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울린다.
가장 먼저, 안장을 준비하고 드래곤에게 오른다.
잘못하면 십 초가 넘게 걸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준비된 테이머들은 합을 잘 맞춰서 5초 내외로 끝내지.'
그리고 파트너와의 유대에서는 나랑 지브롤터를 따라올 자가 없다.
친절하게 시간을 잰 중계자가 기록을 말해준다.
"이카루스 선수! 가장 빠른 출발!"
"스타트 3.8초 걸렸습니다!"
평소 연습 때와 비슷하군.
물론 고작 몇 초로 승부가 갈릴 리는 없지만.
"말하는 순간 다른 선수들 추격합니다!"
빠르게 희망의 숲 입구 통과.
순식간에 깊은 그늘과 빼곡한 나무들이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이미 시각에 의존하지 않는 감각 비행을 깨우쳐 놓은지 오래.
코스의 지름길을 파악한 지는 더욱 오래.
첫 코너다.
'돌지 않고 그대로 직진.'
충돌의 위험만 감수하면 자그마치 2초는 단축할 수 있다.
'그래도 이정도는 본선까지 왔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길이지.'
아니나 다를까,
"16명 모두 첫 번째 코너에서 직진을 합니다! 한 명도 실수를 하지 않는 이 치열함!"
"아직까지는 뚜렷한 격차가 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요, 선두의 이카루스 선수와 딜런 선수가 리드합니다!"
나무 위, 아래, 좌우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있는 지름길이란 지름길은 모두 탄다.
일부 부분에서 테이머 간 경로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아직도 그럴 듯한 격차는 없다.
'다들 제법인데.'
16마리의 신비로운 마수들이 놀라운 속도로 좁은 간격들을 돌파한다.
마지막 코너를 돌자 직선 비행 코스가 나오고, 눈부신 햇빛이 앞에 보인다.
출구다.
'훗,'
여기서부터는 제대로 된 트릭이 나온다.
좌회전.
그리고 경로를 위로 틀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온다.
다시 희망의 숲 상공이다.
"이카루스 선수, 말도 안되는 경로로 나갑니다!"
"이게 존재하는 지름길이었나요!"
"과연 시간을 낭비하는 무모한 도전일까요!"
당연히 존재하는 지름길이지.
마지막 코너를 돈 순간 이미 희망의 숲의 모든 체크포인트를 지났기에 출구까지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코스 이탈을 생각해낸 사람이 있을리가.'
숲을 바로 빠져나와 난파선으로 향하는 이 트릭은 자그마치 십수 초를 절약한다.
'전생에도 처음 보였을 때 반응이 엄청났었지.'
그 이후로는 대중화되어 차별점이 아니게 됐지만.
난파선 최초 진입.
전생과는 전개가 조금 다르다.
'뭐, 압도적인 1위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네.'
난파선에서도 충격적인 트릭이 하나 있다.
무려 체크포인트를 거의 한 번에 통과해버리는 바이패스(by-pass) 트릭.
배의 좌측과 우측에 고리 형태로 체크 포인트가 하나씩 있다.
'원래라면 난파선의 외곽을 돌며 체크포인트를 통과해야겠지.'
그 과정에서 독문어나 금발인어 등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난파선 코스의 특징이다.
하지만 지브롤터는 난파선의 깨진 창문을 향해 초고속 비행을 한다.
전에 만들어 두었던 높이가 빠른 가속도를 제공해 준다.
휘잉 —
체크 포인트 통과.
창문 진입 직전에, 지브롤터는 날개를 몸에 붙이고 -
쨍!
총알처럼 반대 쪽 창문을 깨고 나온다.
체크 포인트 통과.
"믿겨지십니까! 이젠 얼마나 앞서있는지도 모르겠군요!"
"2위 세냐 선수를 비롯한 모두가 독문어와 고군분투하는 사이에 이카루스 선수는 불의 산으로 향합니다!"
'훗, 이 선배님을 이기려면 루키들은 아직 멀었다고.'
그렇다고 자만하면 안된다.
'끝까지 집중해야지.'
불의 산에는 그럴듯한 트릭이 없다.
말그대로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누가 가장 실력이 좋고 대담한지가 보여지는 구간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신있지. 최대 속도보다는 감당 가능한 속도가 중요하니까.'
하나같이 비좁은 턴들.
여기저기서 예측 불가능하게 튀는 불덩이들.
코스를 외우기만 한 테이머들은 임기응변 능력이 부족해 고전할 수밖에 없다.
"자, 이쯤되면 이카루스 선수의 독단 질주가 아닌가 싶은데요!"
"많은 테이머들이 '죽음의 구간'이라 부르는 바람의 신전에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
"미친!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세냐는 아직 불의 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무슨 바위 드래곤이 저렇게 빠르냐고!"
그래도 출구가 보이는 것을 보니 거의 빠져나온 듯 하다.
"바람의 신전에 진입하는 이카루스 선수!"
중간중간에 중계자가 하는 말들은 더욱 거슬린다.
몇 년간 증명해온 모든 것들이, 자신의 노력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분명 최강이었는데. 분명 가장 빠르고, 가장 능숙했는데.
오랜 친구에게는 경외감이 느껴진다.
'이런 생각들이 레이스를 방해하고 있어.'
'뒤에서도 추격하고 있으니까 잡생각할 시간은 없어.'
3위는 놀랍게도 어제 본 마룬이라는 소년과 그의 파트너 윈드 드래곤이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중계자의 해설을 들어보니 특이하게도 윈드 드래곤이 주위에 상시 기류를 발생시켜 초고속 비행을 하는 듯하다.
'저 정도로 바람을 조종할 수 있는 윈드 드래곤은 처음 보는데.'
'컨트롤이 속도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실로 무서운 능력이야.'
이카루스와 마룬.
선두 3명 내에 일반종 테이머가 둘이나 있는 것은 최초가 아닌가 싶다.
불의 산 완료.
이젠 바람의 신전.
그래도 바위 드래곤이면 바람의 신전은 힘들겠지.
그러나 이카루스는 상식을 벗어난 짓을 하기 시작한다.
---
"어? 저 녀석! 저거 뭐 하는거야?"
마룬과 럭키, 현재 3등에서 똑같은 광경을 지켜본다.
자신이 일러준대로 5번째 기둥 상공으로 가면 될 것을, 이카루스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
"강제로 바람을 뚫는다고?"
그러고 나서 수직 비행까지.
그것도 들어본 없는 수직 '상승' 비행이다.
그러나..
잠시 후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카루스'라고 불리는, 사실은 엘드리안가의 괴물의 소름돋는 천재성이.
"말도 안돼,"
그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효과적이다.
"역방향으로 주행하면서 가속도를 얻는다고?"
이미 우아한 수직낙하에서 빠져나온 바위 드래곤은 극복할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냈다.
마찬가지로 바람의 신전에 진입하는 럭키마룬.
비록 이카루스의 계획이 더 효과적이지만,
"한 번도 연습해 본 적이 없어."
"원래 계획대로 간다."
그리고, 스스로 상기시킨다, 바람의 신전은 윈드 드래곤의 구역이다.
진행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강풍을 럭키가 무마시키고, 오히려 가속을 실어준다.
바람의 정기가 넘쳐나는 이곳에서 본 모습이 발현된다.
"2등까지는 충분히 가능하겠는데?"
5번째 기둥 상공 진입.
상승 기류.
이미 하늘의 신전으로 진입한 지 오래인 바위 드래곤을 최선을 다해 쫓아간다.
---
"이카루스 선수에 이어서 마룬 선수도 비슷한 신기를 보여줍니다!"
"바람의 신전에 이런 비밀이 숨어있을 줄은!"
"순식간에 3위로 밀려난 세냐와 시타엘!"
"이번 대회 우승을 이미 따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1위와 2위의 격차, 그리고 2위와 나머지의 격차는 말도 안되게 벌어집니다!"
"그리고 말씀드리는 순간 무지개 동산으로 진입하는 이카루스 선수!"
"아마.. 루키대회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이 나오겠군요."
결승선이 눈 앞에 보인다.
전생에 이뤄내지 못했던 업적이 아른거린다.
무지개 동산은 말 그대로 직선 비행이다.
치열한 경쟁이었으면 경기에서 가장 재밌는 구간이 될 수도 있지만, 이처럼 격차가 벌어진 레이스에서는 그저 우승을 만끽하는 다채로운 레드카펫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너무 안일했나.
결승선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거리.
이 위치.
이 지점.
와일드 드래곤.
충돌.
추락.
발 밑을 뒹구는 바위 조각들.
피를 흘리는 지브롤터.
아아,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이.
지금은 안되는데. 지금만큼은 안되는데.
그러나 모든 상황과 위치가 지금이어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빌어먹을.'
그리고 테이머와 드래곤은 경기 도중 땅으로 내려앉는다.
꽃과 잔디와 악몽으로 가득한 무지개 동산으로.
'침착해. 그저 과거일 뿐이야.'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젠장!'
'이 기회를 날려버릴 셈이야!'
'신이 끝까지 이기게 둘 거냐고!'
다시 비행을 준비한다.
"아직.. 아직 시간은 충분해."
지브롤터는 도무지 내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
힘겹게 이뤄낸 이륙.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땅으로.
또 다시 이륙.
조금씩, 조금씩.
결승선은 가깝다.
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무엇보다 먼 듯 하다.
---
"이게 무슨 일..인가요."
"이카루스 선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지켜보기 어려운 광경이군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네, 그리고 마룬 선수가 무지개 동산에 접근합니다."
"세냐 선수도 어느새 나머지 선수들과 간격을 벌려 하늘의 신전을 나왔군요."
"이카루스 선수, 과연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만하자.'
처음 추락 지전으로부터 고작 몇십 미터밖에 오지 못했다.
'비행이 안된다면.'
그저 땅 위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땅에서 뜰 때마다 뒤에서 무엇이 날아올까 제대로 지브롤터를 지휘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차라리 달리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
그리고 이 파란만장한 레이스의 결과는 3위.
1위를 한 마룬과 2위를 한 세냐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들어왔다.
"하아, 하아, 하.."
"괘, 괜찮아 지브롤터. 별거 아니야."
지브롤터가 걱정하는 낌새로 옆에서 위로한다.
"그래도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잖아?"
그거면 됐지. 그럼.
"내일 콜로세움에서는 이럴 일 절대 없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
절대로.
"잠깐 숨이 찼던 것 뿐이야."
결승선 너머의 포탈을 통과하니 다시 엘피스 도시로 복귀했다.
찰칵! 찰칵 - 번쩍!
나오자마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웅성거림이 일어난다.
역겹다.
여기저기서 기자로 보이는 자들의 질문들이 쏟아져 내린다.
형식적인 절차가 모두 끝난 후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8인이 발표되고, 이제 참가자들은 모두 숙소로 귀환할 수 있다.
대부분 테이머들은 남아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랑하지만, 난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간다.
똑똑.
"저기, 이카루스?"
마룬의 목소리다.
"얘기 좀 해, 이카루스."
세냐도 왔나.
'얘기할 건 없다.'
그저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고, 그를 견디지 못했을 뿐.
'그리고 아직 질 생각은 없어.'
콜로세움에서 1등을 하면 아직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
'그러니.. 경쟁자들에게 동정받을 생각은 없어.'
"..이카루스, 이야기하기 싫으면 이해해."
"근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옆방에 있으니까."
세냐, 정말 걱정하고 있구나.
..고마워.
..그래도 걱정을 받고 싶지는 않다.
특히나 같은 경쟁 내에 있는 자들이 걱정하는 것은 더욱 질색이다.
걱정되면, 날 도와줄 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건가?
'어차피 경쟁에서는 모두가 항상 완벽하게 멀쩡한 상태에 있지 않아.'
무엇 때문에 얼마나 힘들든, 그것을 견뎌내고 극복하는 것도 경쟁의 일부이다.
전생에도 항상 혼자해 왔고, 익숙하다.
'그러니 너네가 날 진심으로 위한다면, 내 걱정을 하지 말고 내일 자비없이 최선을 다해.'
오늘따라 밤 공기가 차갑다.
이러면 컨디션 조절이 안 되는데.
---
지독한 아침이 밝아온다.
결국 밤새 악몽같은 장면이 반복되어 잠을 못 잤다.
"..며칠 전만해도 대회 기간의 모든 하루하루가 꿈만 같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식은땀이 흐른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컨디션 조절은 커녕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들다.
'이런 건 고려하지 않았는데.'
큰일이다.
거울 속을 바라본다.
헤진 머리. 푸른 머리. 엘드리안의 상징.
겁에 질린 표정.
이게 나라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수를 하고 뺨을 때린다.
"후우, 정신 차리자."
'그래, 이제야 좀 그 패배자같은 표정이 사라졌군.'
자신감을 되찾았다.
적어도 그렇다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밖에는 여느 때처럼 지브롤터가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마워, 파트너.'
"자, 어제 레이스 재미있게 보셨나요!"
"그럼 이제 두 번째 심사, 콜로세움 전투를 시작하겠습니다!"
꼭 이겨야 한다.
"자, 룰은 매년 설명하지만 한 번 더 하도록 하지요."
"1대 1! 기권하거나 전투 불능이 됐을 때 경기가 중단됩니다!"
...
설명이 끝나고 토너먼트 배정이 시작된다.
'8강 상대는 딜런과 루미네스인가.'
속성 상성상 보면 유리하다.
그래도 아무도 바위 드래곤이 루미네스를 상대로 우세하다고 생각하진 않을거다.
마룬은 같은 8강 사이드에 있다.
'4강에 진출한다면 만나겠네.'
레이스에서 확인한 뛰어난 기동력이 과연 전투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지 궁금하다.
세냐는 반대 사이드에 배정됐다.
'결승에서 만나기를.'
사전 결과 예측은 언제나 봐도 흥미롭다.
'역시 다들 뻔해.'
나에게 주어진 베팅만 해도 1:4.
레이스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별개로 전투에서는 약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나.
지나가며 힐끗 본 신문에는 어제 레이스를 다룬 기사들로 표지가 채워져있다.
'별로 놀랍지는 않은가.'
3등으로 떨어진 나나 1등을 한 마룬보다도 세냐의 기사가 중점적으로 다뤄져 있다.
'그래도 최종 우승자를 소개하는 기사는 단 하나니까, 언제까지 날 무시할 순 없겠지.'
"기다림은 여기까지! 바로 콜로세움 전투를 시작하도록 하죠!"
"첫 번째 매치업, 세냐 선수와 핀텔 선수!"
"시타엘과 흑룡의 대결이라니, 정말 기대됩니다!"
"둘 다 대륙에 몇 없기로 유명한 희귀종인데요, 항상 궁금했을 그 결과가 오늘 밝혀집니다!"
세냐의 가벼운 승리.
'당연한 결과지. 크게 놀랍진 않아.'
그래도 압도적인 전투력은 눈여겨 볼만 했다.
상성이 많이 좋은 탓도 있지만 뛰어난 안목을 가졌다면 그걸 감안하고도 얼마나 차이가 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냐.. 생각보다 전투를 훨씬 잘하는걸.'
레이스는 주종목이 아니었나.
두 번째 매치업.
드라고노이드 대 므네이아.
둘 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 보는 용들이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극과 극이군요!"
"기괴한 외모로 알려진 드라고노이드와 그 귀여운 모습이 특징인 므네이아!"
"과연 어떤 양상으로 대결이 펼쳐질까요?"
베팅은 압도적으로 므네이아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고노이드는 과도한 무게로 인해 레이스에서도 그닥 특출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저 퍼니라는 테이머가 어딘가 거슬리는데..
무언가 불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