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S.S
[ Love Leaves Strong Scent ]
코 끝에 붉게 꽃이 피었다. 시린 주먹은 꽉 쥐고, 파틴은 괜히 입김만을 후 내뱉는다. 숨을 내쉴 뿐인데 담배 연기와 구분이 잘 되질 않았다.
긴 시간 쉼 한 번 없이 걸으면서도 동기를 물었다. 어디선가 불안한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 발을 재촉하여 꽁꽁 언 발걸음을 서둘러 옮기고 있었을 뿐. 겨울의 짧은 해가 마침내 자취를 감추면 그제야 파틴은 걸음을 멈춘다.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곤 벽에 기대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하얀 연기가 공중으로 무의미하게 퍼진다.
마카라는 떠났다. 또 보자는 마지막 인사와 희미한 미소로 냉정하게. 그에 파틴은 기꺼이 떠나라며 고이 간직하던 총 한 자루마저 그의 손에 쥐여주고 만 것이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등지고 곧 파틴도 걷기 시작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얄팍한 자존심이었다.
그가 그 흔한 같이 가자, 혹은 그런 비스름한 것 말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갔기 때문에 걸어가는 내내 마음은 분했다.
괘씸한 것.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그 미소가 너무 미웠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면 발걸음은 좀 가벼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파틴은 매 걸음을 억지로 떼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는 별안간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아무도 없을 것을 뻔히 알고도 몇 번이나.
마카라는 갔어. 진짜로 갔어.
그렇게 되뇌었다.
이정표는 어느 마을이 다가옴을 알리고, 그제야 파틴은 발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장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을의 이름을 확인한다. 좀비로부터의 생존자 캠프는 보통 주도에 위치하기 마련이고, 파틴이 덴버에선 떠나온 지는 이미 오래다. 떠난 사이 덴버에 세워졌을 것이라 생각한 캠프가 이런 산골짜기 한 가운데에 있을 것 같진 않았으므로. 이정표로 시선을 옮겼다.
실버손. 아, 그러고 보면 언젠가,
'실버손 이라는 곳 있잖아. 네 갈래 고속도로가 만나고 식수가 충분해서 거기에 캠프가 있을지도 모른다더라.'
분명 마카라가 그런 말을 했었다.
파틴은 장벽으로 나아갔다. 지키는 용이 소총을 들고 서 있었기에 양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잔뜩 긴장하여 식은 땀이 흘렀으나 정작 그들은 파틴의 감염 여부만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환영한다는 말 같은 것이나 덧붙이는 것 이었다. 어렵지 않게 장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나가는 길이었지만 파틴은 원한다면 거기에 정착할 수 있었다. 장벽 안쪽엔 외부 생존자가 머무르는 캠프가 모여있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기존 주민의 주택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호의적이었으며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덴버 대학교를 다닐 시절, 그러니까 좀비 사태 이전에, 같은 기숙사에 살던 룸메이트 데빌도 거기에 있었다. 주택가의 어느 나무 집을 차지하고 있던 데빌은 웃었다.
데빌 : "아빠가 이런 시골 산골짜기에 별장을 짓는다기에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데. 캠프에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
그런 말을 했다.
데빌은 파틴을 두 팔 벌려 반기며 쉴 곳을 내주었다. 원한다면 줄곧 머물러도 된다며 따뜻한 차를 내놓기도 했다.
콜로라도의 매서운 겨울은 정말 매섭기 그지없다. 이런 고산 지대라면 더욱이. 몸이 포근한 이불에 녹으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몸이 누근했다.
.....마카라, 페어플레이로 간다고 했는데.
가족을 찾아 집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페어플레이까지는 걸어서 한참인데. 밖에서 혼자 춥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복잡해져 머리를 헝클었다. 그에 대한 생각의 실이 엉켜서 풀리질 않았다.
마카라와는 일이 터지고 3개월 후, 그러니까 작년 10월에 처음 만났다. 걸어 다니는 썩은 시체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겁도 없이 나서서 제 손을 붙잡고 뛰어가던 마카라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카라 : "야 괜찮아!? 뭐해, 정신 차리고 얼른 뛰어!!"
그렇게나 급박한 상황에서 파틴이 느꼈던 것은 공포나 괴로움 같은 게 아닌, 잡아끄는 손의 온기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7명 남짓하던 마카라의 작은 생존자 그룹은 꽤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였는데, 파틴은 그런 분위기에 통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망해가는 상황이 그들에겐 유쾌했을지 몰라도 파틴은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럼에도 그들의 그런 긍정인 분위기가 파틴에게 어딘가 나쁘지 않은 영향을 분명 주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 그룹도 하나둘씩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등의 이유로 떠나가고, 마카라와 둘만 남았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다들 웃을 수 있었던 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마카라 : "나는, 팝. 다들 그렇게 불러. 나는 원래 댄스부였는데 댄스 기본동작 중에 팝 이라고 있는 걸 제일 적절하게, 잘 사용했었거든. 근게 그렇다고 왜 내가 팝 이라고 불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부르더라. 너는?"
파틴 : "...나는, 팥.. 음식 팥도 있고 내 이름을 줄여서 팥이라고도 하고..."
마카라 : "팥? 뭐야, 헷갈리잖아, 내 별명이랑."
마카라 : "마카라야. 마카라. 헷갈리니까 그냥 마카라라고 불러."
말하는 미소가 참 예뻤다.
그렇게 남겨진 두 용은 매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잠은 폐건물에서 청하고, 결국은 함께 새해를 맞았다. 파틴은 괜찮았다. 목적지 하나 없이 떠돌면서 크게 괴롭진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먼저 깨는 쪽은 보통 마카라였고, 그의 겉옷은 항상 파틴의 위에 덮여져 있었다. 악몽을 꾸어 먼저 잠에서 깬 날엔 파틴도 마카라를 따라서 겉옷을 덮여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카라는 금방 눈을 뜨곤,
마카라 : "뭐하냐. 안 추워?"
푸스스 웃었다.
마카라 : "따듯하다. 고마워."
예쁘게 접히는 눈가. 그러곤 다시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마카라도 이젠 떠나버렸다. 그렇게나 아름답게 웃을 수 있던 마카라였는데 떠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어딘가 그만큼 아름다운 돌아갈 곳이 있었을 테니까.
갈 곳도 없었는데. 그냥 따라갈 걸. 바보같긴...
한숨을 쉬고 돌아누웠다. 습관처럼 몸을 둥글게 말다가, 의식하여 다시 꼿꼿이 편다.
마카라는 어디 쯤일까. 어디서 밤을 보내며, 어떻게 누워있을까. 덮어줄 이 없는 겉옷을 꼭 입고 이전보다 더욱 따뜻하게 밤을 보내고 있을까.
생각을 이으니 짜증이 나 한숨을 크게 내쉰다.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틴은 실버손에서 두 번의 아침을 맞았다. 두 번째 아침엔 이미 떠날 채비가 되어있었다.
데빌 : "마카라라는 애 찾으러 가는 거야, 결국?"
데빌의 물음에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가방을 챙겨 이른 아침에 실버손을 나와 그대로 페어플레이로 향했다.
잠이 오지 않아도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페어플레이에 도착할 것이다.
가족들이랑 있겠지. 편안하고 따듯하게.
벽과 닿아있는 등허리가 시리다. 따뜻함을 맛보고 나니 추위가 싫었다. 이를 꽉 물었다.
파틴의 가족들은 모두 타국에 있었고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대학 친구 몇밖에 없었던 파틴은 그룹원들이 한 명 한 명 집으로 가겠다고 떠날 때, 나도 돌아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다를 헤엄쳐 대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걸어가던 마카라는 잠시 멈추어섰지만 금방 다시 움직였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떠날 거라면 그렇게 끝까지 남아있지나 말 것이지. 왜 내 곁을 지켰던 거야. 동정하는 거야 뭐야.
떠나던 날은 웃어주지 못했다. 무엇이 그리운지는 모르겠다.
그렇게나 미워서 떠나보냈다면 미련은 남지 않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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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IL 입니다~~ 야호~!
CALL 이나 DEVIL로 온게 아닌 L.L.S.S라는 새 작품으로 온 이유는...
원래 이 작품이 저희 웹툰 합작 작품이었는데 아쉽게도 다들 바쁘셔서 무산됐었던 합작을 소설로나마 내본 겁니다!
제 작품을 좀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작품도 당연히... 새드앤딩입니다.
이 작품은 음.. 단편집 같은 개념인데 ep1 에서는 파틴과 마카라의 이야기가, ep2 에서는 하람과 고신의 이야기가, ep3 에서는 블랙과 데빌의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아무튼 많이들 기대 해주셔요!! :D
모처럼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