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물과 섞여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가기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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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간략한 인물 소개도]
블랙[다크닉스] : 항상 불행에 쩔어있는 용. 어릴 적 날기를 시도해 보려다가 새랑도 부딪히고 추락해 본 경험이 있어 트라우마 탓에 날지 못하고 용임에도 고소공포증이 있다.
/ 성별 : 여자
데빌 [데빌곤] : 저승에서 천국과 지옥 중 지옥 부서의 총 담당자.
/ 불행한 용에게 행복할 수 있게끔 하며 계약을 하는 일을 하고 있다.
/ 성별 : 남자
하람 [아르테미스] : 천국과 지옥을 둘 다 담당하며 세계관 최강자라고 불리는, 신이다.
/ 성별 : 여자
기억 해야 할 주요 인물들은 이 정도 입니다.
추후에 나오는 인물들은 읽다 보시면 인물의 특징이나 성격 같은 걸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인물...? 용물이라고 하죠)
(+ 여기서의 용들은 천계의 용들이 아닌 이상 그 어떠한 이능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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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블랙은 자신의 원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의 용생이 왜 이 꼬라지인지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콱 죽어버릴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섣불리 나온 결론은 아니었다.
블랙은 매번 왜 이렇게 자신이 불행한지에 대해 생각했고, 그 생각이 저번 주 부터 오늘까지 절정에 달하던 참이었다.
저번 주에는 친삼촌이 교통사고가 났다는 말에 병문안을 갔는데, 악귀 같은 놈이 병원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만 잔뜩 들었다.
그래서 블랙은 이런 식으로 살 거면 뭐 하러 살아야 하나 싶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 하더니 집안에 웬 용이 나타났다.
'뭐야, 이거 만화야? 소설이야? 갑자기 이렇게 용이 나온다고? 아, 잠시만.. 나도 용이지'
라는 말을 내뱉으며 블랙은 그 용을 쳐다봤다.
용은 무심한 표정으로 블랙을 쳐다봤다.
블랙이 주거침입이라 소리 지르려는 순간 용이 순간 블랙에게로 훅 다가왔다.
용 : "네가 블랙 맞지?"
블랙 : "누, 누구세요"
데빌 : "데빌이라고 해. 직업은 악마"
블랙 : "네?"
블랙은 멍하니 데빌을 쳐다봤다.
우리 세계관에 악마가 있었어?
아니, 애초에 독자들이 생각하기엔 용이라는 존재도 너무 허구이긴 하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용에 악마?... 뭔 소리야.
근데 그럼 여기에도 사후세계가 존재한다, 이 말인거야??
블랙 : "저 죽는다는 생각만 했는데도 지옥에 가는 건가요?"
데빌 : "바보인건지 순수한건지 모르겠다. 너 죽으려면 아직 멀었어. 난 오늘 계약서만 보여주러 온 것 뿐이야"
블랙 : "계, 계약이요?"
데빌 : "뭘 그렇게 놀라"
데빌이 정장 재킷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저 작은 품 안에서 저게 잘도 나오네, 라고 생각하던 블랙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차 싶었다.
정신 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데빌을 노려봤다.
블랙이 눈을 부릅쓰고 보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은 참으로 악마 다웠다.
블랙 : "무슨 계약인데요? 혹시 일종의 시험? 그것도 아니라면 저한테 사악한 일이라도 벌이실 건가요?"
데빌 : "너는 괴담을 많이 읽은 건지 성경을 믿는 건지 모르겠다. 너 기독교 아니잖아"
블랙 : "헉, 어떻게 아셨어요?"
데빌 : "내가 지금 심심풀이 땅콩으로 온 줄 아니?"
데빌은 계약서를 봉투 안에서 꺼내다 말고 블랙을 쳐다봤다.
블랙의 눈동자에는 아직 불신이 서려 있었다.
데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데빌 : "좋아, 설명부터 먼저 해줄게. 내가 좀 불친절했지... 일단 악마는 너희, 음, 너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거랑은 달라. 우리는 평범한 용들한테 엄청난 불행과 시련을 주고 그걸 보면서 박수 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뭐, 좀... 감정이 무딘 사람들을 주로 뽑아놓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이코패스 같은 건 아니니까"
블랙 : "사, 사이코패스요?"
데빌 : "아니라고"
블랙 : "넵"
데빌 : "아무튼 악마는 평범한 용들에게 아주 적당한 불행만 주는 거야. 아주 약간이지. 그리고 그걸 극복함으로서 더 강해지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하는 거야. 우리도 천사들처럼 신이 고용한 존재야. 우리는 세상이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불행을 선사하는 능력을 가진 것 뿐이고...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교육도 받아"
블랙 : "정말요?"
데빌 : "믿든지 말든지"
블랙 : "그럼 왜 저한테 오신 거예요? 전 충분히 불행한데요? 호, 혹시 제가 이 불행을 잘 극복하지 못해서 나중에 지옥에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
생각이 앞서 나가 말을 쏟아내는 블랙을 보던 데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벌써부터 앞길이 험난하게 느껴지는데, 데빌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데빌 : "블랙, 넌 신에게 특별한 존재야"
블랙 : "네?"
데빌 : "너의 비정상적인 불행은 사실 신의 운명에 따른... 아, 음.. 까놓고 말해서 랜덤 뽑기 추첨 같은 걸로 걸렸다고 생각하면 돼. 넌 불운한 삶을 살도록 정해져 있어.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네가 불행한 만큼 덜 불행한 용이 나오거든. 또 운이 좋은 용들이 자만하지 않도록 널 통해 균형을 맞추는 거야. 불운한 용들은 살면서 행운아를 만날 확률이 의외로 크거든. 그것도 뭐, 일부러라고 해두자. 서로 그런 식으로 마주쳐야 에너지가 균형.. 음, 길어질 테니까 자를게. 대충 그런 얘기야"
블랙 : "다행이다"
데빌 : "뭐?"
블랙 : "그럼 다 이유가 있었던 거네요. 제가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태어난 게 아니니까"
데빌은 해맑게 웃는 블랙을 보며 침을 삼켰다.
좀 전까지 죽기로 마음먹었던 용이라기에는 참 환한 웃음 이었다.
불행한 용들을 조금 더 강인한 성격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신이 일전에 말씀한 적은 있었지만, 데빌이 보기에 그건 훨씬 비참한 처사 같아ㅏㅆ다.
천계에서 계약서를 챙길 때 '블랙을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요, 이 곳에 오면 천사로 만들어주세요' 라고 했으나 신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 건 데빌이 가장 잘 알았다.
데빌은 그냥 해본 말입니다, 라고 하며 블랙의 집으로 곧잘 내려왔다.
그렇지만 웃으며 다행이라는 말 따위나 하는 블랙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데빌 : "이제부터는 계약서 한 번 읽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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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데빌(갑) / 직책 및 담당 부서 : 불행 운명 용 담당 부서 총책임자 및 3급 악마 직급
블랙(을) / 직책 : 불행 운명 용
1. 정의 : '을'은 앞으로 5년간 큰 불행 없이 살게 되며 이 계약서는 천계에 의한 법적 효력(전지전능적 효력)을 지닌다.
단, 본인의 의지로 인해 주체적으로 발생한 불행(예 : 대놓고 죽으려고 작정한 행위, 남에게 위해를 가해 그 일이 보복되어 돌아오는 일 등)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2. 임금 : '을'의 불행 제거 자체가 100% 수당이다.
단, '을'이 계약을 불이행하고 목숨을 끊을 경우 사후 임금만큼의 패널티가 '을'에게 돌아감.
3. 권한 : '갑'은 '을'에게 다음과 같은 권한이 있다.
-계약서의 효력이 발생한 뒤부터 4급 악마 수준의 능력을 승인 절차 없이 사용 가능(단, 본 직급인 3급에 해당하는 능력을 승인 절차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경우 사유서 작성 또는 법적 처벌을 받음)
-'을'이 계약을 불이행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본인의 의지로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 '갑'은 그것을 제지할 수 있다.(단, 연이은 제지가 통하지 않아 '갑'이 포기할 경우 임금에서 했던 설명대로 '을'에게 패널티가 돌아가며 이에 대해 '갑'은 책임 없음)
-'을'에 의해 '갑'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해를 입었을 경우, 신의 대리자에게 소송 가능
4. 계약 기간 : 계약서에 사인한 날로부터 5년(특별조항에 대해 문의하고 싶은 경우, '갑'에게 문의하시오)
5. 계약 해지 : 위에서 행한 모든 의무를 '을'이 불이행하거나 '갑'이 심각할 정도로 근무 태만을 할 시 해지가능, 그 외 신의 의지가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경우 승인에 한해 해지 가능
6. 계약 발생 사유 : 용 블랙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유타칸의 균형에도 큰 문제가 생김
7. 계약서 합법 생성 과정 절차 : 신 '하람'과 신의 대리자 및 관련 부서 담당 악마 '데빌'이 참여한 회의를 통해 법적으로 승인 되었음, 이의 발생 조건 없음
8. 계약에 따른 '갑'의 요청 사항 : '갑'의 출퇴근 시간 보장(오전 10시~오후 7시)
9. 필수 계약 조건 : 계약 기간 동안 '갑'은 별다른 일이 없을 경우, 항상 '을'과 함께 한다.
본 계약서에 명시되지 아니한 사항은 법의 해석에 따르거나 또는 1차적으로 '갑'에게 문의한다.
20xx년 x월 x일
갑 악마 : (인)
을 용 :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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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 "대체 왜죠"
데빌 : "어떤 점이?"
블랙 : "일단 꼴랑 5년인 점! 그리고 자_하는 게 곤란하다면 평생 불행하지 않게 해줘도 되잖아요! 그리고 당신이랑 붙어있는 조건이 왜 필수인데요?"
데빌 : "5년도 많이 쳐준거야. 그리고 좀 전에도 말했듯이 밸런스라는 게 있어서.. 평생 널 불행하지 않게 만드는 건 무리야. 절차 과정이 몹시 까다로워. 몇 백년간 재판을 하고 승인서류를 내밀어도 안 될 문제야. 나와 5년 내내 붙어있어야 하는 이유? 그건 내가 너의 불행을 조금씩 덜어서 남들에게 뿌릴 수 있기 때문이야"
블랙 : "그럼 똑같은 거 아니에요? 남들이 불행해지는 거면... 지금까지랑 똑같잖아요"
데빌 : "그리 심각하지 않은 수준으로 불운을 겪는 거라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네 바로 주변 용들도 오히려 이전 보다는 덜 불행할거야. 이건 확실해. 그렇게 되면 네 용생도 5년 간 여러 의미로 순탄할거고"
블랙 : "그래도 싫어요. 똑같은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데빌 : "음.. 그런 말을 하는 용들이 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특별조항이 생겼지"
블랙이 계약서를 다시 쳐다봤다.
밑줄 쳐진 부분을 말하는 걸까.
블랙은 미간을 찌푸리며 계약서를 다시 읽어내려갔다.
데빌 : "특별조항, 들어보겠어?"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빌 : "계약 기간이 5년에서 1년으로 줄어드는 대신 주변 용들은 전혀 불행해지지 않아"
블랙 : "대가가 뭔데요?"
데빌 : "대가? 뭔 소리야, 너의 행복할 수 있는 기간이 4년이나 삭감된 게 대가지"
데빌이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도 그 정도로 사악한 놈들은 아니야, 라고 말하자 블랙이 손을 들었다.
블랙 : "그럼 그 불행은 어디로 가요?"
데빌 : "그런 것 까지는 네가 알 필요 없어. 어떻게 할래?"
데빌은 몇 백년간 악마로 살아오면서 이 질문을 수도 없이 했다.
대부분의 용들은 5년을 골랐다.
그렇지만 고민을 끝낸 블랙은 손가락 한 개를 폈다.
5년이나 당신과 붙어있을 자신 없어요, 라며 툴툴대는 블랙은 웃고 있었다.
데빌은 태어났을 때부터 형성되어 있었을 블랙의 강인함과 다정한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렇지만 안쓰럽다 해도 자신이 뭐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용들도 몇 백 년에 두어 번은 봤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1년을 고르는 게 매우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데빌은 재킷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서 볼팬을 꺼내 내밀었다.
블랙 : "저기, 그런데요"
블랙은 사인하려다 말고 데빌을 올려다봤다.
데빌 :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블랙 : "아니요. 저기, 당신 진짜 악마 맞아요? 이거 꿈 아니고 진짠가요?"
데빌은 기가 차 웃었다.
하하, 거리며 웃는 소리가 공허했다.
데빌 : "뭐라도 보여줘야 해?"
블랙 : "뭐 보여줄 수 있는데요?"
블랙이 눈을 반짝였다.
블랙 : "파이어볼? 초능력? 뭐 그런 거 보여주실 수 있어요?"
데빌 : "난 오늘 계약서만 쓰러 온 거라 파이어볼 정도의 능력을 쓰려면 결제 서류를 받아야 해. 계약서 다시 읽어봐, 서명도 받고 승인도 받아야 능력을 쓸 수 있다고"
블랙 : "고작 그런 것도 승인이 있어야 된다고요? 뭐, 회사예요?"
데빌 : "실제로 회사야. 음... 승인 절차 없이 지금 가능한 건... 너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이 정도야"
데빌이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소리를 내었다.
블랙의 손에서 볼펜이 스르르 떨어졌다.
볼펜의 침이 블랙의 허벅지를 정확하게 찌르고는 바닥을 굴렀다.
데빌이 떨어진 펜을 줍는 동안 블랙은 소리를 지르며 엄살을 피웠다.
블랙 : "이게 뭐예요. 이게 초능력? 아니, 우연 아냐 이거?"
데빌 : "못 믿겠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봐. 바로 자빠지게 해줄게"
블랙 : "아, 됐어요! 믿어요 믿어!"
블랙이 허벅지에 묻은 볼펜 자국을 지우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묻혔다.
데빌은 가만히 블랙을 내려다봤다.
블랙이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 서류를 내밀다 말고 데빌을 불렀다.
블랙 : "저기, 그런데 남 괴롭히는 능력이면 전부 승인 없어도 되는 거예요? 뭐 이런 볼펜 찌르기 같은 거?"
데빌 : "아니, 그건 아냐. 남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대체로 승인 받아야 해"
블랙 : "그럼 방금 건 뭐예요?"
데빌 : "널 불행하게 하는 일은 승인 받지 않아도 되거든"
데빌이 블랙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평소에 켈켈 거리며 웃는 악마들만 상상해왔던 블랙에게 그 미소는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악마가 아니니 게 아닐까 하는 찰나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데빌은 진짜 악마인걸까.
블랙이 왜냐고 물으며 손을 뻗자 데빌이 그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데빌이 날개를 접더니 블랙의 눈 앞에서 박수를 한 번 쳤다.
데빌은 사라지기 전, 블랙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데빌 : "네가 불행한 건 이 세상에 너무 당연한 일이거든"
블랙은 그 목소리가 어쩐지 자상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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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은 몇 백 년에 걸쳐 한 부서만을 담당해 왔다.
전지전능한 신 하람조차 데빌에게 박수를 치며 이 일을 너보다 잘하는 악마가 없다는 말을 했었다.
데빌은 별다른 능력을 쓰지 않고도 담당한 용들이 자_하는 것을 잘 막아왔다.
말빨 하나면 다 되었다.
데빌은 악마 답게, 혹은 데빌답게 내기도 잘 했다.
내기도 하고, 말빨로도 이기고, 그러면서 세상의 균형을 아주 잘 유지해왔다.
불행의 총량을 무리할 만큼 흡수하면 간혹 강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데빌은 그것 또한 전혀 탐내지 않았다.
그저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했고, 새로운 계약이 생기면 계약서를 들고 가 서명을 받았고, 본인에게 배정된 다른 악마들이 일을 잘 하는지 감시했다.
모든 일에 있어 꼼꼼했기에 데빌이 담당한 부서는 항상 실적 1위였다.
블랙은 데빌이 담당해야 할 용 중 한 마리였다.
그렇지만 계약을 해야 할 요주의 용은 아니었던 게 블랙은 죽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었으며 그동안 어떤 불행이 있어도 잘 버텨왔다.
그래서 데빌은 목록에 있는 모두에게 그러하듯 예의주시를 하긴 했지만 남들보다는 신경을 덜 썼다.
그러던 블랙이 일주일이 넘게 죽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하들에 의해 전달되었고, 데빌은 늦기 전 하람에게 이 일을 알렸다.
회의가 끝난 뒤, 하람은 허리를 숙이며 나가려는 데빌의 이름을 불렀다.
데빌 : "무슨 일이시죠? 저 블랙 죽기 전에 계약서 작성해야 돼서 바쁜데요"
하람 : "데빌아, 실적에 반비례하는 너의 용성은 여전하구나"
데빌 : "저 없었으면 세상에 자만심이 넘치고, 사방에 각종 자연 재해와 천재지변이 넘쳐흘렀을 텐데..."
하람 : "됐다 됐어. 다름이 아니라 네가 그 동안 일도 잘 하고 같은 곳에서 오래 일하기도 했으니까... 이번 계약 성공하면 대폭 삭감해주려고 한다"
데빌 : "뭘요?"
하람 : "네가 악마로 남아있어야 하는 기간 말이야"
하람은 그렇게 말하며 웃더니 데빌의 앞에서 문을 닫았다.
닫힌 문 앞에 선 채로 데빌은 이번 계약을 꼭 성공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긍정적으로 강한 성격이 유독 도드라진 블랙이니 그리 어려운 계약이 아니었다.
부서로 돌아가 계약서를 작성하려는데,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다른 일을 맡고 있던 파틴(블랙 퀸)이 '모범수 오빠'라고 부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데빌 : "바쁘니까 저리 가라, 파틴. 넌 일 안하냐?"
파틴 : "왜 그렇게 까칠해요. 아, 얘가 블랙이야?"
파틴이 데빌 앞에 놓여있는 파일 철을 집어 들더니 블랙의 이력서를 빠르게 읽어 나갔다.
파틴 : "대박 불행"
데빌 : "여기 있는 용들이 다 그렇지 뭐"
파틴 : "열심히 해봐. 별로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데. 오빠 완전 땡잡았네"
맞아, 안전 땡잡았지.
신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제안을 해주나 싶다가도 데빌 입장에서는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답을 받는 것이기도 했다.
신은 가끔씩 '악마 놈들이나 천사 놈들이나 말을 안 듣는다' 라는 말을 했는데, 데빌은 그 때마다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악마와 천사들은 정해진 기간을 보내고 나면 신의 바로 옆에서 일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된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꿀 빨면서 일할 수 있다는 거다.
매일 서류 지옥과 업무 지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말이 신 옆에서 일하는 거지 그냥 신이 허락하는 대로 놀면서 지낼 수 있다는 뜻이다.
죽어서까지 일하는 게 좋을 리가 없지.
신 옆에서 일하는 건 누구나 탐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해진 기간이라는 게 몇 년도 아니고 몇 백 년도 아니고 몇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인데 그 기간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성실히 일하는 놈은 거의 없었다.
딴청을 피우다 신의 노여움을 사서 지옥불에 떨어지는 놈들도 만만찮게 있었다.
어제 인사했던 천사나 악마를 다음 날 유황 불구덩이에서 만나 악수하는 그런 경우.
데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데빌은 평생을 꿀 빨며 보내고 싶었다.
정말로.
죽어서도 일하라니, 돌은 거 아냐?
신을 노려보다가도 지옥 불구덩이 풀코스 한 번 돌고나면 신을 섬기게 되었다.
삭감도 아니고 대폭 삭감이라니, 신은 한 번 말한 것을 어긴 적이 거의 없었다.
데빌은 블랙의 서명을 받아 사무실로 돌아온 뒤, 두 다리 쭉 뻗고 기지개를 폈다.
블랙은 엉뚱한 질문을 해대기는 했지만 대답도 잘 했고 착하며 남을 위할 줄 아는 성격이었다.
아주 짧은 첫 만남이었지만 확실히 그래 보였다.
남들을 위해서라는 말만 적당히 해주면 죽지 않고 1년 잘 보낼 것이다.
더군다나 5년도 아니고 1년만 있으면 된다니,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계약 기간이 확 줄어든 것까지 너무 기뻤다.
데빌은 계약서를 파일철에 잘 꽂아 넣은 뒤, 컴퓨터로 블랙의 용생 이력이 있는 파일을 켰다.
담당하고 있는 모든 용들의 이력을 외우고 있는 데빌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하기로 했다.
그런데 블랙이 파이어볼 이런 헛소리를 해대는 걸 보니 미리 침묵 주문이라고 승인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과 같은 생각을 하며 파일을 훑어 내림과 동시에 주문과 능력에 대한 서류를 몇 개 작성해 신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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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은 자신이 담당한 용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이력을 볼 때마다 잘도 살아있네, 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블랙의 주변 용들은 전부 블랙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거나 블랙으로 인해 사고 및 질병을 앓고는 했다.
블랙 주변에 남은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블랙을 가엾게 여기는 용이거나, 블랙과는 1년에 몇 번 꼴로만 만나는 용들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저주 받았다며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지만, 남을 괴롭히는 에너지와 불행의 에너지는 상성이 좋지 않아서 정작 괴롭힌 아이들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가기 일쑤였다.
그 이후로는 괴롭힘조차 당하지 않았다.
블랙은 지금 대학교 2학년이 되기까지 그 나이 내내 무관심과 눈치 사이에서 자라왔다.
용들은 불행을 몰고 오는 블랙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거나 혹은 네가 알아서 피해 다니라는 식으로 눈치를 주었다.
블랙의 중학교 시절 장래희망은 행운아였고,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은 평범한 용이었다.
블랙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진로 희망란에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직업들을 적어 내려갔다.
장래희망은 이제 평범한 용조차 아니었다.
블랙은 그냥 본인이 블랙이 아니기를 바랐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기도는 너무 간절해서 가끔 신에게 가닿았다.
신에게 닿을 정도의 간절함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블랙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살았다.
어떤 용이 다가와도 잘 웃어주고 친절히 대해주려 애썼다.
그런 블랙이 가끔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하는 기도에 그 정도의 간절함이 있었다.
신도 그걸 알았다.
그 날 신은 기분이 좋았는지 아니면 그 무수한 간절함들 중 블랙의 기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데빌을 불러 약간의 자비를 내려주라 명했다.
신은 약간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데빌이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블랙은 그 날, 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라면 진즉 도망갔을 고양이가 블랙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블랙은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털을 느끼며 몇 분간 그 자리를 지켰다.
블랙은 용기를 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몇 번 내더니 담장 너머로 뛰어올라 사라졌다.
그건 블랙의 인생에 있어 몇 안되는 행복의 순간이었다.
고작 그런 정도의 행복과 자비였다.
그 자비를 선물받은 블랙은 대학교 2년 생활 동안 그 고양이를 떠올리며 힘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고작 2년분을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자비였다.
데빌이 명령 받아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런 블랙에게 1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하지만 시간은 물처럼 빠르게 흐를 것이고, 설탕처럼 달콤할 것이다.
그 뒤는 내가 알게 뭐람.
만약 계약이 끝난 뒤 블랙이 죽는다 해도 데빌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 즈음에는 데빌도 이 일을 때려 치고 꿀이나 빨고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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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있었을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