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뒤 시간짜리 수업이었지만 함께 수업을 듣는 블랙의 동기들은 변화를 느꼈다.
수업 내내 블렉에게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블랙이 어려운 질문에 당첨되는 일도 없었고, 그 날따라 넘어 지는 일도 없었으며, 별 수 없이 블랙 옆에 앉게 된 학생에게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 날따라 과제도 부지런히 해온 블랙은 그 학생에게 자신의 과제물을 나눠주고 노트를 보여주었는데, 학생이 고맙다며 블랙에게 초코바까지 주었던 것이다.
블랙에게만 칭찬이 없던 교수는 그 날따라 블랙의 저번 주 과제물이 좋았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 작지만 큰 변화는 학생들에게 아주 잘 각인되었다.
블랙은 수업 내내 실실거리며 평범한 삶 수준이 아니라 행운아 수준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했다.
블랙을 매번 피하던 동기들은 그 날따라 말을 걸었다.
언제 같이 점심이나 먹자, 시간 표가 어떻게 되느냐, 과제 어떻게 했는지 알려줄 수 있냐, 같은 말들.
원래 성격이 음침한 편이 아닌 블랙은 그 질문들에 쾌활하게 답하며 얘기를 이끌어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네가 이렇게 인싸적인 성격인 줄 몰랐다며 다음 수업 때 같이 밥 먹자고 어깨까지 두드려줬다.
블랙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손을 흔들어주는 동기들을 뒤로 하고 건물을 나서는데 가방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쯤 되니 무섭기만 했던 데빌이 복덩이처럼 느껴졌다.
물론 실제로 얼굴 보면 좀 다르겠지만.
블랙은 사람 없는 곳으로 뛰어가 백팩을 앞으로 메고는 지퍼를 열었다.
데빌이 몸을 쓱 내밀더니 밖을 둘러봤다.
고양이(데빌) : 수업 끝나자마자 열어줄 줄 알았는데 신나서 막 뛰어가더라. 가방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느라 네 휴대폰 충전기에 토할 뻔 했어"
블랙 : "아니, 더러운 소리 좀 하지 마요. 방금 전까지 이미지 좋아지려던 참이었는데..."
고양이(데빌) : "뭐? 내 이미지? 그렇게 내빠?"
블랙 : "당신 얼굴 아침마다 거울로 보면 와 이게 진짜 악마구나 싶을걸요"
고양이(데빌) : "맞는 말이네"
블랙 : "아, 진짜..."
짜증난다고 외치려던 블랙은 용 몇 마리가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자, 아무 말도 안한 척 헛기침을 했다.
지나가던 용들은 바로 관심 끄고는 지나쳐갔다.
블랙 : "저기, 저 궁금한 거 있는데요"
고양이(데빌) : "집 가서 물어보지 그래. 굳이 고양이한테 존댓말로 말 거는 이상한 용으로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블랙 : "아이고, 아이고, 알겠습니다. 네네"
블랙은 말 없이 가방 지퍼를 닫으려 했다.
데빌이 지퍼를 닫으려는 손을 앞발로 밀어냈다.
블랙은 보드라운 털과 상반되는 찌푸린 콧잔등을 보며 다시 지퍼를 열었다.
데빌이 가방 밖으로 점프했다.
그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블랙은 이번에도 넋 놓고 입을 벌렸다.
데빌은 입에 파리 들어간다고 하려다가 스스로가 너무 노인처럼 말한다 싶었다.
데빌은 블랙을 쳐다보며 고갯짓으로 길을 가리켰다.
데빌 : "뭐해, 집에 가지 않고. 뭐 할 일 있어 오늘?"
블랙 : "아뇨, 일정 없는데... 그냥... 저 진짜 아침부터 궁금했는데..."
데빌 : "말해봐"
블랙 : "혹시 날아가면 안 되나요?"
데빌 : "미_친놈"
블랙 : "불가능?"
데빌 : "아니, 그게 아니라. 너 고소공포증 있잖아. 애초에 걸어서 30분 거리를 굳이 날아서 가자고? 가성비 봐라 아주"
블랙 : "아니, 그냥 가능한지 아닌지만 궁금했던 건데! 거, 되게 뭐라 하시네!"
블랙은 혼자 찔려가지고는 괜히 큰소리로 말했다.
용들이 쳐다볼까 싶어 귀에 휴대폰 대고 통화하는 척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데빌 : "너 오늘 내가 첫 출근부터 서비스 몇 개를 해주는지 모르겠다. 남은 1년간 다시는 서비스 해주나 봐라, 진짜. 이 망할..."
블랙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데빌이 블랙을 번쩍 들어올렸다.
힘 좋다고 하려는데 데빌은 미동도 없는 걸로 보아 힘으로 들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긴, 딱 봐도 말랐는데, 진짜 순수한 힘으로 자기보다 덩치 큰 용을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데빌이 날개를 피더니 날아올랐다.
블랙이 정신을 차렸을 때, 데빌은 이미 그 빠른 찰나 동안 엄청난 높이까지 날아올라 있었다.
사대신룡들이 아닌 이상 허공에 떠있는 블랙을 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이였다.
블랙은 고소공포증 탓에 '그냥 걸어갈 걸, 내가 왜 이걸 하자 한거지' 라고 후회하며 데빌의 품에 더 꼭 안겨 있었다.
블랙 : "더, 더 낮게 날면 안 되나요?"
데빌 : "그럼 허공에서 멀쩡히 날개 있는 용들이 이상하게 서로 부둥켜안고 날아가는 게 보일 텐데? 다른 용들이 어떻게 보겠냐?"
블랙은 눈을 떠 밑을 내려다봤다.
데빌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무서웠다.
떨어지면 팔다리 전부 날아가겠구나 싶었다.
무서워... 라고 중얼거리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블랙의 얼굴을 데빌이 감쌌다.
블랙의 얼굴이 데빌의 품 안에 폭 파묻히게 되었다.
데빌은 현실세계엔 존재치 않는 용잉라 그런지 아무 냄새도 안났다.
향기도 안 났고 그냥 냄새라는 게 없는 용인 것 같았다.
블랙은 무섭지 않게 자신의 얼굴을 꼭 감싸 안은 데빌을 힐끔 올려다봤다.
데빌은 눈에 안 띄게 착지할 곳을 몰색하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럴 때 착하게 해주는 거 보면 조금은 그 날의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하네.
블랙은 피식 웃었다.
데빌은 그걸 신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다음부터는 집까지 꼭 걸어서 가라고 했다.
두 용은 순식간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데빌 : "자, 그래서 뭔데"
블랙이 집에 도착해 백팩을 침대에 던지자 데빌이 그 옆에 앉았다.
블랙 : "뭐가요?"
데빌 : "궁금한 거 있다며"
블랙 : "아, 다름이 아니라 불행만 없앴는데 이렇게 행운도 굴러 들어오는 건가요? 난 뭐 그냥 사고 좀 안 당하고 이상한 용 안 만나고 그 정도인 줄 알았는데. 오늘 교수가 제 과제 칭찬해줬다니까요?!"
데빌 : "과제는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이었는데 불행에 가려져서 여태 못 받은 거야. 그건 행운이 아니고 당연히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지. ...서비스라고 해둘게"
블랙 : "서비스?"
데빌 : "내가 아까 말했잖아"
'너 오늘 내가 첫 출근부터 서비스 몇 개를 해주는지 모르겠다'
블랙은 데빌이 좀 전에 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데빌은 여전히 도끼눈을 하고서는 블랙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난 건 아니고 그냥 원래 올려다보면 눈이 저렇게 되는 것 같았다.
블랙 : "그럼 저도 서비스 해줄게요"
데빌 : "뭐?"
블랙 : "이제 불타거나 엎을 일도 없을 테니 요리 해줄게요. 저녁 먹고 가요"
데빌 : "불타거나 엎은 게 불행 때문이 아니라 네 실력 때문일 수도 있어"
블랙 : "해보면 알겠죠!"
데빌 : "그리고 요리 필요 없는데 안 먹어도 되고 난.."
블랙 : "어차피 퇴근 시간까지 할 일도 없잖아요"
데빌 : "악마한테 요리 대접해준다는 놈은 몇 백 년 걸쳐 네가 처음이다"
블랙 : "정말요?"
칭찬이라고 생각했는지 블랙이 헤헤 거리며 웃었다.
데빌 : "뭐, 계약상 내가 상관할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블랙은 베란다 쪽 작게 공간이 나있는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꺼내고 수납장에서 프라이팬을 꺼냈다.
부쩍 자신감이 생긴 블랙은 실수 없이 준비를 척척 해나갔다.
데빌은 오늘 과도한 서비스를 베풀고 너무 많은 주문을 쓴 탓에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 반쯤 기댄 채, 재료를 손질하고 볶는 블랙을 가만히 구경했다.
데빌 : "내일부터는 너 칭얼대는 거 절대 안 받아줄 거니까. 명심해..."
졸려서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대는 데빌을 보며 블랙은 베란다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블랙 : "좋아요, 내일부터 잘 부탁해요"
블랙이 웃었다.
데빌은 가방 안에서 한숨 잤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데빌은 잠들려는 걸 겨우 참으며 블랙이 든 칼이 손가락 쪽으로 슬슬 이동하는 것을 쳐다봤다.
부주의는 불행이랑 관계 없나 보네.
데빌이 손가락을 휘적거리자 칼이 블랙의 손가락 대신 야채를 썰었다.
블랙은 손을 휘적거리는 데빌이 요리를 재촉하는 것 처럼 보였는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외쳤다.
데빌 : "요리 다 되면 깨워"
블랙 : "또 자요? 이 사람 완전 일 안하고 땡땡이만 피우네"
데빌은 마지막 서비스까지 해준 뒤, 힘이 한계에 달해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또각또각 야채를 써는 소리와 기름에 음식이 볶아지는 소리 사이로 수면을 취하는 타용의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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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분량 조절 힘들어요.. :(
그래도 봐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베글도 가구...
앞으로 더 열심히 연재하겠습니다.
으쌰 으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