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은 밥 먹고 나서 설거지까지 마쳤다.
한 번쯤은 설거지 도와달라는 블랙의 말에 데빌이 손사래를 쳤다.
내가 너 도와주는 게 얼마나 많은데, 라는 서두가 시작 되자마자 블랙은 또 저런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블랙은 밥 먹고 컨디션이 괜찮아졌는지 기타 점검을 받으러 나가기로 했다.
데빌 또한 따라나설 준비를 했다.
집을 나서던 블랙이 문득 데빌의 머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 : "뿔이 더 자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데빌 : "자라는 건 맞지만 저번 주와 비교해서 1cm도 안 자란 것 같은데, 그게 선명히 보인다면 그건 확실히 기분 탓이겠지"
블랙 : "나이 먹는 만큼 자라는 거예요?"
데빌 : "그랬으면 이 뿔로 젓가락 만들어서 젓가락 장사해도 됐을걸"
블랙 : "하하!"
데빌 : "웃기니?"
블랙은 한참 웃다가 데빌의 뿔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뿔을 만지려다 멈췄다.
실례가 될 것 같았다.
데빌은 그런 블랙을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손은 빠르게 거두는 와중에 표정은 세상 슬픈 블랙이 웃겨서.
데빌이 머리를 블랙 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데빌 : "잠깐은 만져봐도 기분 안 나쁘니까"
블랙 : "만져 봐도 돼요?"
데빌 : "그런데 너무 세게 잡지는 마. 아프니까"
블랙은 뿔을 조심스레 툭 만진 다음, 바로 손을 뗐다.
굴곡이 져 까끌까끌하고 단단했다.
저렇게 딱딱한데 통각이 느껴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용의 뼈도 단단하니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밖으로 튀어나온 뼈라고 생각하니 조금 징그러우면서도 오싹한 기분이 되었다.
블랙 : "뭐 하면 자라는 거예요? 뼈처럼 우유 먹으면?"
데빌 : "허..."
블랙 : "어이없어요? 난 진지한데"
블랙이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린 다음, 다시 숨을 내쉬었다.
데빌은 그런 블랙을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해도 될 말들을 골라내는 동안 데빌의 몸이 슬쩍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자꾸 뭐든지 말하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큰일이네.
그래서 데빌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블랙도 바로 관심을 끄고는 길 가다 만난 문어빵 트럭에 관심을 가졌다.
방금 밥 먹었다는 말을 데빌이 세 번이나 말하고 나서야 거길 벗어날 수 있었다.
문어빵의 유혹에서 벗어난 뒤, 블랙은 악기점에 도착해 기타를 맡겼다.
15분 정도 기다리라는 말에 데빌은 악기점 안을 한 바퀴 돈 뒤, 입구로 돌아왔다.
블랙은 입구 근처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블랙 : "계약해서 한 용 옆에 계속 있는 거, 진짜 심심하겠다"
블랙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데빌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악기점 주인은 블랙이 혼자 악기를 구경한다고 생각했는지 별 다른 말 없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블랙의 말에 데빌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심심하기는 했다.
물론 블랙과는 달리 말을 잘 듣지 않거나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용들도 심심찮게 있었으므로 매번 심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것마저도 몇 백 년이 지나고 익숙해지니 심심하게 느껴졌다.
용들은 매번 새로우면서도 비슷했다.
용이 아무리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훨씬 심심해도 블랙처럼 별다른 사고 치지 않는 용들이 좋았다.
물론 그 때 내가 잠깐잠들었다고 술을 죽어라 부어 마시기는 했지만.
뭐, 그것도 내가 잠들어서 그런 거고 뭘 모르는 상태라 그런 거니까.
어제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지나가듯 '그 때 다그쳐서 미안' 이라고 말했는데, 블랙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데빌은 그런 반응이 오히려 고마웠다.
악기점 주인 : "학생, 기타 손질 끝났어. 여기 있어"
블랙 :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블랙과 데빌은 가게에서 나왔다.
이제 집으로 가냐고 데빌이 물으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블랙의 어깨를 두드렸다.
깜짝 놀란 블랙이 돌아보니 웬 여학생이 서있었다.
데빌은 누구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데빌에게도 묘하게 낯이 익었다.
블랙이 반갑게 인사하는 걸 보던 데빌은 그제야 여학생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 날 술자리에서 남자들과 블랙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용들 중 한 명이었다.
동기겠네.
잠깐 자리를 빠져줄까 생각하는데 여학생이 블랙에게 갑작스런 제안을 했다.
여학생 : "아, 우기야! 우리 오늘 00이랑 00이랑 동기들 몇 모여서 밥 먹고 술 한 잔 하기로 했는데. 너 만났으니 잘 됐다! 너도 와! 너한테도 연락할까 했는데, 우리가 그 때 너 번호를 안 받은 거 있지"
데빌은 번호도 안 받은 놈한테 연락을 왜 해, 같은 퉁명스런 생각을 하며 블랙을 쳐다봤다.
블랙은 먼저 제안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데빌은 난처함의 원인이 자신인가 싶어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블랙 : "어, 음, 오늘? 이렇게 갑자기?"
여학생 : "나도 갑자기라 좀 미안하기는 한데, 여기서 우연히 만나니까 너무 반가워서. 이것도 운명 아냐?"
블랙 : "음... 음.. 그런가"
블랙은 몇 초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블랙 : "미안한..."
거기까지 말하는 블랙과 실망감에 살짝 물들어가는 여학생의 표정을 보며 데빌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이 말을 멈추고 데빌이 있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여학생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빌이 블랙의 바로 옆에 슬쩍 다가가 귀에 대로 속삭였다.
데빌 : "나 오늘 조기 퇴근 할 테니까, 잘 놀고 와"
블랙이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여학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저 입을 벙긋거렸다.
데빌 : "별 일 없을 거야. 네 불행은 아침부터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거든"
데빌이 블랙의 머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톡톡하는 소리가 데빌의 손에서만 났다.
강아지 정수리마냥 푹신 했다.
데빌 : "너도 재밌게 놀아야지. 나 간다"
블랙의 눈 앞에서 데빌이 사라졌다.
블랙은 당황했지만 곧바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여학생을 바라봤다.
블랙 : "아니야, 생각해보니 일정이 없는 것 같아! 나도 갈게! 일정 있는 줄 알고 생각하고 있었어"
여학생 : "잘 됐다! 걱정하지 마, 그 때 봤던 남자 동기들 없으니까. 너한테 너무 치근덕대더라. 미안했는데 사과를 못했어"
블랙 : "아냐, 고마워.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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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 하이라이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분량 조절을 하다 보니 다음 편으로 미뤄졌습니다 ;(...
하이라이트가 나오는 화는
[DEVIL / H]~화
이렇게 표시해 둘게요.
엔딩 화는
[DEVIL / E]
외전 편은 있다면
[DEVIL / X]
로 표시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