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칸력 612년 (6년 후)
제 67대 루키 드래곤 테이머 대회.
텐파 지역 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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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 해만이다.
테이머에게 레이스 시작 직전의 가슴뛰는 긴장감은 가히 인생 최고의 격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모든 신경이 눈앞에 집중된다.
파트너 드래곤과 하나가 되어, 한 치의 움직임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극한의 경쟁에 대비한다.
셋, 둘, 하나.
출발.
좌측의 식스 레그 혼 드래곤.
엄청난 초반 가속도로 치고 나간다.
하지만 나의 경쟁자는 아니다.
땅 위의 달리기에 의존하는 식스 레그 혼은 레이스 후반부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첫 번째 장애물 코스에 진입하자, 앞의 블루라이트닝이 눈에 띈다.
스킬을 쓰면 짧은 버스트로 번개처럼 이동할 수 있다.
링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게 인상깊다.
하지만 그뿐이다.
세 번째 장애물 코스.
벌써 대부분의 경쟁자들은 뒤처지거나, 탈락한 이들도 다수 발생했다.
"역대 최단 시간! 이카루스 선수!"
아까부터 매 구간을 진입할 때마다 들리는 중계자의 음성이다.
이미 전생에 이 코스로 지역 예선을 합격했던 터라 길을 다 알고 있는 덕분이다.
"이럴수가! 모두의 예상을 깨부순 이카루스 선수가, 텐파 지역 루키 대회 예선에서 역대 최단 시간으로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칸다르 선수와 파라오곤, 모두가 예견했던 승자는 2등으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1, 2등 사이의 압도적인 격차인데요..!"
"잘 했어, 지브롤터. 레이스는 쉬울 걸 예상했잖아."
"콜로세움은 조금 더 까다롭지."
드래곤 테이머 대회의 두 번째 심사.
콜로세움 대전이다.
남은 8명의 선수가 토너먼트 형식으로 대전을 하며 결승까지 올라간다.
'눈여겨 볼만한 경쟁자는 총 세 명이 있군.'
파라오곤, 청룡, 그리고 윙스 드래곤.
'파라오곤은 빛 속성이라 내가 상성이 좋긴 한데..'
희귀종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스킬의 수혜를 받은 강력한 전투종.
직접 전투하는 걸 본 적이 몇 번 없기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일차원적으로는 청룡과 윙스 드래곤이 바람 속성이므로 땅 속성인 지브롤터가 상성에서 밀리지만,
'겨우 이 정도에 고전할 정도였으면 전생에 본선까지 진출하지 못했겠지.'
단상 앞에 선 사내가 종이 표들을 순서대로 뽑아 대진표를 완성한다.
"자, 추첨이 끝났는데요, 어디 한 번 볼까요!"
"토니와 블루라이트닝, 그리고 얀과 지하땅굴 드래곤!"
"토니 선수, 상성이 불리하군요."
"어떻게 극복해 내는지, 아니면 얀 선수가 4강으로 진출할지! 눈여겨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이카루스와 바위 드래곤, 그리고 찰리와 청룡!"
"아~ 이카루스 선수, 상성이 불리한데요..."
"레이스에서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콜로세움 전투는 진행 방식이 간단하다.
열린 공간의 경기장에서 테이머와 드래곤의 자유로운 대결.
모든 스킬과 공격이 허용되고, 한 쪽 드래곤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기권을 하면 승패가 결정된다.
'자기 드래곤이 전투불능이 될 때가지 내버려 두는 테이머는 거의 없지만.'
또한, 드래곤이 상대 테이머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된 처벌 사항이다.
'과거에 사고가 나서 이런 상식이 규정화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나저나, 가젯은 뭘 챙기지?'
테이머는 총 3개의 가젯을 갖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드래곤과 싸운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잘만 활용하면 전투를 보조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간혹 테이머끼리 공격을 해서 승패가 갈리는 경우도 있다.
'나 때는 연막탄, 일회용 실드정도가 다였는데, 이제는 꽤나 효과적인 무기도 존재하니.'
대회의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인 건 맞다.
전투 시작 직전.
콜로세움에 입장한다.
가장 통상적으로 "콜로세움"이라고 불리는 곳은 엘피스의 거대한 전투 전장이지만, 지역 예선에서는 주로 모의로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환경을 재주껏 이용하는 것도 테이머의 재량이다.
"자, 라인업이 공개됩니다!"
"15살의 이카루스 선수, 그리고 20레벨의 지브롤터!"
"특이하게 연막탄 두 개, 그리고 일회용 실드를 들고 참전합니다!"
전생에 애용하던 조합이다.
연막탄은 지브롤터의 스킬과 함께 활용도가 좋다.
"연막탄이라..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군요!"
게다가, 약간의 비밀도 있으니.
"17살의 찰리 선수, 그리고 21레벨의 청룡!"
"아, 정석적인 조합을 들고 왔군요. 실드, 마력 충전기, 그리고 치료제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찰리 선수가 유리해 보이는데요, 그렇지만 레이스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카루스 선수인 만큼!"
"반전이 하나쯤은 숨어있다고 기대해 봅니다."
베팅도 극명하게 갈렸다.
1:7, 청룡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언더독은 익숙하다.
시작.
8강에서의 전략은 속전속결이다.
전력을 노출했다가는 다음 상대에게 파악당할 수 있다.
'사실 난 본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지역 예선은 결승에서도 수를 숨길 계획이지만.'
청룡의 여의주가 영롱한 노란 빛을 내며 에너지를 방출한다.
재앵 —
여의주에서 번개가 나오지만, 지브롤터는 이미 회피하여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다.
'여의주의 마력을 한 번 방출하면 다시 모이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텐데.'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텐파 지역이라 그런지 아직 미숙한 테이머가 많다.
'지금이다.'
연막탄을 드래곤들 쪽으로 투척한다.
치이익-
빠른 속도로 연기가 뿜어져나오며 작은 구역에 구름이 생성된다.
드래곤들은 연기에 삼켜져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면 난전이 펼쳐질 텐데요!"
"두 드래곤 모두 시야가 차단됐습니다!"
'내가 연막탄을 들고온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어둠 속에서 충분한 트레이닝을 거친 지브롤터는 청각과 다른 감각만으로도 상대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지브롤터! 지금!"
쩌적- 쩌저적-
땅바닥이 뜯기고 암성이 뭉쳐지는 소리가 들린다.
상대는 다급하게 마력 충전기를 청룡에게 사용하지만,
'이미 한참 늦었지.'
눈에 보이지 않는 청룡은 번개를 사방으로 무기력하게 발산하고, 연막 한복판에 거대한 바위 장벽이 세워지는 것이 보인다.
"연기를 뚫고 나온 바위 장벽!"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쿠웅.
장벽이 청룡을 향해 쓰러지며 흙먼지를 날린다.
"기권할게요! 청룡!"
상대 선수는 장벽이 생성되었을 때부터 이미 달려가 치료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긴장감이 풀리자 관중은 함성으로 응답한다.
"아.. 청룡의 시야가 가려져서 완전히 무력화됐군요!"
"청룡이 바위.. 드래곤한테 패배합니다."
"찰리 선수, 이런 변수를 전혀 계산하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방심만 하지 않았어도.."
"이카루스 선수는 운이 좋게 4강으로 진출합니다!"
'하, 여전하긴 여전하네.'
모두가 저렇게 말한다.
이기기 전에는, 가망이 없다. 불가능하다.
이기고 난 후에는 상대가 방심했다, 운이 좋았다.
누구도 결과 뒤의 것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암흑 속에서 수백 번도 더 부딪히고 넘어진 끝없는 노력.
스킬을 연마한 수백 시간은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위 드래곤"이라는 종이 모든 한계를 정의해 버리고, 만약 그들의 예상을 깨는 결과가 나오면 "주제에 운이 좋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테이머 대회를 우승하려는 이유.'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 된다고 꿈꾸는 이들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4강에서도 베팅은 극명하게 갈린다.
또다시 가벼운 승리를 거두자 비슷한 말이 나온다.
'결승에선 안 되겠지.'
"자, 여러분! 이제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텐파 지역 10 희귀종 중 하나인 칸다르 선수의 파라오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승까지 진출한 이카루스 선수의 바위 드래곤!"
"이들이 결승에서 격돌합니다!"
"이번 승패로 인해 본선 진출 여부가 결정될 확률이 높은데요!"
"1라운드 레이스에서 각각 1, 2등을 한 이카루스와 칸다르 선수입니다!"
결승에서는 압도적인 차이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세 번째 심사가 "심사원 판정"이기 때문.
8강을 진출한 테이머들이 레이스와 콜로세움에서 보여준 면모를 고려하여, 승패와 같은 결과뿐만 아니라 기타 기술적인 요소를 고려하는 절차이다.
적어도 드래곤 테이머 협회가 직접 주관하는 본선에서는 그렇다.
이런 지역 예선에서는 심사 위원들이 개인적 취향에 따라 점수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상대는 희귀종 파라오곤이니까 높은 점수를 받을 게 뻔하지.'
따라서 이번 전투에서는 확실한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시작.
파라오곤은 연막탄을 경계하여 접근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는 연막탄만 세 개를 가지고 왔지.'
파라오곤이 원거리에서 주특기인 마법 공격을 시도한다.
많은 드래곤들이 마법에 휘둘려 정신을 잃게 만든 마법이다.
'최면 효과 비슷한 것 같던데..'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지브롤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빠르게 거리를 좁혀 나간다.
파라오곤이 당황하여 꽁무니를 빼야 하는 황당한 그림이 나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파라오곤의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카루스 선수, 무슨 수를 쓴 걸까요!"
'저런 것도 중계자라고.'
'8강부터 너무 뻔했잖아.'
파라오곤의 마법은 상대와 시선이 맞을 때 발동된다.
'4강에서도 대놓고 푸른 눈이 보라색으로 바뀌면서 능력이 발동됐었는데.'
눈을 감고 비행하고 있는 지브롤터에게는 마법이 통할리가 없다.
'그리고 마법을 쓸 수 없는 파라오곤은 바위 드래곤에게 상대가 안 되지.'
그 이후로부터는 어쩌면 코미딕한, 어쩌면 잔혹한 방식으로 전투가 전개된다.
제한된 콜로세움 공간 내에서 파라오곤은 도망치려고 발버둥치지만, 바위 장벽에 막히고 부딪히며 헐떡댄다.
지브롤터는 파라오곤 위를 비행하며 암석 덩어리를 투하한다.
'딱 봐도 지상의 공격조차 피하기 바빠 보이는데.'
막 성체가 된 드래곤에게는 너무나도 버겁다.
관중석과 중계자도 침묵에 빠져 이 어색하고도 불쌍한 광경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기권한다! 당장 이 짓거리를 멈춰!"
마침내 상대 선수가 부끄러운 추격전의 끝을 요구한다.
중계자는 당황한 멘트를 끝으로 콜로세움 대전의 승자를 알린다.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심사원 판정에서는 놀랍게도 동점이 나왔다.
'사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지. 이럴 줄 알았으니까.'
내게 중요한 건 본선이니. 아무래도 좋다.
레이스, 콜로세움 전투도 우승하고 심사원 판정에서 공동 1등을 하며 본선행 티켓은 나에게 주어진다.
"무명의 테이머 이카루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엘피스로 향하게 됩니다."
휴.. 드디어. 드디어 기회가 다시 왔다.
"자, 우승자와 짧은 인터뷰를 가져볼 텐데요, 이카루스 선수! 어떤 기분이십니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꼭 우승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우승이라고요."
중계자가 지브롤터를 힐끔 훔쳐본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특히 오늘 보여준 특별한 퍼포먼스를 고려한다면 말이죠."
"꼭 텐파 지역에서도 우승자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뻔하군, 뻔해.
"그나저나, 결승에서 파라오곤의 마법이 통하지 않은 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해 주세요, 이카루스 선수."
"파라오곤의 능력은 '비밀'이니 여기서 공개하지 않겠지만, 지브롤터는 전투 내내 눈을 감고 비행했다는 것만 아시면 될 것 같군요."
"예?"
"눈을... 감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예. 마치 바위 드래곤이 본선을 우승하는 게 가능한 것처럼 말이죠."
"아.. 하하, 그렇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나저나, 혹시 그 모자를 벗어주실 수 있나요..?"
"레이스 때부터 계속 쓰고 계신 것 같은데,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왜, 엘드리안가에게 광고라도 하라고?'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본선행 티켓을 들고 무대를 박차고 내려왔다.
중계자가 당황스럽게 수습하려는 게 뒤에서 들린다.
"어서 가자, 지브롤터."
기대되는걸.
지브롤터를 타고 향한 곳은 바로 마을 광장이다.
곧 있으면 다른 지역 15곳의 본선 진출자들이 공개된다.
'세냐도 당연히 진출했겠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린다.
대부분은 예선을 우승한 것이 바위 드래곤이라는 게 놀랍다는 내용이다.
담당자로 보이는 자가 게시판 앞으로 와서 큰 종이를 펼친다.
그러고는 투박한 못으로 본선 진출자 명단을 게시판에 땅땅 박는다.
"딜런.., 루미네스."
희귀종.
"퍼니.., 드라고노이드."
'드라고노이드? 처음 들어보는 종인데.'
전생에는 본 적 없는 드래곤이다.
또다시 변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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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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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룬, 윈드 드래곤?"
지역은 엘드리안가가 위치한 라핀 지역이다.
라피엘 길드의 유망주들이 모여있는 곳.
'그 미친 경쟁률을 뚫어내고 진출했다는 말이잖아?'
'랜스 엘드리안, 기분이 썩 좋지 않겠는데."
"이 대단한 녀석. 정말로 해내버렸어.'
그리고 역시.
"세냐, 시타엘."
라르파 지역.
다시 만나게 된다.
'지금쯤 서로 명단을 보고 있겠지.'
'마룬은 날 기억하려나.'
세냐는.. 보나마나 능력있는 테이머가 돼있을 거다.
전생에는 경험하지 못한 불안함이 조심스럽게 엄습한다.
'만약 우승하지 못하면?'
마룬은 바람의 신전 기류를 알고 있다.
세냐는 내가 직접 가르쳐 주기도 했으므로 실력을 잘 안다.
'아니야. 전생에도 잘 해냈잖아.'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나?'
복잡한 심정이 가시지 않은 채로 엘피스를 향한 길에 올랐다.
지브롤터는 언제나 그렇듯 안정적으로 비행하며 나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전생에도 듣지도 못한 이름의 테이머들이 "천재다", "대륙 최고다"라 불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지브롤터와 함께 증명해냈다.
'애초에 프란델과 겨루던 실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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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지고, 쌀쌀한 유타칸의 밤 공기가 주변을 메운다.
지금만큼은 새롭게 주어진 기회를 온전히 만끽하고 싶다.
평소에 강박처럼 쓰는 모자를 벗고 머릿결에 스치는 바람을 즐긴다.
"후우,"
모든 불안감이 씻겨 사라지는 기분이다.
지브롤터는 지치지 않고 꾸준한 속도로 비행하고 있다.
달빛에 비춰 빛나는 암석이 루드오어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푸른 빛의 이면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살아 숨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