히 잘렸다. 시야가 핑 돌았다. 머리에 치닫는 붉고 뜨거운 감각이 있었다.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싶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통제를 벗어나는 걸 느꼈다. 주춤 무릎이 꺾이려 했다. 입술을 짓이기며 검을 뒤로 휘둘렀다. 피 묻은 회색 곤봉과 함께 광인이 네 배로 불어났다. 아니, 실은 두 배일 것이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는지 세상 모든 게 반으로 갈라졌다.
수많은 검은 무리가 천천히 기어왔다. 전율에 도취된 남자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붉음이 번뜩일 때마다 광인들의 신체가 허공을 날았다. 그는 이리저리 내달리며 광인들을 배었다. 허리를 짓누르던 십자가의 무개는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사람이었던 잿가루가 날렸다. 뇌가 떨렸다. 눈앞에서 처음 보는 문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뜻은 알 듯했다. 나를 먹고 뜻한 바를 이루게.
오른쪽 눈이 타들어 가듯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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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는 눈을 떴다. 곰팡이가 드문드문 핀 천장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이명이 귀를 괴롭혔다. 찢어지는 두통이 수면욕을 야금야금 좀먹었다. 반쯤 처진 커튼 사이로 새는 빛이 그의 시야를 산산이 부서트렸다.
비올레타는 잠시 그 모든 것들과 싸우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알람시계의 가세에 곧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 백기를 올렸다. 비올레타는 배를 벅벅 긁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멍하니 걸터앉았다. 꿈을 꿨다. 별 해괴한 꿈을. 내용은 뭇 무의식이 일으키는 사고가 그렇듯 흩어진 채었지만, 한가지는 또렷했다.
눈앞에서 알짱이던 문양. 글자 같기도 하고, 무언가의 회로 같기도 한 그 문양이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그는 문득 허공에 손을 뻗었다.
"나를 먹고 뜻한 바를 이루게."
새삼 당연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혹 누군가 이 광경을 목도했더라면 동전 몇 푼 쥐여줬을 테다. 머리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게 두통이 더 심해진 듯싶었다. 비올레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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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어억 시험 수행평가 으윽
안녕하세요 불초 글쟁입니다. 이거 엄청 오랜만에 적어보는거 같네요. 변명이나 좀 해 보자면, 요새 공부가 너무 빡세서;; 설렁설렁 해도 성적 나오던 시절은 다 가버렸네요ㅠ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