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은 정말 돌아가려 했었다.
그런데 뭔가 찝찝했다.
몇 초 생각해보니 기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기가 이상했다.
블랙이 있는 곳이 특히 그랬다.
데빌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나도 안 맞아.
그런데 뭐가 안 맞는 거지? 밸런스?
여기서 다행인 건 데빌이 일머리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는 점.
그는 다른 부서의 정보까지 필요하면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데빌은 공중에 멈춰선 채, 블랙에게 술자리 제안을 했던 여학생을 떠올렸다.
전에 봐서 낯이 익은 게 아니라 분명 그 얼굴을 어디선가 봐서 낯이 익은 거였다.
혹시 블랙처럼 내 계약명단에 있었나 하고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그러기에는 인생을 무탈하게 살아온 용 특유의 제스처나 말투,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인생이 술술 잘 풀린 사람처럼 쾌활했다.
블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밝음이었다.
전혀 다른 종류의 밝음?
데빌은 자신의 머릿속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데빌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사진이 훅 떠올랐다.
어떤 서류의 명단에 그 학생이 있었다.
어디 있었지.
무슨 서류였지.
데빌은 기억을 한 번 더 되짚었다.
기억을 되짚는 동안 불안해진 마음에 블랙이 있을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저 멀리 술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블랙을 발견했을 즈음, 데빌은 기억 속에 있던 서류의 내용과 명단의 이름을 떠올렸다.
블랙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용들의 명단이었다.
세간에서 흔히 행운아라고 부르는 사람들.
럭키가이, 럭키걸.
그건 어쩌다 태어나는 존재들이었고, 그 존재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블랙과 같은 용들이 만들어지는 거였다.
평소였다면 별 문제 없었을 것이다.
그런 용과 같이 있으면 오히려 밸런스가 얼추 맞았을 테니까.
문제는 블랙이 지금 나와 계약한 상태라는 거지.
행운에 행운을 더하는 건 단언컨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블랙 머리 꼭대기까지 도착했을 즈음, 데빌은 남자에게 말을 거는 블랙을 봤다.
대강 이 시점에서 불행이 일어날 거라는 게 예상되었다.
데빌은 그 때까지도 화가 전혀 나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가 어떤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데빌은 일이 터지기 전, 그것을 막아 해결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었으니까.
잘 해결될 것을 아니까 화가 날 이유는 없었다.
남자가 뭔가 개수작을 하려는 타이밍에 맞춰 저지할 생각이었다.
저지한다는 것도 뭐 그냥 잠재우거나 날붙이만 슬쩍 훔쳐 좋게좋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뜻이었는데.
블랙이 남자에게 겁에 질려할 때부터 데빌은 속이 안 좋았다.
슬슬 내려가서 해결 하려는데, 블랙의 애써 웃는 표정을 보게 되었다.
겁을 먹어 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눈에 띄게 움직이면서도 애써 웃는 그 표정.
데빌의 심사가 뒤틀렸다.
전봇대에 앉아있던 새들이 데빌을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블랙은 소리쳐 도움을 요청할 것 같지도 않았고, 울 것 같지도 않았고, 화를 낼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데빌을 너무 화나게 했고 울 것 같게 만들었다.
남자를 어떻게든 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솔직히 약간 과도한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데빌도 이성적으로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목을 부러트릴 듯 쥐어잡고, 마법처럼 사라지는 날붙이와 담배꽁초를 보여주는 일.
죽일 것처럼 그 남자를 노려보는 일.
정말이지, 과도한 처사였다.
블랙이 뒤에서 아파하는 소리를 낸 게 들려서? 글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아파하는 소리를 내놓고 데빌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져서.
그 순간에는 심지어 뿔까지 나올 뻔 했다.
데빌은 그걸 느꼈다.
이성적으로는 그만하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블랙이 집에 가자고 소리쳤을 때, 데빌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내가 진짜 미쳤구나, 그런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
데빌은 골목길 벽에 기대었다.
잠시 뒤, 블랙이 술집에서 나왔다.
친구들에게 잘 둘러댔는지 정확히 30분 만에 가게를 나왔다.
블랙 :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 있어요?"
데빌은 블랙에게 간단히 요점만 말했다, 물론 거짓말도 좀 섞어서.
'우연히 밤에 순찰을 돌고 있었는데, 네가 있는 곳 근처의 기운이 이상했다. 너와 같이 있었던 그 여학생은 태생이 행운으로 가득 찬 아이다. 행운에 행운이 더해져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알았다. 마침 오니 네가 있었다. 모든 게 잘 해결됐다.'
데빌은 모든 게 잘 해결됐다는 말을 할 때, 아주 약간 양심에 찔렸다.
잘 해결됐다고 하기에는 이성적으로 해결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블랙 : "행운에 행운이 더해지는 게 왜 안좋아요?"
데빌 : "큰 행운과 큰 행운이 만나면 주위에 뭐만 남을 것 같니.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가 되는 거야. .행운이 네가 있는 술집에 아주 그냥 덩어맂져 있더라. 밸런스가 안 맞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되면 주위에 불행이 쫙 깔리는데... 네가 술집을 벗어나 그 애랑 멀어진 순간 불행이 닥쳐온 거야. 그리고 솔직히 누구한테 닥쳐오겠니. 그나마 그 중에 더 불행한 너한테 닥쳐오겠지. 그것도 12시 지나 점점 평범한 용이 되어가는 너 말이야. 물론 12시 넘는다고 곧바로 불행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냥 어쩌다 보니 일이 맞아 떨어져서 이렇게 된 거야"
블랙 : "데빌씨"
데빌 : "응?"
블랙 : "앞으로 이런 비슷한 상황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나요?"
데빌 : "아닐 확률이 더 크긴 하네. 오늘은 좀 특별한 케이스. 저런 행운아 만나는 건 나도 오랜만이라... 너무 걱정하지는 마. 뭐, 절대 안 생긴다고는 말 못하지만"
블랙은 걱정이 되었는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손톱으로 여린 살을 눌러댔다.
아무리 블랙이래도 모든 일이 무뎌질 리는 없다.
겁에 질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데빌 : "아무튼 집에 가자"
데빌이 블랙에게 손짓했다.
데빌 : "이 주변은 아직 위험해. 오늘은 피곤한 일 더 겪고 싶지 않아"
데빌은 빠른 속도로 날아 블랙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 블랙을 내려주었다.
가로등 불빛이 환해 뿔이 눈에 띄었다.
물론 지금 누군가 본다면 블랙 혼자 골목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블랙 : "이제 다시 돌아가서 자는 거예요? 순찰인가 뭔가 끝났어요?"
데빌 : 순찰? 아, 응. 돌아가면 쪽잠 정도나 자지 않을까 싶네. 너도 얼른 들어가서 자라. 내일 교양인지 뭔지 수업 간다며"
블랙 : "그럼 오늘 내일 악몽 별로 안 꾸겠네요. 잘 됐다"
데빌 : "뭐?"
데빌이 블랙을 보며 인상을 확 찌푸렸다.
명백히 짜증난 표정을 짓고 있는 데빌을 보며 블랙이 웃었다.
혼자 어색하게 웃는 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블랙 : "이런 일 있었으니까, 데빌씨 악몽 안 꾸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니에요?"
데빌 : "너 지금 아니고 말고가 중요하니? 지금 여기서 내가 중요해?"
데빌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얘가 미쳤나.
데빌은 겨우겨우 가라앉힌 화가 다시 올라오는 걸 느꼈다.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주전자 물처럼 점점 끓어올랐다.
곧 있으면 뚜껑이 들썩거리고 넘칠 것 같았지만 아직까지는 아니었다.
데빌은 화를 줄이려 애썼다.
물이 서서히 잦아들게 하려 애썼다.
데빌 : "블랙아. 말했지만 이건 몇 백 년에 걸쳐 내가 해온 일이야. 잠자리 좀 사나운 것 쯤 그냥 업무의 일환이라고. 네가 방금 겪은 일 위험한 일이었어. 그런데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내가 사적인 얘기 먼저 꺼낸 건 맞는데 이 문제는 네가 간섭할 일이 아냐. 난 익숙해. 이게 내 일이야"
데빌은 블랙의 양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조곤조곤 말했다.
최대한 화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다.
블랙이 오늘만큼은 이 이상 겁을 먹지 않았으면 해서.
알겠냐고 한 번 더 묻는데, 블랙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데빌 : "뭘 못 알아듣겠는데"
블랙 : "간섭 아니고 걱정한 거예요. 그리고 그냥 한 말인데. 그냥... 별 일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데빌 : "네가 뭔데 걱정을 해? 넌 제발 네 걱정이나 좀 해"
데빌이 블랙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잠시 뒤 블랙의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블랙이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조용히 눈물을 닦으려 애쓰는 걸 보며 데빌은 어깨에 다시 손을 얹었다.
블랙은 데빌이 손을 얹자마자,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데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으로 블랙의 얼굴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얼굴을 닦으려 애쓰는 블랙의 손을 걷어냈다.
데빌이 엄지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줬다.
데빌의 손이 닿자 블랙은 더 크게 울었다.
코를 훌쩍이는 블랙을 보며 데빌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데빌 : "내가 말한 게 기분 나빠서 그래? 그럼 사과할게"
블랙이 고개를 저었다.
데빌의 손이 얹어져 있어 그런지 이전보다 거세지는 않았다.
데빌 : "그럼 왜 그래. 아까 일 때문에 그래? 이제 긴장이 풀려?"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거 무슨 스무고개냐.
데빌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데빌 : "긴장이 풀려서 무서웠어가지고 우는 것도 있기는 한데,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블랙이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동그란 눈망울로 쳐다보더니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잘 들리지 않아 얼굴을 가까이 하자, 물에 젖은 식빵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블랙 : "어떠케.... 그러케.. 잘 맞춰"
데빌 : "평범한 용 놈들 뭔 생각하는지 맞추면서 보낸 게 하루 이틀인 줄 아니"
블랙 : "노인네..."
데빌 : "얼씨구, 울보가 말도 잘하네"
블랙이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눈물이 묻어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어 데빌을 쳐다봤다.
다 울었냐고 묻자, 아니라고 단칼에 대답하는 게 웃겼다.
데빌 : "그럼 더 울던지"
블랙 : "난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매번 생각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들 안 겪고 싶어요. 이 정도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서 언니도 이런 일 안 겪었으면 했던 건데. 난 진짜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 가지고... 언니 걱정 돼서..."
데빌이 블랙의 양 볼에 손을 챱 소리가 나게 얹었다.
블랙이 커진 눈으로 데빌을 쳐다봤다.
살짝 얼얼한지 볼에 열기가 올랐다.
데빌 : "내 걱정 같은 거 하지마. 그리고 하고 싶은 말 있을 때는 무조건 솔직하게 말해. 애처럼 굴어. 화도 내. 네 나이 정도면 애야. 알겠어?"
블랙이 손을 뻗어 데빌의 양 어깨를 잡았다.
블랙이 더 키가 커서인지 어깨에 무개감이 더해졌다.
블랙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데빌은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힘을 제법 세게 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블랙 : "왜 그렇게 늦게 왔어요.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좀 더 빨리 와요"
데빌 : "응"
블랙 : "나는 그리고 무서운 게 너무 싫어. 20년 넘게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해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사소하게 길 가다 넘어지는 것조차 이젠 너무 싫어. 그게 무서워. 오늘 같은 일은 더 무서워. 데빌씨도 이런 똑같은 일을 꿈으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너무 싫을 만큼, 그 정도로 싫고 무서워"
데빌 : "응"
블랙 : "벌써 일주일 이주일 흐르고 있는데, 이게 쌓여서 1년이 금방 지날 거라는 사실도 싫어. 익숙했었는데도 1년 뒤에 다시 그 익숙했던 옛날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해? 나도 이러기 싫어"
데빌 : "응"
블랙이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블랙 : "그래도... 그래도 고마워요. 블랙씨 와줘서 너무 좋았어요. 화난 건 조금 무서웠지만, 진짜 악마구나 싶었지만, 안심이 돼서"
데빌 : "나 진짜 악마 맞거든"
블랙 : "아무튼요. 됐어, 이제 더 징징대면 구질구질하니까 들어갈래요"
블랙이 데빌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옷에 손가국이 남은 것을 보며 블랙이 데빌의 어개를 털어줬다.
내일 아침에 보자며 돌아서는 블랙을 데빌이 불러 세웠다.
얘기 다 끝났는데 왜 또 부르냐며 블랙이 투덜거렸다.
데빌 : "아, 놀라지는 마. 미리 말하는데 이거 그냥 절차야"
데빌이 그 말을 끝으로 블랙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나고 데빌이 떨어지자, 블랙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블랙 : "뭐하는 거예요! 미쳤어?"
데빌 :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 말을 귀로 듣냐 코로 듣냐 너는. 절차상 과정이야. 솔직한 아이가 좋아서 서비스로 걸어주는 건데"
블랙 : "아니! 뭔 소리야, 이걸 어떻게 안 놀라요!"
데빌 : "조용히 좀 해, 안 그래도 펑펑 울어가지고 누가 보면 너 혼자 떠드는 고주망태로 보일 테니까, 지금"
데빌이 블랙의 등을 떠밀었다.
데빌 : "아무튼 방금 걸로 됐어"
블랙 : "뭐가 됐는데요. 블랙씨야말로 말을 입으로 하는 거예요, 코로 하는 거예요"
데빌 : "정수리에 했어도 되기는 하는데, 너 키가 너무 커서 귀찮아"
블랙 : "그냥 숙여달라고 하면 됐잖아요. 애초에 이거 해야 할 필요 있었던 거예요?"
데빌 : "그렇지만 볼에 안 하면 입에 해야 하는데, 넌 내가 그랬으면 좋겠니?"
블랙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야 술 마신 용처럼 보였다.
데빌 : "아무튼 이제 필요하면 불러. 소리를 지르던지 울던지 부르던지 네 맘대로 해"
블랙 : "내 볼에 무슨 짓 했어요"
데빌 : "아무 짓도. 절차야"
블랙 : "아, 몰라. 내일 물어볼래. 생각하기 귀찮아졌어"
문 앞까지 도착한 블랙이 손을 대충 흔들었다.
데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빌 : "잘 자. 오늘처럼 정말 필요한 때가 되면 언제는 부르고"
블랙 : "언제 어디서든?"
데빌 : "응? 아, 그거. 맞아, 언제 어디서든"
블랙 : "저 갈게요"
데빌 : "그럼 내가 언제든 갈게"
블랙 : "네"
데빌 : "오래 안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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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이것도 하이라이트로 하려다가 말았어요.
뭔가 좀 더 팍 터지게 임팩트 있는 건 추후에 따로 나와서...
암튼 이번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