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 : "야, 일어나"
아침 8시, 블랙은 눈을 떴다.
데빌이 침대에 누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데빌을 알아보지 못한 데빌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머쓱한 표정을 짓는 블랙 앞에 선 데빌은 태연했다.
데빌 : "뭘 놀라고 그래"
블랙 : "아니, 어제랑 차림새가 달라서"
데빌 : "그런가"
데빌은 핫팬츠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노란색 비니가 씌워져 있엇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대학생 같았다.
어재의 모습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블랙은 눈을 비볐다.
블랙 : "출퇴근 시간 10시 아니었어요? 어제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데빌 : "오늘은 첫날이라 일찍 출근해야 해"
블랙 : "거기도 일 하기 참 빡세네요"
데빌 : "그렇지? 아무튼 일어나"
블랙 : "왜요"
한참 꿀잠 자다 깨어난 블랙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하품을 했고,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아 일어날 생각이 없음을 어필했다.
데빌은 블랙을 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데빌 : "내가 친히 너 수업 가라고 깨워준 거데 뭐 고맙단 말도 없네?"
블랙은 그제야 머리맡에 놔둔 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원을 켰다.
알람 소리가 싫었는지 배터리가 다한 건지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전원을 키자 오전 8시라는 걸 알리는 숫자가 보였다.
블랙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수업은 오전 10시부터였다.
블랙 : "30분 더 자도 됐을 것 같은데"
데빌 : "그랬으면 뛰어가다 또 넘어졌을 걸. 됐고 빨리 움직여"
블랙 : "네, 알겠습....이 아니고 잠시만"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 쪽으로 걷던 블랙이 몸을 휙 돌려 데빌을 쳐다봤다.
데빌이 인상을 찌푸리며 도끼눈을 했다.
그런 상태에서 '뭐?' 라고 말하는 모습이 무서워 역시 악마는 악마구나 싶었다.
그런 블랙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데빌은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한숨 쉴 일이 왜 이렇게 많아, 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데빌 : "악마같이 생겼단 말 많이 들어. 그래서 뭐?"
블랙 : "아니, 죄송..이 아니라... 설마 학교까지 따라오는 거예요? 누가 봐도 우리 과 사람 아닌 거 다들 알 텐데?"
데빌 : "아, 그래? 너 어짜피 친구 없으니 아무도 모르고 괜찮을 줄 알았는데"
블랙 : "저희 과 소문 빨리 퍼지거든요? 당신 같이 무서운 용이 갑자기 내 옆에 떡하니 앉아있으면! 어? 이상하잖아요!"
데빌 : "그냥 다른 과 구경하러 온 친구라고 해"
블랙 : "으음..."
데빌은 첫날부터 블랙의 생활을 최대한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루 종일 블랙 옆에 붙어있으면서도 별다른 해를 받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주변 용들이 '별 일 없이 무탈한'블랙과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그렇게 며칠 정도만 편한 대학생활 조성에 도움을 줄 예정이었다.
이 정도 예의는 몇 백 년에 걸쳐 해줬던 거고 당연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같이 학교에 가면 곤란하다니?
오히려 불행한 일 전혀 없이 옆에 착 붙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친구라도 하나 얻어 사귀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하면 1년짜리 남자친구도 사귀고 말이야.
데빌의 계획과는 달리 블랙은 좀 전부터 계속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데빌 : "너 좋게 좋게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블랙 : "네?"
데빌 : 아니야, 됐어. 일단 씻고 좀... 준비나 해"
데빌은 한숨 한 번 내쉬고는 비니를 벗었다.
데빌 : "벌써 10분 지났어"
블랙은 못 믿겠다는 눈으로 데빌을 쳐다봤다.
데빌의 손에 쥐어져있던 비니가 그대로 사라졌다.
마술쇼 같다며 블랙이 중얼거렸다.
데빌의 머리에서 양 쪽으로 기다란 뿔이 솟아났다.
(이 세계관의 용들은 천계 용들이 아닌 이상 뿔도 없습니다)
뒤이어 검은 날개가 점퍼를 찢으며 돋아났다.
그게 학교에 같이 안 가주겠다는 뜻처럼 보여 블랙은 안심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데빌은 이제 어쩔까 고민하며 찢어진 점퍼와 핫팬츠를 손으로 털어냈다.
옷이 늘 입는 슈트 차림으로 바뀌었다.
씻고 나온 블랙이 머리를 말리고 전공서적을 챙기는 동안 데빌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작은 원룸이다 보니 정신 사납게 방 하나를 왔다 갔다 하는 걸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블랙이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9시였다.
30분 정도 걸으면 학교가 나오니 딱 맞았다.
역시 30분 더 자도 됐던 거 아냐? 블랙은 그렇게 생각하며 데빌을 쳐다봤다.
침대에 앉아 턱을 괸 채, 멍 때리던 데빌이 블랙을 쳐다봤다.
블랙 : "설마 그러고 따라오는 거예요?"
데빌 : "남들 눈에 안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블랙 : "아니, 제 눈에만 그런 꼴 보이면 오히려 신경 쓰일 것 같은데요. 수업에 어떻게 집중하라는 거예요"
데빌 : "너 정말 까다롭다"
데빌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간에 생긴 주름을 쳐다보던 블랙이 신발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잔뜩 구겨져 대가 탄 운동화를 보며 데빌은 저것마저 불행의 상징으로 보인다 생각했다.
확실히 중학교 시절, 새로 산 하얀색 운동화를 진흙탕 물에 빠트린 적이 있다고 했지.
데빌은 블랙의 인생 이력을 떠올렸다.
블랙 : "다녀올게요"
데빌 : "뭘 다녀와, 같이 가야 한다니까"
블랙 : "아니, 왜요!"
데빌 : "너 계약서를 눈으로 읽은 거 맞아?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니까"
블랙이 그제야 으엑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데빌을 올려다봤다.
운동화를 다 신고 자리에서 일어난 블랙으로 인해 데빌은 내려다보던 걸 올려다보게 되었다.
키는 또 더럽게 크네.
사실상 별로 크지도 않은 블랙을 보며 데빌은 생각했다.
블랙 : "잠깐 수업 듣고 오는 것도?"
데빌 : "계약한 의미가 없잖아. 애초에 근무 첫날부터 그런 말 하는 네가 더 웃겨 나는"
블랙은 일단 늦지 않기 위해 집을 벗어났다.
그 뒤를 데빌이 따라왔다.
데빌에게 있어 벽을 통과하거나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데빌은 그저 블랙의 뒤에서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블랙은 계단을 내려가고 학교까지 걸어가는 동안 용들이 데빌 쪽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채다.
정말 블랙의 눈에만 보이는 거였다.
블랙은 뒤따라오는 데빌을 힐끔 쳐다봤다.
큼지막하게 솟은 뿔과 날개(날개는 본인도 있지만), 풀 세트로 차려입은 정장, 시종일관 화가 난 것 같은 무표정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학교 입구에 도착했을 즈음, 데빌은 용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서며 블랙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블랙 : "아, 왜요"
데빌 :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는 말고. 너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
블랙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들 눈에 블랙은 지금 골목길에서 혼자 걷는 걸로 보일 테니까.
블랙은 기침 몇 번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데빌이 보이지 않는 척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데빌 : "그래도 나랑 같이 다녀야 하는 필요성을 이 등교하는 30분간 좀 느끼지 않았어?"
블랙 : "네? 뭔 놈의 중요성이요. 뒤에서 온통 시꺼먼 악마가 따라오는데? 꿰뚫리면 죽을 것 같은 뿔 달고서..."
데빌 : "정말? 너무하네"
데빌이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라고는 해도 나중에 나이 들면 저기에만 주름지지 않을까.
블랙은 그런 생각을 하며 두껍게 주름진 미간을 쳐다보다 다시 주변 풍경을 쳐다봤다.
주변 풍경?
문득 블랙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쩐지 등교하는 내내 아무 일도 없었다.
그동안 뒤에서 따라오는 데빌을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블랙은 오늘 너무나도 평범한 등교를 했다.
넘어지는 일이나 길 가던 용과 부딪히는 일도 없었고, 집에서 나오고 나서야 챙겨야 할 것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거나 불량배를 골목에서 마주쳐 놀라게 되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이 골목길도 원래는 사나운 고양이나 담배 피는 용들이 많아 피해 다니던 길이었는데, 왜 오늘은 아무 것도 없지.
블랙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데빌을 쳐다봤다.
블랙 : "잠깐, 이거 진짜로?"
데빌 : "진짜로 할 거면 그런 종이 쪼가리에 도장이랑 승인 받아오지도 않았어"
블랙 : "이렇게 1년을 보낼 수 있다고요?"
데빌 : "앞으로 더 한 1년도 보낼 수 있어. 뭐, 네가 고를 선택 때문에 5년 대신 1년이 된 거지만. 5년 골랐으면 지금쯤 네 옆에 걷던 용, 돌부리 걸려 자빠지는 것 보고 나도 좀 웃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쉽네"
블랙 : "와, 악마"
데빌 : "맞아"
조금 더 걷다 보니 강의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블랙은 건물 입구 구석에 숨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데빌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업 내내 옆이나 뒤에서 이런 수상한 용이 서있을 거 생각하면 집중이 전혀 안 될 것 같은데.
블랙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 듣는 두 시간만 어디 다른 곳에 가 있으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런데 계약서를 썼으니 안 되지. 옆에 앉으라고 해? 아니, 그런데 그건 또 좀.
머리 싸매고 있는 블랙을 보며 데빌이 피식 웃었다.
데빌 : "뱀이랑 쥐, 그리고 고양이 중에 골라봐"
블랙 : "쥐는 좀... 아니, 근데 이거 왜 고르는데요. 뭐, 심리테스트예요?"
데빌 : "쉿, 쉿. 조용. 용 지나다니잖아"
데빌이 블랙의 앞을 가리고 섰다.
남들 눈에는 블랙 혼자 구석에 서서 멍 때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금 블랙의 앞에는 눈에 띄는 새까만 용이 정승처럼 딱 버티고 서 있는 꼴이 되었다.
키 작은 정승.
블랙은 속으로 데빌을 비웃은 뒤, 제멋대로 굴러가는 자신의 인생을 탓했다.
아무리 키 작은 정승이라 해도 평범한 용이 아닌데다가 우악스런 뿔과 날개가 돋아있는 모습은 무서웠다.
그리고 저 놈의 웃지도 않는 무표정.
뭔 말을 해도 피식 비웃거나 죄다 무표정이었다.
악마들은 표정 훈련도 받나.
그런 생각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데빌은 수업 시작하기 전에 빨리 고르라며 멍 때리는 블랙을 닦달했다.
그렇다. 이게 다 블랙 팔자였다.
블랙 : "고양이"
사실 데빌은 블랙이 고양이를 고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블랙은 신에게 가장 작은 배려를 받은 날부터 2년 넘게 그 고양이를 떠올렸는 걸.
블랙은 가끔씩 예전의 그 고양이는 뭐였을까, 생각했다.
다른 길고양이에게 그 때처럼 손을 뻗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는 건 할큄이나 하악질이었다.
온통 검은색 털에 갈색 양말을 신고 있던 고양이.
잘 알고 있지, 그 날이 아주 잘 기억나지.
데빌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데빌 : "가방 열어"
블랙 : "네?"
블랙이 데빌의 눈치를 보며 백팩을 열자 데빌이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데빌의 몸이 스르르 작아지더니 백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블랙이 들여다보려 하자 그 안에서 검은 털의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비명을 지르려는 블랙의 입을 고양이가 앞발로 막았다.
블랙 : "글슥응믈!"
고양이(데빌) : "뭐?"
고양이가 앞발을 떼어내자 블랙이 그 앞발을 움켜쥐었다.
고양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양이도 미간을 찌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블랙 : "갈색 양말!"
고양이(데빌) : "수업 늦는다"
블랙 : "고양이가 말을 해..."
고양이(데빌) : "남들한테는 냥냥 거리는 걸로 대충 들리니까, 헛소리 하지 말고 수업 좀 가라고. 나 잔다. 말 걸지 마"
고양이가 된 데빌이 백팩 안에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블랙은 강의실 쪽으로 걸어가며 백팩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블랙 : "예전의 그 고양이, 설마 당신이었어?"
데빌이 블랙의 코에 냥냥펀치를 날렸다.
블랙이 윽 소리를 냈다.
데빌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진짜로 잘거니 말 걸지 말라는 것 같았다.
블랙은 별 수 없이 백팩의 지퍼를 닫고는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대 그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고양이가, 그 상냥하고 보드라웠던 고양이가, 이 시종일관 무표정밖에 못하는 악마놈이라고?
블랙은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심지어 지금 고양이가 된 데빌은 고양이인데도 무표정이었다.
기분 안 좋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그 때 그 고양이는 얼굴도 부비고 웃어줬는데.
용 모습인 채로 얼굴 부비고 웃는 데빌을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얼굴 부비다 그 뿔에 찔려 골로 가는 상상만 들었다.
데빌이 대답이 없는 걸 보면 그 고양이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무슨 고양이 말하는 거냐고 되묻지 않았던 걸 보면 정황상 데빌은 그 때의 고양이가 확실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다시 만나고 싶기는 했지만 이런 건 아니었는데.
블랙은 한숨을 내쉬며 백팩을 다시 열고 조심스레 필통과 전공 서적을 꺼냈다.
데빌은 정말로 잠을 자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만 냈다.
자는 얼굴은 귀여워서 기억 속 고양이와 조금 비슷해 보였다.
기쁘면서도 실망스럽다고 해야 하나.
블랙은 머리를 쥐어 싸맨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블랙의 옆에는 늘 그랬듯 아무도 앉지 않았다.
2시간 짜리 수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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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편엔 분량을 너무 많이 잡은 것 같아서 이번엔 좀 짧게 분량 조절 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 있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