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빌의 얼굴이 다시금 멀어졌다.
데빌의 머릿속에서 화가 가라앉고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블랙은 입을 가린 채, 얼굴을 푹 숙였다.
너무 몰아붙였나 싶어 데빌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술 먹고 우는 애 상대로 무슨 짓이야 이게.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봤을 때, 관리자로서든 아는 사이로서든 잘한 일이 아니었다.
데빌 : "블랙아"
블랙 : "...."
데빌 : "블랙아?"
블랙 : "하려던 얘기가 뭔데요. 말 안 끝났다면서"
데빌 : "하려던 얘기? 아아"
데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빌 : "내가 갈색양말을 신은 고양이가 되어 네 앞에 나타났을 때, 내가 해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네가 날 아주 잠깐 쓰다듬을 수 있게 해준 것 뿐이야. 기억나?"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빌 : "내가 그 때 너에게 해준 건 고작 그 정도야. 그 정도만을 허락 받았었거든. 난 알아. 그게 네 인생 몇 안되는 행복의 순간이었다는 거. 고작 2년 정도나 버틸 수 있는 행복과 자비고... 널 만날 일이 생긴다면 잘해줘야겠다 생각했어. 물론 너한테만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냐. 모두에게 최대한 잘 해주려고 해. 내가 계약했던 용들, 무리한 요구만 아니라면 가능한 선에서 다 해줬어. 왜냐하면 그 용들 인생에 이런 순간 다시는 안 찾아 오거든. 본인들도 알아. 잘 알지. 어떻게 모르겠어"
그렇게나 다정한 말을 뱉는 데빌의 표정은 하나도 다정하지 않았다.
입 꼬리가 일직선인 무표정에 전혀 휘지 않는 눈, 사무적인 사항을 전달할 때와 같은 목소리 톤.
그럼에도 블랙은 데빌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블랙의 불행이 이 세상에는 당연하다는 그런 냉정한 말을 아무렇잖게 했던 데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던 기억도 함께.
데빌 : "물론 몇 백년간 이 일을 해오면서 원하는 게 없는 용들도 만났어. 그냥 계약한 것 자체로 만족하고, 흐르듯이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용들. 어디 여행 가보고 싶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흘리지 않는 용들. 먼저 해주려고 하면 거절하는 용들. 그런데 블랙아. 넌 그런 용들보다 더 나빠. 넌 아주 못됐어. 하고 싶은 걸 해주면, 널 도와주면, 나를 걱정해. 너한테 잘하기도 벅찬 시간에 내 밥이나 먹여주고...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나는 2년 전에 고작 그런 정도의 행복을 받은 네가 이러는 게 너무 싫어. 매번 미안한 표정 짓고 어른스러운 척 하고 내 걱정만 해주고. 난 그래서 너한테 진짜 잘 해주고 싶었어. 너한테 계속 잘 해주고 싶어서 점점 잘해준 건데..."
데빌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방 안이 다시 정적으로 가득 찼다.
그게 싫어 블랙이 무슨 말인가 하려는데, 데빌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데빌 : "저번에 그 일 있고 나서는 네가 필요하면 재깍재깍 나 부르고, 원하는 것도 잘 말해서 너무 좋았어. 뭐 원하는 게 기껏 해봐야 편의점 같이 가달라 정도였지만. 여전히 나한테 밥 먹어라 잠 잘 자라 이러고 자빠졌지만 아무튼 좋았어. 좋았는데, 오늘 하도 부르기에 걱정 돼서 내려왔더니...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너 할 말은 실컷 다 해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 얘기 그만하자 이런 말 하면 내가 거기에 대고 알겠어 블랙아, 뭐 이러겠어? 생각을 해봐"
데빌이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얼굴을 쥐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힘을 주는 걸 본 블랙이 몸을 일으켜 데빌에게로 다가갔다.
블랙이 데빌의 바로 앞까지 왔다.
데빌은 여전히 얼굴을 움켜쥔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데빌 : "잘 해주기는 뭘 잘해줘. 나 먼저 걱정해준 건 너면서. 짜증나게 굴지 마, 블랙아"
블랙 : "데빌씨"
데빌 : "왜"
블랙 : "손 치워봐요"
데빌 : "왜"
블랙 :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블랙의 말에 데빌이 의문을 표시하며 손을 치웠다.
바로 앞에 있는 블랙에 조금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술 냄새 난다고 투덜거렸지만 블랙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블랙 : "혹시 여태껏 데빌씨 걱정해준 용이 한 명도 없었어요? 아니죠?"
데빌 : "어?"
블랙 :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용이 세상 어디에 있어요. 아무도 데빌씨한테 그런 말 해준 적이 없어요? 어떻게 그래?"
블랙이 데빌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봤다.
평소라면 동정하지 말라며 짜증을 냈을 것이다.
데빌은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본인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는 블랙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한쪽 입 꼬리를 올린 채, 실실 웃으며 블랙을 올려다봤다.
데빌 : "너 취했어?"
블랙 : "조금요"
데빌 : "블랙아, 너한테도 그런 말 해준 용 있었니?"
블랙 : "어떤?"
데빌 : "너한테도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지 않다고 걱정해 준 용 있었냐고, 여태"
블랙 : "데빌씨가 해줬잖아요, 데빌씨가. 그래서 이렇게 된거야"
블랙이 전보다 더 울상을 지었다.
블랙 : "데빌씨가 그런 말을 해버려서... 난 몇 달 전만 해도 힘들게 사는 게 당연한 용이었는데, 이제 아니게 되어버렸잖아요"
데빌 : "그럼 똑같네"
블랙 : "뭐가요"
데빌 : "너랑 나랑 똑같다고. 나도 이런 일 하는 거 아주 자연스러웠단 말이야. 별 생각도 없었고. 너 때문에 지금 업무고 뭐고 다 엉망진창이야. 알겠어? 다 너 때문이라고. 진짜, 진짜 엉망진창이야"
블랙 : "제 인생도 지금 데빌씨 때문에 엉망진창이거든요?"
데빌 : "그래서, 싫어?"
데빌은 대답 없는 블랙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갖은 엄살을 피우며 아프다고 소리치는 걸 무시하고 볼을 주욱 잡아 늘렸다.
데빌 : "잠이나 자. 12시 지났으니까 이제 하루만 더 기다려줘. 바빠서 이만 갈게"
데빌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블랙이 아픈 볼을 부여잡으며 데빌을 노려봤다.
데빌 : "블랙아"
블랙 : "왜요"
데빌 : "너는 내가 좋아, 이 순간이 좋아? 둘 중에 뭐야?"
블랙 : "네?"
데빌 : "아주 중요한 문제야. 대답 기다릴게"
블랙의 눈앞이 번쩍였다.
데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자기 맘대로야" 블랙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왜 시킨 대로 눕고 난리야 하는 마음에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그래도 시킨 대로 건강히 잘 자야지 하는 생각 또한 동시에 올라왔다.
몇 분 정도는 몸을 뒤척였지만 술을 많이 마시고 울어 피곤해서인지 이내 잠이 쏟아졌다.
하루만 더 기다리면 오는구나.
하루만 더 기다려 달라는, 부탁인 게 분명한 어조로 말하던 데빌의 얼굴을 떠올렸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밀린 잠이 블랙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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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악... 언제나 걱정되는 분량... 이 정도면 독자 분들이 만족 하실까.... 아니면 이 정도는 또 너무 과한가.....
아무래도 로맨스 물이라서 스토리도 원래는 엄청 막 과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 보단 과했던 거 여기 분들 나이가 그렇게 높으신 것 같진 않아서 수준 좀 낮췄는데 사소한 스킨쉽 조차도 그냥 다 빼버려서 분량 조절하기 더 어려운 것 같아요....ㅋㅋㅋ
중간 중간에 빼먹은 만큼 빠진 스토리 자연스럽게 연결도 해야 하고... 진짜 어렵네요.
아무튼 다음 글은 CALL로 찾아뵙겠습니다.
이번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세뱃 돈도 많이 받으세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