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화 분량 길어유....
시간 나실 때 보십샤
블랙은 침대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몸을 떨었다.
방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블랙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맞은편에 앉은 하람과 그 옆에 선 데빌을 보며 블랙은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아침부터 초인종 소리가 나 눈을 떴다.
문을 열자 마자 먼저 보인 것은 데빌이었다.
평소와 조금 달랐다.
머리에 중절모를 쓴 데빌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 스타일 변화는 뭐냐고 물으려는데, 존재감이 너무도 강한 여자가 데빌의 뒤에서 나타났다.
환했다.
껍데기 같은 미소였다.
탑배우 A를 닮은 그 여자는 집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누구인지 물을 새도 없었다.
어마무시한 미모와 얼굴 뒤에서 은은히 비치는 후광이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
에이 설마, 블랙은 아닐 거라 믿으며 데빌과 여자를 집으로 들였다.
여자는 좁은 집을 보고도 한숨 한 번 내수지 않았다.
여자가 자연스럽게 침대에 앉았다.
블랙이 우물쭈물 거리자, 데빌이 블랙을 의자에 앉혔다.
데빌이 헛기침을 하자 여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고 하람이라 불러도 된다며 자신은 신이라는 말을 아무렇잖게 했다.
나는 고양이가 아니고 용이야. 내 이름은 000야, 라고 말할 때나 쓰는 어조였다.
그만큼 그 소개가 당연하다는 듯 굴었고,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 갔다.
블랙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이 핑글 돌았다.
블랙 : "어... 차라도 드릴까요?"
하람 : "돌아가서도 실컷 먹을 수 있으니 됐어"
블랙 : "네"
숨 막히도록 어색했다.
천하의 데빌마저 하람의 눈치를 봤다.
블랙은 그 모습이 낯설었지만 한 편으로는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람만이 홀로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긴장한 블랙이 책상 위에 놓여있던 주스 병을 들어 입에 한 모금 가져다댔다.
하람 : "그냥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왔는데"
블랙 : "아, 넵. 네. 뭐든 얘기하세요"
하람 : "데빌이 사랑그러워 미치겠니?"
블랙 : "풉-"
블랙이 입에 머금고 있던 주스를 뿜었다.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주스는 하람에게 튀지 않고 바닥에 흩뿌려졌다.
하람이 고개 한 번 까딱하자 데빌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이 깨끗해졌다.
블랙이 급하게 티슈를 뽑아 턱을 닦았다.
블랙 : "죄, 죄, 죄송합니다"
하람 : "됐어. 너 진짜 웃긴 것 같다. 그래서?"
블랙 : "어, 미친...건 아닌 것 같고요?"
블랙이 고개를 돌려 데빌의 눈치를 봤다.
데빌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데빌 또한 이 상황에 놓인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느라 바빠 보였다.
블랙 : "미치겠는 것도...아닌 것 같고요? 사랑스러운지는 모르겠는데. 좀 그거랑 거리가 먼 착장 아닌가 싶고요?"
그 말에 하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데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까지 하며 비웃었다.
데빌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 : "사랑하기는 해요"
하람을 노려보던 데빌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람은 새삼스럽다며 데빌을 한 번 더 비웃었다.
블랙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무릎만 달달 떨어댔다.
하람 : "그래, 그래. 귀엽네. 데빌도 널 진짜 사랑하는 것 같더라?"
블랙 : "진짜요?"
블랙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해변가에 처음 놀러간 대형견처럼 눈을 빛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는 눈.
하람은 입 꼬리만 올려 웃은 다음, 턱에 한 손을 괴었다.
하람은 저 자세를 하고난 뒤면 매번 진지해졌다.
그걸 아는 데빌이 제지하려는데 하람 쪽이 훨씬 빨랐다.
하람 : "데빌아, 모자 벗어"
데빌 : "별로 필요 없잖아요"
하람 : "솔직하게 모든 걸 까고 시작해야지, 안 그래?"
데빌이 입을 닫았다.
고민 끝에 모자를 벗었다.
데빌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하람은 잘 보이지 않는 걸 보더니,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데빌은 이럴 것까지는 없다며 설득 시키려 했다.
하람은 들어주지 않았다.
블랙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두 용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하람 : "데빌"
그 말 한 마디에 자포자기한 데빌이 모습을 원래 모습대로 바꿨다.
두통을 느낀 데빌이 미간을 찌푸렸다.
희미하고 잘 보이지 않았다.
블랙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빌이 주춤대며 뒷걸음질 쳤지만 딱히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방 자체가 넓지도 않고.
하람이 데빌을 똑바로 응시했다.
데빌은 이제 더 이상은 감출 수 없었다.
머리 쪽을 보자 뿔이 있었던 자리가 보였다.
나무를 베어낸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땅에 박혀있던 묘목을 뜯어 뽑아버린 것 같은 자국이 있었다.
그 사이 사이마다 달라붙은 피딱지, 그리고 닦아내려 애쓴 흔적까지 함께였다.
블랙 : "이게 뭐예요?"
하람 : "데빌이 널 정말 사랑하더라. 옛날 아주 오래전 이후로 뭐 이런... 이런 걸 공양마냥 받아본 건 처음이거든?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어 짜증났는데, 의미 있는 것 같아서 뿔은 내 방 벽에 걸어놨어"
블랙이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이 들어가다 못해 주체를 못 했다.
데빌이 손을 급하게 뻗어 떨리는 블랙의 손을 잡았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블랙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데빌을 한 번 노려봤다.
데빌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어디 있냐고 소리를 지르려던 블랙은 그 말을 겨우겨우 참아냈다.
'어'까지 입 밖으로 뱉었지만 그럼에도 참아냈다.
블랙은 사랑하는 용이 다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용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그 이유가 설령 본인을 위한 거라 해도.
나를 위한 거라면 더욱 질색이지, 내가 폐 안 끼치려고 얼마나 애쓰며 살았는데.
블랙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을 하고, 하람을 쳐다봤다.
블랙 : "그래서 하실 얘기가 뭔데요"
하람 : "너의 그런 점도 내가 만들어줬지. 웬만한 일에는 꺾이지 않는 의지. 그거라도 네 팔자에는 있어야만 하니까. 마음에 드네"
블랙 : "제가 인내심은 별로 없거든요"
하람 : "사실 나도 지금 엉망진창인 이 상황이 짜증났거든? 그래서 좀 홧김에 내려온 것도 있는데. 오늘 아침 되니까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
하람이 데빌을 가리켰다.
하람 : "내가 이런 경우를 처음 봐서 말이야. 쟤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나도 뭐 관용 정도는 베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제안 하나 해주려고.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훌륭한 제안이야. 어때, 들어볼래?"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들으면 어쩔 건데요, 라고 데빌이 중얼거렸다.
하람이 네 입은 언제 막히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예민해진 블랙이 데빌 한 번 쳐다보자, 데빌이 입을 닫았다.
놀란 하람이 아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막으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블랙이 빨리 말해보라며 고갯짓으로 하람을 재촉해싿.
하람이 기지게 한 번 편 다음 제안을 시작했다.
하람 : "기억이랑 감정을 지워줄게.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여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 아, 특별히 그 동안을 보상해서 3개월 더 붙여줄게. 그럼 1년 3개월인가? 데빌이랑 있었던 일은 전부 뭉뚱그려 기억하는 거야. 사랑하는 감정도 지워줄게. 데빌은ㅇ 이 일을 반성과 교훈으로 삼을 테니, 기억도 감정도 없는 너한테 사무적으로 잘 대하겠지? 그렇지?"
하람이 데빌을 올려다봤다.
데빌은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람 : "그러면 무탈하게 계약 끝나는 거야. 어때, 쾌적하지 않아?"
하람이 생글생글 웃었다.
하람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훌륭한 제안이었다.
굳이 손해 보는 용이 있다면 데빌일까 싶지만 데빌은 이제 이 이상의 제안을 할 용기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정도 제안이라니, 하람은 아주 많이 양보해줬다.
데빌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블랙이 남은 팔자를 사는 게 확정이라면 이게 가장 행복한 길 아닐까.
자신을 만나서 겪었던 모든 일을 잊는다면 블랙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약해진 데빌의 마음 사이로 그런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데빌은 합리적으로 봤을 때, 블랙이 이 선택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기억이야 어차피 없어질 거고 그러면 우리 서로 미안해할 일도 없을 테니까.
데빌은 블랙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블랙은 하람의 제안을 듣는 동안 분노가 가라앉았는지 꽉 쥐고 있던 손을 편 채였다.
블랙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한참을 그랬다.
블랙 : "아니요,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요"
데빌은 놀라 블랙을 쳐다봤다.
하람은 화내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 말이 나올 경우도 생각해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 "그런 제안 필요 없습니다"
하람 : "정말로?"
블랙 : "네"
하람 : "내가 인심 썼다. 이거 보여줄게"
하람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블랙의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다.
눈 감응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다정하게 꾸며내었지만 명령조였고, 위압감도 조금 느껴졌다.
블랙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데빌은 하람이 뭘 보여주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보인도 교육 듣던 시절 주로 봤던 거였다.
과도한 간섭을 할 경우 그 용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같은 것들.
눈을 감은 블랙의 시야에 라디오 주파수 맞추듯 이미지가 잡혔다.
블랙이 보는 건 블랙의 모습이었다.
계약이 끝난 뒤의 모습이라고 하람이 말했다.
그 순간부터 블랙의 머릿속은 미래의 블랙이 생각하는 것들로 가득 찼다.
미래의 블랙은 계약이 끝나고 일주일간은 별 탈 없이 지냈다.
예전처럼 찾아오는 불행이 고되기는 해도 놀랍지 않았다.
무리 없이 지내며 가끔 데빌 생각을 했다.
잘 버텨서 자연사 하면 데빌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살았다.
하람이 '이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면 어떨까' 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빠른 속도로 시간이 를러갔다.
미래의 브랙은 시간이 흐를 수록 괴로워했다.
기다림은 길어졌고 용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람은 미래의 블랙이 1년을 버티는 모습을 보여준 뒤, 속도를 더 빨리해 2년을 버티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블랙은 이미 미래의 자신에 이입한 상태였다.
감긴 눈에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데빌이 그만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하람의 어개에 손을 얹었다.
하람이 데빌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람 : "필요해서 하는 거야. 누차 말하지만 다 까놓고 시작해야지"
데빌은 아침에 블랙의 집을 가는 길에 하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딱히 널 미워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블랙을 미워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라고.
데빌도 안다고 했다.
네가 뭘 알아, 라며 짜증내는 하람을 데리고 블랙의 집 초인종을 누른 게 이겅났다.
하람 : "자"
하람이 블랙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하람이 다시 침대에 앉는 동안 블랙이 눈을 떴다.
혼란스러워 하는 눈동자를 데빌은 가만히 쳐다봤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 모든 일들이 견디는 일이었다.
모든 시간들이 죄다 견디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불확실하고 끔찍한 미래가 다가오는 것을 견디는 시간.
하람 : "이게 5년이 되고, 10년이 된다고 생각해 봐. 나는 일부러 빠르게 보여줬으니까, 실제로는 더 느릴 거야. 너 나이가 스물 몇이지? 정말 길게 산다고 생각해봐. 이런 식으로 80년을 보낼래? 계속 한 용 기다리면서 보낼 거야? 그냥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80년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희망 같은 거 가지지 마, 블랙. 그거 수시로 널 힘들게 할거야"
하람이 웃으며 블랙을 쳐다봤다.
하람 : "네가 제일 잘 알잖니"
블랙이 피식 웃었다.
데빌은 이제 블랙의 표정을 견디는 일도 이 말도 안 되게 지루하고 끔찍한 시간을 견디는 일도 싫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희망은 없었다.
대신 눈 앞에 최선이 있었다.
최선을 고를 수는 있었다.
네가 다 잊어버려도 난 영원히 널 사랑할 거라는 사실만이 그 끝에 남을 것이다.
그게 데빌의 마음 속 마지막 위안이 되었다.
데빌이 블랙을 내려다봤다.
데빌 : "그냥 골라, 블랙아"
블랙이 데빌을 올려다봤다.
데빌 : "골라. 제발 골라. 이제 안 돼"
데빌은 냉정한 어조로 말하려 애썼다.
그렇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알 수 있었다.
최대한 온도를 빼고 말하는 저 용의 말에 항상 따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블랙은 알고 있으니까.
블랙은 데빌의 머리를 쳐다봤다.
데빌의 머리에 흉터가 보였다.
블랙은 망설였다.
하람의 말대로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될지 훤히 보였다.
그렇지만 이게 맞는 걸까? 블랙은 데빌을 올려다봤다.
데빌 : "이게 내가 겨우 얻어낸 최선이야"
그럴지도 모른다.
데빌은 블랙이 항상 행복하기를 바랄테니까.
블랙이 데빌을 믿는 만큼 데빌도 블랙을 믿는, 그 두개의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하람은 고민하는 블랙이 답답했는지 데빌의 머리를 가리켰다.
하람 : "저걸 두 개나 뜯었잖아. 말 들어줘. 쟤 말이 맞아, 이게 최선이야"
블랙은 잠시 생각했다.
생각들이 머릿속을 마구 떠다녔다.
거세게 흐르는 생각 속에서 블랙은 단 하나의 질문을 건져 올렸다.
생각의 물속에서 건진 질문은 축축했고, 죽기 전 생물의 눈동자처럼 날이 서있엇다.
그 날이 선 눈동자는 곧 블랙의 것이 되었다.
블랙 : "질문 한 개만 더 해도 될까요"
하람 : "얼마든지"
블랙 : "뿔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무슨 기준으로 자라는 거죠?"
하람이 데빌을 쳐다봤다.
데빌이 말해준 적 없다고 했다.
하람이 공평하지 않다고 중얼거렸다.
하람 : "내 밑에서 일하는 용들은 성실히 일하며 성과와 기간에 따라, 음, 퇴직할 수 있어. 그리고 내 옆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게 훨씬 편하거든. 보상 같은 거야. 저 뿔은 악마들의 증거야"
블랙 : "증거요?"
하람 : "얼마나 열심히 오래 일했는지"
블랙 : "그럼..."
하람 : "데빌은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자, 이제 네 선택의 경중이 더 무거워졌다는 거 알겠지?"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빌이 이제 다 됐다고 생각했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원하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사실, 블랙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충분한 마음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데빌씨가 내 행복을 늘 바라는 마음만으로 충분한 걸까.
블랙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만히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블랙 또한 데빌이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데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충분하니까.
블랙은 데빌을 올려다봤다.
자신을 보며 여전히 따뜻하게 웃는 저 용을 내버려두고 어떻게 그딴 선택을 할 수가 있지?
한 순간이나마 하람의 제안이 최선이라 믿고 선택하려 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 제안 어디에도 데빌의 행복은 없었다.
그럼 데빌씨가 얻는 건 뭐야?
하람 : "블랙, 마음 정했니?"
기억도 없는 나랑 1년 3개월을 다시 보내야 하는 데빌씨는 얻는 게 뭐야. 내가 그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걸로 충분해?
블랙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인 뒤, 입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딴 걸로 내가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이 말이지.
블랙은 숨을 한 번 크게 뱉었다.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아무도 빌어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면, 데빌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용은 자신 밖에 없었다.
블랙 : "세로운 제안을 해도 될까요?"
하람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데빌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빌은 블랙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막고 싶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닐 것 같았다.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블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걸로 아랑곳하기에는 지금 너무나도 화가 난 상태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