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멸망해가는 세계의 정취는 무겁고 텁텁하다. 어떤 언어로 정제한 말을 짜 내리더라도 이 정취를 온당히 표현하지 못 하리라. 낮은 태양이 시체를 지지르고, 그 인공 자궁이 잉태한 구더기들이 춤을 춘다. 구더기의 흔들거림에 맞춰 시선을 돌려보는 것도 퍽 좋은 방법이다. 당신이 보고자 하는 게 퍼석한 사람의 속살이라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닐 테다. 당신이 원하는 건 보다 높은 곳에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드높기에 아둔한 족속들은 태양이나 달, 하물며 별을 꼽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원하는 시선은 인간의 것이었다. 드물게도 당신은 몸을 낮추어 땅을 굽어살피기로 했다.
당신의 동공에 들어찬 대지는 온통 잿빛이었다. 당신의 시야가 끝나는 곳에서도 광활한 재의 사막은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당신은 그 사막을 가로지르는 한 기수를 봤다. 기수의 새하얀 말이 그보다 하얀 숨을 내뻗었다. 당신은 본능적으로 그 기수와 시선을 맞추었다. 기수는 남자였으며, 서른에서 불혹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걸린 듯 보였지만, 얼굴에 달라붙은 잿가루가 시간을 흩어놓아 분명치는 못했다.
남자는 달리는 말 위에서 숨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화살이 폐를 관통해 연신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말의 두터운 몸에 땀방울이 하나씩 늘어났다. 그렇게 미끄러진 땀과 피가 잿빛 사막을 적시면, 글쎄. 그 안에서 불경스런 무언가가 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은 남자의 추격전이 그렇게 오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의 추격자는 어설프지만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였다.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아주 천천히, 사냥감이 자신의 묫자리를 찾아가기를 기다릴 줄 아는 이였다. 남자는 이제 최후 통접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 즉,
이제 당신의 차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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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반 신성교구의 차석 이단심문관 발시아는 말의 허구리를 지긋이 눌러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말이 불만스럽다는둣 연신 투래질 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달래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재의 사막. 18마경중 하나이자 온 수사들의 금역에 발을 들인 이유가 눈 앞에 멈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코드와 검은 중산모를 둘러 온통 새까만 남자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 봤다.
왕을 죽이고, 왕비를 태우고 대주교의 머리를 잘라 오물에 처박고.... 그보다 전엔, 그녀는 남자의 죄목을 하나하나 꼽아보다 곧 그만두기로 했다. 죄가 무겁던 가볍던 이단심문관이 내릴 수 있는 판결은 하나 뿐이었다. 잿가루가 묻어 거무튀튀한 남자의 얼굴에서 발시아는 끝을 보았다. 그게 어느쪽인지 적어도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발시아는 남자를 계속 주시하며 빠르게 하마했다. 남자는 가만히 지겨보았다. 그의 주위로 새하얀 말 하나가 빙빙 돌았다. 온통 검은 주인과 묘한 대위법을 이뤘다. 그녀는 손을 들어 제 말을 물리고 남자의 복부를 흘겼다. 검은 코트에 팬대보다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가 흐른 흔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한 거죠?"
"뭘?"
"화살 말이에요. 쉽게 뽑힐 물건은 아니란말이죠."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그에게 박힌 화살은 쉽게 뽑을 수 없는게 아니라 그냥 뽑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맞은 이가 온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영원한 고통을 내리는 교단의 신물이었다.
"그게 중요한가?"
"아니죠. 다행스럽게도."
"그래."
남자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발시아는 도래한 끝이 자신의 것이라는걸 비로서 온당히 이해했다. 자신의 떨어진 목과 새어나온 피가 남자의 새 이야기를 적어내릴 잉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쉽게는 안 될거야. 피는 피로밖에 샘하지 못한다. 오랜 격언이었다.
발시아는 칼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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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졸업한 글쟁입니다. 솔직히 졸업보다 동아리 부장 넘기는게 더 뭉클했습니다. 1학년 짜바리들이 모여서 만든 동아리가 졸업할 때 부원 30명이 넘어가는 중소 동아리가 된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네요. 대학도 가고싶은데 붙었고 이세계 가는 날도 좀 남았으니 글이나 더 써 보고 싶네요. 자주 뵈요! 읽어주셔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