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또 몇 주가 흘렀다.
블랙은 이제 데빌의 평소 모습(거대한 뿔을 달고 올 블랙정장을 입은 채, 차가운 무표정을 한 모습)에도 제법 적응했다.
수업 시간에 데빌이 본인 옆자리나 강의실 어딘가에 앉아있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실습수업만 아니면 데빌은 늘 평소의 모습으로 있었다.
데빌은 불필요한 기력을 쓰지 않아도 되니 좋았고, 블랙은 데빌이 익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으니 좋았다.
데빌에게는 평범하게 흐르는 몇 주였다.
블랙과 계약한 지 한 달이 넘어가네, 정도가 데빌의 감상이었다.
블랙에게도 아마 무탈하게 흐르는 몇 주였다.
무탈하게 흐르기는 했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몇 주간 블랙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밤에 무서울 때면 데빌이 항상 나타나줬다.
처음에는 조그만 목소리로 와주면 안 될까요... 하고 부탁해야 나타났는데, 나중에는 블랙이 저도 모르게 '이 상황 위험한 것 같은데' 하는 마음만 먹어도 알아서 나타났다.
게다가 정말 빠르게 나타났다.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데빌은 다 수가 있다고만 답했다.
블랙은 데빌이 그 날 볼에 입을 맞췄을 대, 무슨 주문이라도 썼겠지 하고 짐작만 했다.
아무튼 블랙은 그게 좀 이상했다.
엄연히 말하자면 데빌은 본인과 계약 관계인데, 자신에게 잘해주는 게 이상했다.
물론 악마라 해도 도와주며 서로 상부상조하겠다는 게 계약의 내용이기는 했지만, 블랙이라 해도 데빌이 필요 이상의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회사 체계라 해놓고 이렇게 권력을 남용해도 되나 싶어 걱정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아무리 그래도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나 하는 의문만 커져갔다.
그래서 블랙은 밥이라도 잘 챙겨주자 싶었다.
트만 나면 데빌에게 맛있는 것을 해다 먹이고 사다 먹였다.
피곤해 보이면 낮잠 좀 자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의식적인 수준도 아니었다.
블랙은 데빌이 와주지 않아도, 데빌을 부를 일이 없어도, 무의식중에 안심이 되었다.
데빌이 재깍재깍 나타나준 지 몇 주 만에 블랙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이 와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생애 처음이었다.
블랙은 가끔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ㅏ독였다.
너무 의지하는 거 아냐, 1년 지나면 끝인데, 마음 강하게 먹어 블랙! 이라고 외치며 얼굴을 두어 번 때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편의점 가는 길에 거대한 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개가 블랙에게 달려드려는 순간 데빌이 뒤에서 블랙의 어깨를 부드럽게 당겼다.
살짝 뒤로 밀려난 블랙은 데빌의 품에 안겼고 걔한테 물리지 않게 되었다.
데빌은 블랙을 품에 안은 채, 개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저리 가라는 동작을 해보였다.
개는 겁먹은 표정을 한 채, 블랙과 데빌을 피해 지나갔다.
사과하는 주인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블랙은 고개를 뒤로 힐끔 돌렸다.
자신을 안고 있던 데빌이 팔을 슬쩍 풀며 미간을 찌푸렸다.
데빌 : "조심 좀 해, 앞 보고 다니는 거 맞아?"
그 말 하는데, 블랙은 별 이유 없이 볼에 뽀뽀 받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날 집에 가서 블랙은 화장실로 들어가 본인 뺨 몇 대 내려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미쳤다보다.
블랙은 그렇게 결론 내린 후, 다시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화이팅, 블랙! 제발 조심 좀 하고 다니자, 1년 지나면 너 어떻게 살래? 혼자서 잘 살아야지! 그렇게 다독이고 나면 힘이 팍 들어갔다가도 다시 우울해졌다.
그러게, 블랙.
너 1년 지나면 혼자서도 잘 살아야해.
평생 혼자로 살았는데도 그 사실이 어쩐지 새삼스러웠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뿐인데도 너무 낯설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었다.
-
입에다 뽀뽀했으면 서류 양도 줄고 위치추적도 훨씬 빨리 됐을 텐데.
데빌은 그런 생각을 하며 서류를 작성했다.
서류 이름은 '계약 대상자 블랙에게 행한 위험감지 및 위치추적 주문 승인에 대한 확인 요청문'이었다.
서류를 받아든 악마가 웃으며 천하의 데빌 씨를 까다롭게 만들만큼 말을 안 듣나 봐요, 라고 했다.
데빌 : "말을 안 듣는 건 아니고. 아무튼 서류 올려주세요. 금방 통과 될까요?"
악마 : "거의 60?년 만에 이 주문 쓰시는 것 같아요. 데빌씨면 알아서 판단하셨을 테니까, 바로 통과 시켜드릴게요"
악마들과 천사들이 모여 확인절차를 거친 뒤, 도장을 찍어 서류를 넘겼다.
이제 불리기만 한다면 언제는 블랙에게 갈 수 있었다.
뭐, 2~3일 정도는 이상한 짓 안하겠지라는 판단 하에 볼에다 한 거니 상관은 없지만.
데빌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도장이 찍힌 서류의 사본을 자신의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입에다 했으면 표정 볼만했겠다 싶어 데빌은 사무실 안에서 저도 모르게 깔깔 웃어버렸다.
그렇지만 입맞춤 한 번 해본 적 없던 애한테 그러는 건 미안한 처사 같았다.
그래서 타협하고 타협해서 볼에다 하고 내가 서류 좀 더 많이 썼지만.
데빌은 그렇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치켜드는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알 게 뭐람.
뒤이어 또 다른 의문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잔소리나 좀 하면 될 것을 이렇게 부를 때마다 달려가야 할 이유가 있나.
의문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데빌은 사무실 책상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쳣다.
사무실 안에서 일하던 악마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데빌 : "아무것도 아닙니다. 벌레 같은 게 보여서"
지옥에 벌레가 있을 리 없잖아.
악마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표정이었지만 대충 넘어가주었다.
가장 일을 많이 하는 데빌이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겠지, 하면서.
데빌은 턱에 손을 괸 채,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왜 사서 고새응ㄹ 하는 거지.
데빌은 그 답을 찾을 겸 몇 주 내내 블랙을 쳐다봤지만 답을 전혀 찾지 못했다.
데빌이 관찰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라고는 '어른스러운 척 참을 줄 알았는데, 위험하면 바로 부를 정도로 블랙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줬다는 점', '밖에 나가면 대체로 어른스럽게 굴지만 단둘이 있을 대면 데빌에게 칭얼거린다는 점'. '블랙이 자꾸 자신을 신경 써주면서 자신보다 몇 백년은 더 산 어른인 것처럼 굴며 밥을 차려준다는 점'
관찰로 얻어낸 사실들은 전부 단 한 가지 사실로 귀결되었다.
블랙은 데빌에게 조금씩 의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 한 가지. 이게 아닌데.
데빌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제 레포트를 하던 블랙이 땅 꺼지겠다고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내밀었다.
데빌이 손을 휘휘 내젓자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의지해주는 건 기쁘네.
데빌은 그 생각을 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빌의 미간이 험악해 보일 지경까지 찌푸려졌다.
집중하고 있는 블랙의 등을 노려봤다.
뭐가 기쁘다는 거야. 아니, 그게 왜 기뻐? 아니, 잠깐 쟤는 왜 나한테 의지하지? 아니, 그보다 나는 왜 쟤가 의지하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는 거지? 왜 아낌없이 서비스나 해주고 있는 거냐고.
데빌의 머리가 다시 생각으로 가득 차 새하얘졌다.
습관적으로 식탁이나 냉장고를 내려치려다 그대로 멈췄다.
노트북을 두드리는 일에 집중하느라 등이 구부러진 블랙이 보였다.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보던 데빌은 산책하고 온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30분 정도 하늘도 날고, 주변도 돌아보고 다른 놈들 일 잘하고 있는지 전화도 해본 데빌은 다시 블랙의 집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대충 바꿔 입고 블랙 가져다 줄 레몬에이드도 샀다.
오랜만에 유타칸 음료 맛보고 싶어진 데빌 또한 차갑고 연한 초코 라떼를 한 잔 샀다.
레몬에이드에 초코 라떼를 양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블랙은 여전히 노트북에 얼굴을 박은 채 '왔어요?' 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
데빌 : "마셔"
블랙 : "와! 마침 필요했는데!"
이 신맛이 좋다고 극찬하는 블랙을 보며 데빌은 '목구멍 터질 만큼 새콤하게 만들어 주시면 돼요' 라고 말하기를 잘했다 생각했다.
과제 그만 하고 싶은데 과제 대신 해주는 주문은 없냐며 칭얼거리는 블랙의 볼을 데빌이 가볍게 꼬집었다.
데빌 : "열심히 살아"
블랙 : "저처럼 열심히 사는 용 없을 걸요?"
데빌 : "그래, 그래"
블랙 : "데빌씨도 잘 알잖아요"
데빌 : "그래, 뭐"
블랙 : "데빌씨가 저를 제일 잘 알잖아요"
데빌 : "그렇다고?"
데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이 데빌을 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데빌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블랙이 과제 금방 끝내겟다며 저녁 뭐 먹을 건지 물었다.
대답하려는 순간, 데빌의 휴대폰이 울렸다.
블랙이 전화 받으라는 듯 손으로 휴대폰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아무리 회사여도 그렇지 악마랑 천사들도 휴대폰 가지고 다녀요?' 라며 놀랐던 블랙도 이제는 그 존재를 자연스러워했다.
진짜 웃겨.
블랙은 전화를 받기 위해 휴대폰을 드는 데빌을 보며 웃었다.
데빌 : "어, 파틴..."
파틴 : "비상!!!"
블랙의 귀까지 꽂힐 정도로 큰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데빌은 휴대폰을 귀에서 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제멋대로 큰 소리를 내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데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 또한 갑작스런 청력 테러를 당해 양쪽 귀를 문질렀다.
데빌 : "파틴아, 나 귀 떨어진다. 제발 천천히 조용히 좀 말해. 응. 응. 그래서... 뭐? 뭔 소리야 그게. 응, 응? 어. 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뭐? 하람 그 망할! 아무리 빡쳐도 그렇지. 신이라는 작자가! 아, 옆에서 듣고 있어? 미안하다고 좀 전해드려라... 음, 그래. 알겠어. 좀 이따 보자"
데빌이 전화를 끊었다.
블랙은 그냥 관심 끄고 과제에 다시 집중하려 했다.
무슨 일 있나보다 싶기는 했지만 본인과는 관계없을 테니까.
데빌이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블랙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데빌 : "블랙아"
블랙 : "네, 왜요?"
데빌 :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 좀 이따 바로 퇴근해야겠어"
그건 좀 관심이 생기는 발언이었다.
블랙이 의자를 돌려 데빌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 한쪽 눈썹 꼬리를 치켜 올리면서.
데빌 : "그리고 일주일 뒤에 보자"
블랙 : "네?"
데빌 : "일주일간 나 없이 잘 지내고. 내가 못 먹는 야채 많이 먹고"
블랙 : "그, 그래도 되는 거예요? 저 혼자 둬도 돼요? 그럼 저 집에만 얌전히 있어야 하나요? 왜요? 일주일간 어디 가는데요?"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질문에 데빌이 고개를 내저었다.
데빌 : "악마들 몇 십 명이 떼거지로 헛짓거리를 했대. 지금 신이 노하셔서... 단체로 실직 당했어. 인력 부족이야"
블랙 : "악마들이 실직도 당해요? 다들 일하기 싫어한다면서요. 그러 실직 당하면 좋은 거 아닌가?"
데빌 : "유황 불구덩이에 물구나무 자세로 머리부터 집어넣은 다음, 하반신부터 다시 얼음물에 담가 넣는 걸 실직이라고 한단다, 블랙아"
블랙 : "아, 넵..."
데빌 : "일주일 안에 빡세게 일하고 다른 놈들도 일 가르치고 한 다음 와야겠어. 난리래 지금"
블랙 : "인수인계를 일주일 만에 하는 거예요, 그럼? 그게 가능해요?"
데빌이 힘없이 웃었다.
앞으로 닥쳐올 역경과 고난과도 같은 업무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우리 블랙은 나한테 궁금하나 게 참 많네, 하고 중얼거리며 데빌은 블랙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데빌 : "가능이 아니라 그래야지. 새로 오는 놈들 다 그래야 할거야"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웃는 데빌을 보며 블랙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팔에 소름이 절로 돋았다.
블랙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데빌의 손을 슬며시 치워냈다.
데빌 : "그리고 일주일간 밖에 다니는 건 걱정하지 마. 이제 일주일치 먹을 거니까"
블랙 : "뭐, 뭘 먹어요"
데빌 : "네 불행. 일주일치 먹고 갈 거니까 허튼 짓만 안 한다면 평소랑 똑같을 거야"
그걸 무슨 카드 할부 결제처럼 처리할 수 있다고?
블랙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데빌 : "불행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게 내 일이라고 했잖아. 당연히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너도 좋잖아. 일주일간 귀찮은 감시인 하나 없으면"
블랙이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여는데, 데빌이 블랙의 양쪽 관자놀이에 손바닥을 얹었다.
부드럽게 블랙의 머리를 감싼 뒤, 눈을 감으라고 했다.
블랙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온통 새까맸다.
순간 천둥 치듯 빛이 번쩍였다.
머릿속에서 팍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블랙이 눈을 떴다.
데빌은 이미 가고 없었다.
이렇게 빨리 되는 거야? 이게 퇴근이야?
블랙은 얼빠진 얼굴로 혼자 남은 원룸을 빙 둘러봤다.
-
여기서 끝입니다.
이번 편은 분량이 꽤 긴 것 같기도 하네요.
이번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