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은 눈을 떴다.
수업도 없고 어제 술까지 마셨음에도 눈이 절로 떠졌다.
시간은 낮 12시 정도였다.
배고파서 눈이 떠진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데빌이 보였다.
왜 깨워주지 않았나 하고 쳐다보니 여전히 자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자는 얼굴이 무섭지만 웃겼다.
블랙이 몸을 일으켰다.
인기척에도 데빌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빌 : "그만..."
블랙 : "네?"
데빌 : "그만..."
데빌은 악몽이라도 꾸는지 펴질 일 없는 미간을 하고 있었다.
악마도 악몽을 꾸나, 블랙은 그게 참 웃긴 일 같았다.
데빌의 어깨를 조심스레 두드렸다.
데빌이 어깨를 살짝 비틀어 손을 피했다.
일어났나 싶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데빌 : "이제 그만해, 또 시작이야"
뭔지는 몰라도 아주 끔찍한 꿈인 게 분명했다.
데빌은 땀까지 흘리며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어떤 말에도 지지 않고 투덜대던 데빌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기운조차 없이 힘들어 보였다.
야근하는 꿈 정도의 악몽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더 끔찍한 꿈.
블랙은 데빌의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안 깨우면 왜 안 깨웠냐고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블랙 : "일어나요"
데빌 : "안돼, 안돼.."
블랙은 데빌의 어깨를 아주 강하게 한 번 흔들었다.
데빌이 눈을 번쩍 떴다.
데빌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보고도 블랙은 놀라지 않았다.
이런 때일수록 상대방이 침착해줘야 한다는 것을 블랙은 잘 알고 있었다.
몇 년에 걸쳐 끔찍한 악몽을 꿔본 장본인이었으므로.
블랙 : "데빌씨, 저 블랙이에요. 일어나서 우리 같이 밥 먹어요"
데빌 : "아..."
블랙 : "밥 안 먹을 거예요? 나 오늘 완전 맛있는 거 먹을 건데"
데빌은 블랙에게 손을 뻗다 말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는지 손을 내렸다.
데빌 : "누가 그런 호칭으로 부르래"
블랙 : "어제 데빌씨가 그냥 데빌이야, 라고 했던 거 씨 까지 붙여줬는데 뭐 불만 있어요?"
데빌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낸 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데빌 : "맘대로 하던지"
블랙 : "그럼 저도 방금 일어난 거라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블랙은 데빌을 한 번 쳐다본 뒤, 화장실로 들어갔다.
데빌이 무슨 악몽을 꾸고 있었건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실제로 세수를 하고 나온 뒤에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뭔가 물어봤다면 그건 점심으로 짜장면 시켜먹을지 떡볶이 시켜먹을지 고민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 정도.
데빌은 한숨 한 번 내쉬고 아무거나 먹으라 했고, 블랙은 그런 데빌에게 실실 웃으며 저번에 떡볶이 잘 드시던데, 라고 했다.
블랙이 한 번 떡볶이를 해준 적이 있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던 기억.
블랙은 오늘만큼은 떡볶이 날이라며 휴대폰으로 떡볶이를 시켰다.
데빌은 어제만큼은 어른스러운 척 하는 어린아이 같았던 블랙이 오늘만큼은 무척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데빌은 블랙을 가만히 쳐다봤다.
약점 잡았다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인데, 블랙은 정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데빌의 눈치를 본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떡볶이 기다리면서 기타 튜닝 좀 하고 데빌에게 시답잖은 농담 좀 하고 휴대폰으로 웃긴 글 보여주고 그랬다.
데빌은 단답형의 대답만 하며 블랙을 쳐다봤다.
물론 어제의 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데빌과 블랙은 아무 일도 없었던 용들처럼 앉아 있었다.
블랙은 운 적 없고 데빌은 악몽 꾼 적 없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서로의 약한 모습에 대해 얘기하지 않기로 함구한 것처럼.
그렇지만 불행밖에 없는 블랙, 난 너의 모든 약한 모습을 문서로 봤는 걸.
데빌은 피식 웃었다.
블랙은 거기에 대고 또 실없는 농담을 했다.
떡볶이 기대되죠? 같은 말.
느릿느릿 떡볶이를 먹고 있는데 블랙이 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찍다 말고 입을 열었다.
블랙 : "의자에 앉아서 잠들면 몸이 쑤셔서라도 악몽 꿀 것 같긴 해요"
데빌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블랙의 표정을 살폈다.
떠보는 말투는 아니었다.
놀리는 말투도 아니었고.
설마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아니겠지.
허공에서 블랙과 데빌의 시선이 마주쳤다.
블랙 : "미안해요"
데빌 : "뭐가"
블랙 : "저 때문에 의자에 앉아서 자고"
데빌 : "내가 네 옆에 누워서 잘 순 없잖아. 애초에 노래 부르라고 하면서 의자에 앉은 건 나야.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다니, 너 자아가 아주 크다?"
블랙 : "걱정 돼서 말한 건데 너무하네, 진짜!"
데빌 : "응, 나도 알아"
블랙의 손이 멈췄다.
블랙이 들고 있던 튀김이 떡볶이 국물에 그대로 빠졌다.
데빌이 손가락으로 튀김을 가리키자 블랙이 비명을 질렀다.
젓가락으로 구출한 튀김이 앞 접시에 보기 좋게 올라갔다.
데빌 : "빨간 튀김 좋네"
블랙 : "뭐가 좋은데요"
데빌 : "지옥 가면 이렇게 된 용들 많이 볼 수 있어"
블랙 : "으"
블랙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데빌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 데빌을 보며 블랙은 따라서 좀 웃다가 이내 웃음을 멈추고는 가만히 접시를 내려다봤다.
블랙 : "데빌씨"
데빌 : "왜"
블랙 : "너무 평범해요"
데빌 : "응"
블랙 : "너무 평범해서 싫어요 이런 거. 행복해서 싫어요"
데빌 : "떡볶이 먹어, 식는다"
블랙 : "네..."
데빌 : "오늘 날씨가 좋네"
블랙 : "네"
데빌 : "나 딱 한 시간만 회사 갔다 올게. 서류 승인받고 올 테니까 옷 입고 기다려"
블랙 : "저희 어디 가요?"
데빌 : "아마도?"
블랙 : "왜요?"
데빌 : "받은 만큼 주려고"
블랙 : "네?"
데빌 : "빚 안 지고 사는 게 좋아서. 아무튼 옷 입고 기다려. 아, 신발은 샌들 신어. 시킨 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데빌이 사라졌다.
블랙은 설거지 하고 가라며 거실에서 혼자 소리쳤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데빌의 앞 접시만 깨끗하게 설거지되어 있었다.
그게 더 짜증나서 블랙은 한숨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남은 떡볶이를 치우고 옷장 문을 열었다.
샌들까지 미리 꺼내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기타연습이나 하기로 했다.
무슨 상황인진 알 수 없었지만 믿기로 했다.
같이 지낸 시간은 얼마 안 되었지만 데빌은 어쩐지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던 용이 블랙에게는 없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블랙은 잠자코 믿기로 했다.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기다리기로 했다.
블랙의 마음속에서 희미한 기대감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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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서 끝.
원래는 메모장에 인물로 생각하고 글 썼던 걸 용으로 바꿔서 풀어보자니 좀 힘드네요.
그래도 항상 추천도 눌러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는 독자분들 덕에 힘이 납니다.
아자아자!!
완결까진 아직 반도 못 갔지만 힘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