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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UNDERSEA_1

4 [DEVIL]
  • 조회수254
  • 작성일2023.01.25

*총 2편인 단편 작품이고, 분량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할 때 봐주시길 바랍니다*

*중간에 끊기면 흥미가 떨어질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한 번에 끝까지 읽어주세요*


(좀비 아포칼립스 물이며 배경은 지구 입니다)


(시체와 같은 요소들이 나오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UNDERSEA]



온몸 가득 찬 바람을 담아 실내로 들어선다.

찢어지게 추운 바깥에서 장갑 하나 없이 꽁꽁 언 쇳덩이를 이리저리 만져댔더니 꼴이 말이 아니다.

고신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라디오를 틀었다.

저번 주부터 TV도 끊겼기 때문이다.



"So-called "zombies' are attaking dragon indiscriminately. The Canadian goverment has shown no response other than a message to refrain from going out. Are we going to go into acarchy?"



그러나 이건 몇 달째의 반복인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건 매일매일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부품을 구해와 TV를 고쳐볼까.

그러나 곧 떠날 마당에 그건 별 소용이 없었다.


어쩐지 매일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고신이 부품 조립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부터 내리기 시작해선 하루도 거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겉옷에 쌓인 눈송이를 털어내고, 고신은 감각도 없는 손으로 장작을 아무렇게나 벽난로에 쑤셔 넣었다.

몸이 어느 정도 녹으면 다시 나가야만 했다.


고신이 캐나다에 온 것은 작년 초였다.

캐나다에 살고 계신 증조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어 간병할 용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람 : "...뭐? 지금 장난해? 캐나다에서 1년?"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고신도 믿고 싶지가 않았다.

영어가 되는 혈육이 고신 밖에 없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상의도 없이 캐나다행 비행기가 예매된 것이다.

(날개가 있음에도 비행기를 타고 가는 이유는 설정이 장거리 비행이 불가능하다는 설정입니다)

이미 가족끼리 이야기가 다 됐으니 넌 떠나기만 하면 된다고 짐도 친히 다 챙겨주었다.

황당한 마음에 본인은 캐나다로 갈 마음이 전혀 없다고 어필을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비행기는 당장 이틀 뒤였고, 이틀 뒤는 하람의 생일이었다.



하람 : "나를 두고 네가 혼자..? 지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하람이 성질을 애써 꾹 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 고신은 초조한 마음에 아랫입술만 물어뜯었다.



하람 : "어디로 가는데. 샌디에고?"


고신 : "...샌디에고는 미국이고 하람아"


하람 : "아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고신 : "몰라, 무슨... 엄청 시골이었는데"



연인인 하람을 포함해서 친구들이나 일자리까지, 모든 걸 두고 생뚱맞게 캐나다 산골짜기로 떠나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를 간호해야 했다.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야.

착잡한 마음에 고신은 손바닥을 얼굴에 묻었다.



하람 : "캐나다가 좀 먼 것도 아니고 시차도 엄청 날 텐데..."


고신 : "..."


하람 : "그래도 시골이면 다행이네. 바람피울 일은 없겠다"


고신 : "...뭐라고?"


하람 : "괜히 도시 가서 예쁜 언니들한테 눈 돌아가면 어떡해. 차라리 시골이 낫지..."



그러곤 하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신은 가시방석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며 하람의 눈치만 봤다.

그렇게 앉아서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보아도 억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캐나다가 조금 먼 것도 아니고 당사자랑 상의도 없이 멋대로 비행기를 끊은 건 좀 심한 거 아닌가.

가슴이 꼬인 기분이었다.



하람 : "...너어, 연락은 꼭 잘 봐야 해. 알겠지?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면 너 죽어. 넌 귀국하면 나랑 결혼해야 해. 어쩔 수 없어"


고신 : "응..."


하람 : "매일매일 영상통화 해. 하루도 거르지 말고. 밥 먹으면 밥 먹었다, 아프면 아프다. 하나하나 다 보고해. 알겠어?"



그렇게 겨우 떠나온 곳이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아나함레이크.

큰 호수가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심지어 고신이 머물게 된 고모 집은 더욱 외곽에 있는 옥수수밭의 한가운데였다.

마트도 하나뿐이고 주유소도 하나.

그 주유소 마저 여는 날이 얼마 없어서 이거야 어디 마음 놓고 도망도 못 치겠구나 싶었지만, 캐나다까지 온 김에 관광을 하든 뭘 하든 일단 뽕을 뽑아야겠다 싶어서 고신은 주유소가 문을 열 때마다 미리 기름을 얻어다가 창고에 숨겨놓기도 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하람과는 괜찮았다.

시간이 흘러도 하람과의 연락이 뜸해지는 일은 없었고, 큰 시차에도 굴하지 않고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영상통화로 얼굴을 비췄다.

끊을 때면 아쉬웠고, 꼭 사랑한다고 덧 붙였다.

생각보다 시간은 금방금방 갔다.

고신은 한국에서 배워둔 기술로 동네 작은 정비소에 취업했고 하람은 다니던 회사에서 승진을 했다.

17시간의 시차를 가뿐히 밟고, 보고 싶은 마음은 통화로 겨우겨우 달래가며 두 용은 잘 지냈다.

정말이었다.



하람 : "있지, 우리 지금 다른 날을 살고 있다?"


고신 : "응?"


하람 : "나는 지금 새벽 1시인데, 넌 어제의 오전이잖아. 신기하지 않아?"


고신 : "...새벽 1시? 너 내일 출근 안 해?"


하람 : "아, 야! 나 지금 되게 낭만적인 얘기하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갑자기 우울해졌어"


고신 : "미안... 잠도 많으면서 또 지각하면 어떡해. 걱정돼서"


하람 : "됐네요. 너도 얼른 다시 일 들어가. 점심시간 다 끝났겠다"


고신 : "알겠어. 너 아침에 일어나면 연락해"



대답이 한참 없길래 잠든 건가 싶었다.



고신 : "...거기 있어?"


하람 : "고신아.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어. 내년 봄까지 어떻게 기다려, 나..."



고신은 습관처럼 대답하려다가도 삼켰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람이 저번 주에 금지했기 때문이다.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사진을 보내 연락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람은 어쩐지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고신이 고모 댁에 도착하고 몇 달 뒤인 봄에 집으로 표지에 봄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노란색 편지가 온 것이다.


계절마다 편지를 보낼게. 이건 봄 편지야.


따로 예쁘게 접혀온 쪽지엔 그렇게 적혀있었다.



고신 : "여보세요? 하람아. 이게 뭐야?"


하람 : "..."


고신 : "너 혹시 자고 있었어?"


하람 : "...응. 지금 주말 아침 8시야"


고신 : "..."


하람 : "그래서 뭐가?"


고신 : "편지 말이야. 집에 편지가 왔어. 네 이름으로"


하람 : "..."


고신 : "근데 너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하람 : "혹시 읽어봤어?"


고신 : "아니, 아직"


하람 : "그거 나름 낭만적이지 않아? 한국에서 온 여자친구의 그리운 손편지..., 이런 느낌으로"



고신은 막 웃었다.

웃지 말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신경질을 부려대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너무 행복한 기분 탓이었다.



고신 : "좋아. 너무 좋아. 다음 거 올 때까지 못 기다리겠어"



하람은 말없이 웃었다.


가을 편지를 받은 건 10월이었다.

겨울이라 써진 파란 편지도 같이 왔는데, 고신은 두 개를 한 번에 뜯어 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가을 편지만 보내려다가, 10월이면 네가 사는 지역은 한국 겨울만큼 추워진다고 해서 두 개를 같이 보내.

겨울 편지는 내 생일날 보도록 해! 미리 열어보면 죽어!


곧 겨울이라고 붕어빵을 먹고 싶다고 신이 나서 써놓고는 중간중간 틈틈이 겨울 편지를 미리 읽으면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겠다든지, 집 비밀번호를 바꿔놓겠다든지 꽤 위협적인 살벌한 협박을 써놓았다.

한 번에 뜯어 보기라도 했으면 그대로 인생이 끝장날 뻔한 것이었다.


캐나다는 단풍이 유명하잖아. 사진 많이 찍어 왔으면 좋겠어!

난 너 대신 붕어빵 많이 먹을게.


그걸 생각하자면 일을 하다가도 웃음이 절로 났다.

고신보다 하루를 앞서서 사는 하람은 주말이었고, 고향에 놀러 왔으니 내일은 너 퇴근하면 온종일 통화하자고 했던 어젯밤의 대화 때문에, 고신은 넋을 놓고 시계를 바라보다가 사장에게 혼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껏 들떠서 돌아왔더니만 하람은 연락이 통 없었다.

자는 건가? 한국은 지금 오후 5시인데. 많이 피곤했나?


일어나면 전화하라고 연락을 넣었다.

놀랍게도 지난 몇 개절 간 말 없이 연락이 안 되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들떴던 마음이 한 번에 식으니 어쩐지 몸이 으스스한 게 소름이 돋았다.


마침 고신이 좋아하는 시트콤이 나올 시간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제일 좋아하는 감자칩 봉지를 뜯어 쇼파에 앉았는데, 어쩐지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누르기가 한참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었다.



"So-called "zombies" are attacking dragon indiscriminately. The Canadian government has shown no response oher than a message to refrain from going out. Are we going to go into anarchy? The medical professionals tell..."


(이른바 좀비들이 무차별적으로 용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메세지 이외의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무정부 상태로 돌입하고 있는 걸까요. 전문 의료진들은...)



분명 시트콤이 나오고 있어야 하는데, 어느 채널을 돌려보아도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뉴스들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옮겨 다니다가 결국 아무 채널에나 멈춰서선 감자칩을 입에 억지로 욱여넣어 씹었다.

연락은 아직도 없는 건가, TV는 틀어놓고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했다.



"The virus first occurred in Incheon, Korea, and it took only five hours to spread around the world. Assuming that the virus already has a large number of infections around the world..."


(바이러스는 대한민국 인천에서 처음 발생하였고, 전 세계로 확산이 되는데에 소요된 시간은 고작 5시간 이었습니다. 이미 전 세계에 많은 감염자가 있었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그제야 우적거리던 걸 멈추고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난장판이 된 도시. 온통 피바다에 길가에는 시체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고, 거긴 분명 인천이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인천이다.


고신은 곧바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코웃음을 치거나 부정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쩐지 온몸에 소름이 돋은 탓이었다.

하람과 오늘 연락이 되지 않은 것도 TV에 나온 일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

고신이 걸어 잠근 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제 하람이 본가인 인천에 내려간다고 말한 탓이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나 바깥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시는 고모는 고신의 풀린 다리와 떨리는 동공에 일조한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른바 좀비 사태가 10월에 터지고, 수습되는 일 하나 없는 채로 벌써 1월이다.

몸이 안 좋으시던 증조할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고모는 결국 돌아오지 않으셨다.


11월이 다 지날 때 까지 고신은 집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미리 받아둔 기름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뿐더러 지하실엔 샷건도 한 자루와 마른 옥수수가 잔뜩 있었다.

식량도 충분하고 심지어는 전기도 사용할 수 있는.

생존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세상이 망한 것 치고 고신은 그 안에서 나름 용답게 살 수 있었다.

과자도 남았고, 녹화된 비디오를 본다거나 심지어는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고신은 잠도, 밥도 거르고 혼자 남은 텅 빈 집에서 매번 아직 열어보지 않은 편지만 만지작댔다.

매일 밤 해가 뜰 때까지 눈 내리는 바깥을 달빛에 시야를 의지하고 멍하니 쳐다보며, 이미 종이가 닳도록 들여다 보았던 나머지 세 계절의 편지의 내용을 빠짐없이 외운다.

어디에서 맞춤법을 틀렸나, 어느 글씨가 제일 귀엽나.

셀 수 없이 읽었는데도 꾹꾹 눌러진 글자를 만질 때면 의미 없는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절대 질리지 않는 편지를 질렸다고 생각될 때까지 읽고 나면 아직 열어보지 못한 파란색 편지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일이 터진 이후로 하람의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지만 어쩐지 말을 어기고 미리 열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고신은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고신은 기술자였다.

엔지니어, 테크니션. 뭐든.

자동차 정도는 눈 감고도 만질 수 있었고, 외국인인 고신이 캐나다에서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욱 운이 좋았던 건, 주유소도 달랑 하나밖에 없는 쥐똥만한 마을에 공항이 있었던 것.

사실 말만 공항이지, 작은 개인 비행기 두 대 있는 활주로에 불과했지만, 사실 고신은 거기에 일자리를 얻어볼까 했다.

항공 기술을 독학해보려고 두꺼운 서적을 몇 권을 정독한 적이 있는데 도저히 혼자서는 무얼 할 수가 없었다.

공항이 있다는 말을 처음에 들었을 땐 어쩌면 거기서 기술을 배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허름하고 작은 그 규모에 그냥 평범한 정비소에 일을 얻은 것이다.



아무리 작았어도 그냥 찾아가 볼 걸. 그럼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진 않을 텐데.



사태 후 남겨진 낡은 비행기 두 척 중 하나는 꽤 쓸만 했다.

부품만 몇 개 갈아 끼우면 당장이라도 잘 이륙할 수 있을 기세였다.

그래서 당장 거처를 공항으로 옮겨왔던 것이고, 정비소에서 자동차를 만질 때 썼던 공구들로 잘 알지도 못하는 비행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걸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국으로, 인천으로. 하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So-called "zombies" are attacking dragon..."



고신은 라디오를 끄곤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시리다 못해 아픈 손을 부여잡고 찡그리는 표정 하나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차갑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어쨌든 녹이긴 해야했기에, 시간이 아까워도 벽난로 앞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모 집을 떠나 공항에서 지내게 된 것도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여전히 정이 안 든다.

집에서 챙겨온 것은 옷 몇 벌과 하람에게서 온 편지 네 장. 그리고 정비소에서 일할 때 쓰던 공구 상자.

그뿐이었다.


고신은 의자에 걸터앉아 이미 몇 번이고 되새긴 것들 중 하나를 다시 펴보았다.

노란색. 봄의 편지였다.



고신에게.


고신아 안녕. 봄이 떠나가 버릴까봐 급하게 글을 써.

편지가 언제 도착할 지는 모르겠지만, 여름이 되기 전에는 도착했으면 좋겠다.


네가 거기에 잘 적응할까 모르겠네.

우리 고신, 낯도 많이 가리고 말도 잘 못 하고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는데.

괜히 다른 나라 가서 적응 못 해서 우는 거 아닌지 몰라.

넌 울보니까!


봄은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처음 만난 계절이잖아. 꽤 특별하지.

처음에 우리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만났을 때 네가 나한테 홀딱 반해서 졸졸 쫓아다녔었던 거 기억나?

그게 어쩌다가 너랑 결혼까지 하게 만들었나 몰라.

아 맞아. 결혼해야 하는 거 알지? 장난으로 말한 게 아니라, 넌 진짜 나랑 약속한 거야.

네가 돌아올 내년 봄까지 내가 준비 끝내놓을 테니까 너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도록 해.

신혼여행도 어디로 갈지 고민해보고.

나는 캐나다도 괜찮은 것 같아.

조금 의미 있지 않아? 네가 간 하니함? 아나함? 뭐시기에도 같이 가보고. 네가 소개해줘.


아, 글씨를 너무 크게 써서 벌써 편지지를 다 썼어.

노락색 편지지, 이제 이거 한 장이 끝인데...

처음엔 많이 샀는데, 글씨가 자꾸 이상하게 써져서 자꾸 꾸겨서 버리느라 이게 마지막이야.

아무튼간에! 답장을 써 줬으면 좋겠어.

손글씨로 답장을 써서 한국에 돌아올 때 가져와 줬으면 해.

같이 펼쳐볼 생각하니까 벌써 들뜬다. 재밌겠어.


이제 겨우 봄이고, 1년이 지나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는데... 벌써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내가 어떻게 1년을 버틸 수 있을까 싶어...

그래도 결혼 준비하면서 열심히 기다려야지. 매일 통화도 하니까!


꼭 답장 써라! 사랑해 고신아. 정말 너무너무 사랑해.


봄의 하람이. 21년 한국에서.



아기자기한 편지지를 가득도 채웠다.

고신은 미소가 지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부족한 부품을 찾으러 공항 오두막의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낡은 녹음기를 찾은 건 바로 어제였다.

고신이 사태 후 공항에 처음 왔을 땐 안에 자*한 시체 두 구가 있었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그것들을 치운 후엔 어쩐지 기분이 찝찝해 내부를 통 둘러보지 않았었다.

그러다 어제 부품을 찾으러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생뚱맞게 작은 휴대용 녹음기를 하나 찾아 나온 것이다.

기록 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녹음 기능은 잘 작동했다.


고신은 편지를 식탁에 내려놓고 어제 찾은 그걸 들어 입에다 가져다 대곤 녹음 버튼을 눌렀다.



고신 : "...미연이에게"



이름을 입에 담았을 뿐인데도 목구멍이 막혀서 다음 말이 쉽게 안 나왔다.

아스라질 것 같이 뼈가 저렸다.



고신 : "답장은 썼었는데..., 편지를 잃어버렸어. 미안해. 근데 알다시피, 요즘 세상 사정이 안 좋으니까... 그러니까 이해하고 용서해줘. 난 여기 잘 적응했어. 취직도 했고, 이웃들이랑도 친해졌어. 고등학교 때의 소심한 고신이 아니니까. 나 울지도 않아. 너랑 연락이 끊기고 나서도 한 번도, 나 한 번도 안 울었어. 진짜야. ....아, 근데 나 지금은 좀 울 것 같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뒤로 한참을 말을 못 했다.

정말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자랑스레 말해놓고 녹음기에 훌쩍이는 소리 같은 걸 낼 순 없었다.



고신 : "...신혼여행으로 캐나다는 싫어. 특히 여기는 더더욱.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어. 아, 차 타고 금방 가는 거리에 바다가 있어. 바다는 아주 멋있어. 어딜 가나 바다는 멋있긴 하지. 신혼여행은, 푸꾸옥. 푸꾸옥으로 가자. 거긴 바다가 여기보다 더 예뻐. 너랑 잘 어울리는 맑은 바다. 거기서 웃고 있는 네가 보고 싶어. ...잘 지내지? 잘 지내야 해, 하람아. 우리 결혼을 해야 신혼여행을 가든 말든 하지. 나 진짜로 돌아갈 수 있어. 진짜, 진짜로..."



말이 또 끊겼다.

하람이 정말 눈앞에 있다고 상상을 해보아도 말은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고신 : "...그냥 자고 싶어. 네 옆에 누워서. 그게 지금 내가 바라는 전부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하람아. ...1월 29일 고신이. 22년 캐나다에서"



급하게 녹음기를 끄고, 고여있던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고신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섰다.

추운 것도, 손이 아픈 것도 잊고 성큼성큼 눈밭을 걸어 활주로 시작 지점에 세워진 꽝꽝 언 비행기로 다가갔다.

한시라도, 일초라도 빨리 완성해야 했다.

하람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거의 완성된 비행기는 꽝꽝 얼어있다.

고신은 삐뚤어진 날개를 왼손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이대론 도저히 잘 날아낼 수가 없다.

다른 한 비행기에서 쓸만한 부품은 모조리 뜯어와 어떻게든 부족한 부품을 채워 넣긴 했지만 비행기를 다뤄본 적이 없는 고신으로선 제대로 작동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삐뚤어진 날개야 뭐, 다른 비행기에서 뜯어오면 되겠지만 내부 부품 하나가 모자란 건 공항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대체재 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착잡한 얼굴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비행기 부품들을 내려다보다가 공구함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 뒤돌아 그대로 활주로에서 빠져나온다.

삐뚤어진 날개부터 처리하려 해도 그 무거운 날개를 혼자서 옮기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며칠째 이 부분에서 더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울분이 나 괜히 눈밭을 발로 걷어찼다.

고신이 일했던 정비소엔 분명 쓸만한 게 있을 테니까, 부품을 정 해결할 수 없다면 마을까지 나가봐야 했다.

좀비가 듣실거리는 마을로.


마을에서 용은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로에 주차되어있던 차들은 전부 빠졌고 이웃집의 차고도 텅 빈 것을 보면 모드 대피소니 안전 구역이니 말이 많은 밴쿠버로 떠난 것 같았다.

애초에 몇 가구 채 없던 마을에 이젠 완전히 고신 혼자인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생각에 잠겨 추운 것도 잊고 눈밭을 천천히 배회했다.

다 낡은 베이지색 털부츠로 괜히 땅을 차고 몇 걸음 천천히 가서 또 차고.

맨손이 붉게 얼어붙고 코 끝이 빨개져 콧물이 나와도 고신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통 없어보였다.



??? : "어? 용이다. 용이야!"



한참을 듣지 못했던 타인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을 때, 고신은 그제야 도망치듯이 실내로 들어갔다.

누구인지 확인도 않고, 마치 사태 첫날 그랬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갔다.

"이봐요! 멈춰요! 좀 도와달라고요!" 외치는 소리에 고신은 더더욱 문에서 물러났다.

어쩐지 좀비 때가 몰려와 문 앞에서 그르르거리는 것보다도 더욱 두려웠다.

당장 눈 앞에 좀비 한 마리가 고신의 팔뚝 살을 뜯어먹기 위해서 그르르 거리고 있다고 상상해보아도 그것보다 두 배는 더 두려웠다.



??? : "이봐요! 안에 있어요?"



문을 쾅쾅 두드렸다.



??? : "제발요. 밴쿠버로 가야 한단 말이에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이런 세상에선 원래 좀비보다 용이 더 무섭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나 당장 저 여자가 문을 따고 들어와서 고신의 복부에 샷건을 발사한다고 생각해봐도 고신은 어쩐지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가 무엇이, 무엇이 이렇게도...



??? : "...저기요?"



하는 목소리에 결국 홧김에 잠금을 풀어버린다.


벌컥 열린 문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건 제 또래의 여자였다.

어찌나 추웠는지 코끝이 붉어져 있었다.



??? : "아, 안녕하세요"


고신 : "들어와요"



어둡다 못해 암울하기까지 한 고신의 낯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여자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는가 싶더니 의외로 순순히 들어오라 권하는 잠긴 목소리에 가볍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조심스레 고신의 거처로 들어왔다.



??? : "...여기 사시나 봐요"



어떠한 말도 없이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고신의 눈치를 슬슬 보더니 여자는 한동안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벽난로에서 손만 녹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각종 공구만 어지럽게 널려있고, 도저히 용이 산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신 : "...어디서 왔어요"


??? : "네?"


고신 : "밴쿠버로 간다매요. 어디서 왔냐고요"


??? : "아, 알렉시스요. 알렉시스 크릭"



고신은 동정 어린 한숨을 푹 쉬었다.



고신 : "반대로 왔어요. 아예 반대로"


??? : "아...."


고신 : "여기서부터 밴쿠버는 500마일이에요. 걸어서 꼬박 한 달"


??? : "..."



여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일련의 한숨을 내쉬더니 아무 말 않았다.

그와 동시에 고신은 이 사람을 집에 들이겠다고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렁이던 공포와 두려움, 무 그런 것들이 동시에 잃어짐을 느꼈다.



고신 : "...충분히 쉬다가요"



고신은 잠시 자리를 피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공구함을 들고는 또 밖으로 나간 것이다.

추위 매서운 것도 잊고 무작정 비행기 앞에 서서 입김이나 몇 번 뿜어내더니 이미 다 제자리를 찾아간 부품들을 만지작 거린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어느샌가 여자도 바깥에 나와 고신이 그러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블랙 : "저는 블랙이에요"


고신 : "..."


블랙 : "어디로 갈 거예요?"


고신 : "...뭐라고요?"


블랙 : "어디로 갈 거냐고요. 마을에 아무도 없는데 비행기만 만지고 있잖아요. 이걸 타고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고신 : "..."



그럴듯하게 만지작거리던 부품들을 놓고 굳은 얼굴로 블랙을 바라봤다.

그러자 스멀스멀 다시 괴로움이 올라왔다.



블랙 : "난 밴쿠버로 가야 해요. 어떻게 마을 차가 한 대도 안 남아있을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이 겨울에 혼자서 걸어갈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저랑 같이,"


고신 : "이봐요"


블랙 : "..."


고신 : "들여보내 줬으면 조용히 떠나. 착각하지 말고"



블랙을 뒤로하고 건물로 걸어가는 길에, 그제야 고신은 똑똑히 깨달았다.

두려웠던 건 블랙의 얼굴에 잔뜩 묻은 열망이었던 것을.

살아가고자 하는, 그런 희망, 그런 바램, 그런 간절.

그러나 그것들이 부러웠던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들이 고신에게까지 옮겨올까봐, 그게 두려웠고 괴로웠던 것이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여름 편지를 꺼내 들었다.

뜨거운 냄새를 맡고 싶었다.



고신에게.


벌써 여름이야! 읽고 있는 너도 여름에 살고 있겠지.

그게 아니면, 가을이나 겨울에 다시 열어보고 있을 수도 있고.

마음이 좀 괜찮아졌어.

우리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도 한 계절을 행복하게 보냈잖아.

시간이 어떻게 갔는 지도 모르겠어.

출근해서도 종일 네 생각을 해.

17시간 느린 너는 아직 자고 있나,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나.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서 어떻게 1년을 보내나 싶었는데 벌써 여름이래.


우리 작년 여름에 바다갔던 거 기억나?

여름이라고 바다에 용 북적북적할 줄 알았는데 네가 용 없는 곳 안다고 데려가 줘서 우리 단둘이서 진짜 재밌게 놀았잖아.

그때 네가 불러줬던 노래 나 아직도 기억해.

제목도 가사도 모르는데, 멜로디랑 네 목소리를 기억해.

내년에 네가 돌아오면, 우리 또 그 해변에 가자. 어쩌면 그때는 결혼했을 수도 있겠어.


네가 떠나고 벌써 한 계절인데 아직도 방에서 네 냄새가 나.

자고 일어나면 네가 옆에 누워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네 옆에 누워서 자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그뿐이야.

...아, 생각하니까 또 보고 싶어졌어.

주소도 아는데 그냥 몰래 찾아가 버릴까 싶어.

편지랍시고 쓴 글에 자꾸 보고 싶다고만 써놓게 될까봐 걱정이네...


답장은 잘 쓰고 있나 몰라.

한국에서는 장마가 왔어.

축축한 건 딱 질색이야.

내가 이런 날씨 싫어하는 거 알잖아.

비가 오는 것도 싫고, 구름이 낀 것도 싫어.

그냥, 그냥 쨍쩅하거나 눈이 오는 게 좋아.

이제 겨우 여름이고 막 장마가 시작됐는데 벌써 눈 내리는 얘기나 하고 있네.

해 쨍쨍하게 뜰 날이나 기다려야겠어.

그럼 보고 싶은 것도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아.

...근데 지금은 비가 와서 그런가. 너무 보고 싶어.

지금 당장 너한테 전화 걸어야겠어.


여름의 하람이, 21년 한국에서.



고신은 당장 벌떡 일어나 녹음기를 꺼내들고 벽난로 앞에 가서 앉아선 급하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고신 : "...하람에게"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몰려오는 손의 떨림을 기다렸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끔찍하게 깊은 늪에 스스로를 밀어넣고 나서야 비로소 고신은 안정을 느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그대로 녹음을 꺼버린다.

블랙이 걸어오고 있는 게 창밖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블랙은 집 안에 들어와서도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냥 고신의 눈치를 봤다.

하루만 묵고 내일은 떠나겠다고 한 블랙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저녁까지 대화가 없었다.

해가 어둑어둑 지고 벽난로 앞에서 졸던 블랙이 일어나 배고프다고 겨우 한마디 하자, 계속 앉아서 멍하니 시간만 낭비하던 고신은 그제야 일어나 블랙에게 음식을 내어주었다.

뭘 먹는 게 오랜만이라며 입속으로 음식을 욱여넣는 블랙을 고신은 빤히 바라만 봤다.



블랙 : "안 먹어요?"


고신 : "난 됐어요"


블랙 : "...아까는 미안해요"


고신 : "..."


블랙 : "뭐 도와줄 일 없어요? 가기 전에 뭐라도 도와줄게요"



계속 말 거는 게 불편해서 아니라고 대충 둘러대고 일어나려 했건만, 하필이면 혼자서는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을 떠올렸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생겨가는 일에 고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고신 : "힘은 좀 잘 써요?"


블랙 : "그럼요"


고신 : "다 먹고 밖으로 나와요. 도울 일이 있으니까"



그러자 블랙은 눈에 띄게 밝아진다.


고신은 자리를 피하고자 벽난로가 있는 방에서 나와 제일 구석에 있는 지하 창고에 들어가서 문을 굳게 잠갔다.

어떠한 난방도 없어 입김이 나왔지만 고신은 아랑곳않고 문 언저리에서 벽에 기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가지고 들어온 편지 한 장과 녹음기를 꺼낸다.


눈을 감고, 뜨겁게 행복했던 지난여름을 떠올려 스스로를 그 편지 속에 또 가둔다.

차가워진 손을 녹이려고 녹음기의 버튼을 급하게 누른다.



고신 : "...밴쿠버로 갈 수도 있어"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마치 누군가 있는 것 마냥 대답할 텀을 줬다.



고신 : "거기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말만 들으면 엄청 큰 생존자 캠프인가봐. 여기서는 꽤 멀어. 500마일이야. 한국에선 킬로미터를 쓰니까..., 800킬로미터 정도 돼. 밖은 춥고, 지형은 험하고... 뿐만 아니라 좀비들도. 밴쿠버로 가려면 힘들 거야. .....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떨리는 왼쪽 눈꺼풀을 애써 손으로 붙잡았다.

점점 힘들어지는 호흡을 막기 위해 고신은 급하게 편지를 펼쳐 그 글자 위에 손을 얹었다.



고신 : "...지금은 겨울이야. 여름에 이거 처음 열어봤을 때가 생각나네. 바다에 갔었던 것도 생각이 나고..."



이미 다 외운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고신 : "...비 오는 날씨를 싫어한다고. 난 이 편지 읽고 처음 알았어. 비가 오면 어쩐지 집에 꼭 눌러 앉아서 영화만 틀어놓고 있더라니,"



말이 끊겼다.

갑자기 목이 턱 막힌 탓이었다.

비 오는, 습했던 여름을 떠올렸다.

오후 늦게야 잠에서 깨어나 대충 끼니를 때우고, 종일 침대에 둘이 꼭 붙어서 영화를 틀어두고 얕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던.



고신 : "나 정말 돌아갈 수 있어. 비행기도 거의 완성이 됐거든. 나 정말로, 정말로 곧 돌아가니까. 잘 지내고 있어야 해, 하람아"



뼈 마디마디를 파고들어 오는 아린 그리움이, 이 그리움이 고신을 만들곤 했었다.

캐나다 공항에 발을 놓는 그 순간부터.

어쩌면 인천 공항에서 배웅하는 하람을 뒤로하고 입국심사대를 지났을 때부터.

어쩌면 하람과 떨어져 캐나다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고신은 쭉 사랑했고, 그래서 쭉 그리웠다.

그러니까 이 정도 그리움은, 이 정도 괴로움은, 이 정도 슬픔, 이 정도 불안.

...아, 버텨내야 할 것이 이만큼이나.


고신은 그 뒤로 한참을 있다가 창고에서 나왔다.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니 그제야 몸이 얼었다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감기에 들었을 것이다.



블랙 : "저 다 먹었어요. 나갈까요?"


고신 : "네. 나와요"


블랙 : "'근데 무슨 일인데 힘 잘 쓰냐고 물어본 거예요?"



겉옷을 챙겨 현관문을 바로 열고 나갔다.



고신 : "비행기 날개를 교체할 거예요"



손가락으로 삐뚤어진 걸 가리키니 꽤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블랙 : "...저 큰걸요?"


고신 : "혼자서는 못하니까요"



낡은 비행기에서 능숙하게 날개를 분해해내는 고신을 멍하니 쳐다본다.

아무래도 궁금한 모양이다.

이걸로 어디에 갈 생각인지.물어보진 않았지만 물어도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고신 : "...뭐해요. 안 도와줘요?"


블랙 : "아"



헌 비행기에서 고신이 수리 중인 비행기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묵직한 고철덩어리를 시린 손으로 감당하자니, 팔이 네 개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랙 : "여기도 눈이 많이 내렸나 봐요. 16일에 눈이 많이 내렸잖아요. 지지난주 목요일"


고신 : "..."


블랙 : "그나저나 이름이 뭐예요?"



그만 귀찮게 하라는 고신의 싸한 눈빛에도 별로 기가 죽지 않았다.



블랙 : "어색한 게 싫어서요"


고신 : "...고신"


블랙 : "고신? 흠... 그럼 외국인.... 인가요? 아, 너무 갑작스럽나?"


고신 : "외국인 맞아요"


블랙 : "오, 저도 외국인인데. 그럼..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서 오셨어요?"


고신 : "한국이요"


블랙 : "아..."



"... 저도요" 뜸 들이더니 겨우 한마디.

어쩐지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았다.

어색한 게 싫다더니, 그 뒤로 분위기를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오히려 블랙이었다.

사연 많은 얼굴이었지만 고신은 뭘 물을 생각이 없었다.

양팔에 전해지는 무게와 시린 팔에 집중할 뿐이었다.



블랙 : "무슨 일이 있어도 밴쿠버로 가야해요"


고신 : "..."


블랙 : "고신 씨가 목숨 걸고 비행기를 만드는 거랑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생각해요"


고신 : "..."



그래도 넌 간절함이 가까운 곳에라도 있지.

대답하지 않았다.



블랙 : "근데 왜 마을에 용이 아무도 없어요?"



이정도는 물어봐도 괜찮겠죠.

표정이 꼭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고신 : "다들 밴쿠버로 간 것 같아요"


블랙 : "...미국도 그렇고, 캐나다도. 각 주의 주도에 생존자 캠프가 모여있대요. 다 같이 연합해서 뭐라도 할 생각인가 봐요. ...아, 콜로라도 빼고"


고신 : "콜로라도?"


블랙 : "네. 거긴 주도도 아닌 웬 작은 마을에 용들이 모여있댔는데, 저도 잘 몰라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날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걸 조립하기만 하고 나면 남은 문제는 그 부품.

그것만 있으면 된다.



고신 : "...당신 마을에 가봤다고 했죠"


블랙 : "그럼요. 그래도 남아있는 용이 있기는 할 줄 알았어요"


고신 : "좀비는요"


블랙 : "좀비? 얼마 없던데요. 왜요?"


고신 : "마을에 나갈 일이 있어서요"


블랙 : "...같이 가줘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 "지금 갈 건 아니죠?"


고신 : "내일 해가 뜨자마자요"


블랙 : "좋아요. 혹시 자전거라도 하나 구한다면 나도 편하겠죠"



블랙은 더 이상 추위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내리는 눈은 겉옷에 쌓이고 손은 얼어붙어 영 움직이질 않았다.

고신은 그렇지도 않은지 바람이 불어도 눈 하나 깜빡 안 한다.

손끝, 얼굴, 귀.

공기와 닿은 살이란 살은 다 빨개져선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블랙 : "춥지 않아요?"


고신 : "먼저 들어가요. 나는 조금만 더 만지다 갈게요"



그렇게 말하는 저 꽁꽁 언 손을 말리고 싶었다.

어쩐지 동정심이 든 탓이었다.

추운데 바깥에서 무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어쩐지 비행기를 고치는 행위 자체를.


그런 충동에 휩싸여서, 블랙은 고신이 날개를 조립하는 걸 지켜보다가 더 버틸 수 없게 됐을 때에야 활주로에서 벗어나 따뜻한 곳으로 들어갔다.

고신은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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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헬카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DEVIL 이랑 CALL만 연재하면 좀 재미 없을 것 같아서.. 단편도 가져와봤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중간중간에 단편집도 들고 올 거니까 많이들 기대해 주세요 :)


바바요!! 다음은 UNDERSEA 2화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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