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57 잊지 않을 추억 (19)
헬에게 물잔을 갖다주던 금오의 손에서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금오는 쓰러지며 피를 토하자 헬이 걱정되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그를 부축했다.
“금오...?”
분신이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그렇게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신체 일부를 실로 대체해야 하긴 하지만 금오가 느낀 것은 그가 만든 분신이 ‘단순히’ 회수되지 못하는 상황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강렬한 외압으로 터진 분신의 고통이 멀리 있는 금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 후 금오의 보금자리 밖은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금오와 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건물은 격렬하게 흔들렸다.
“뭐야...?”
밖이 시끄러워 금오를 대신 침대에 눕히고 창문을 열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오.. 지금이 몇 시지?”
“....낮 정도 되는 시간 이었습니다.”
“그 시계, 아마도 고쳐야 할 것 같아. 잘 안 맞는 것 같거든.”
금오의 말과는 다르게 하늘은 밤처럼 어두웠다. 그러나 결코 밤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헬의 눈에서는 하늘을 뒤덮은 어둠과 혼돈이 매우 잘 보였기 때문이다.
“내 옷 어딨어.”
헬은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의자에 이미 전부 준비된 그녀의 옷이 보였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서 문 앞으로 나섰다.
“조심하십쇼...”
“불의 산에서 조심해야 할 건 내가 아니야. 그 녀석들이 날 조심해야지.”
헬은 문 밖으로 나갔다. 청장이 나간 그 문을 바라보며 금오는 깊은 한숨을 푹 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결국... 오고야 말았군요.”
한편 밖으로 나온 헬은 조금 오랫동안 누워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뻐근함을 느꼈고 금오 때문에 금연도 했기 때문에 숨을 쉬자마자 목이 타는 듯한 금단 증상을 겪었다.
“역시 몸을 풀려면...”
그녀는 항상 담배가 있었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음...”
그녀가 예상한 그립감은 아닌 무언가 잡혀 꺼내들었고 담배갑 대신 새빨간 포장지로 포장 된 막대 사탕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귀엽긴, 취향은 아니지만... 뭐, 맛은 괜찮네.”
사탕을 조금 맛보고 바로 깨부숴 씹어 삼켰고 남은 막대는 던지자마자 불태워졌다. 달달 하면서도 어딘가 매콤한 것이 그녀의 혀를 찔러댔다. 딱딱한 몸을 풀기도 전에 불의 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몬스터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은 평소보다 어딘가 하나씩 맛이 간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다 네가 알던 모습들 하고는 영 딴판이지만... 몸풀기론 딱이네.”
헬은 양손에 검붉은 불꽃을 태우며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는 불의 산 몬스터들에게 돌진한다.
“전부 처부숴주지.”
-
빙하고룡은 시야가 반쯤 가려진 상태의 천장을 보았다. 한쪽 눈에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손으로 느꼈다.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아팠다. 겨우 고개만을 까닥거릴 수준이었고 옆을 보자 파워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쭈구려 앉아서 그를 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파워, 보금자리다.”
손이 저릿했다. 이불에 덮힌 저릿한 손을 들어올려보니 부목을 진 상태로 붕대가 감겨있었다.
“드디어 일어났네? 하도 안 일어나길래 죽은 줄 알았어. 일어나려고 하진 마 제대로 치료한 건 아니니까.”
빙하고룡이 일어서려 할 때 엔젤이 방에 찾아오며 말했다.
“빙하고룡, 거의 죽을 뻔 했다. 하지만 저 여자 널 치료해줬다.”
“감사 인사는 됐어, 치료사로써 할 일을 한 거니까”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야?”
빙하고룡은 반쯤 몸을 일으키고서 엔젤에게 물었다.
“정말로 안 할 줄은 몰랐는데.”
“....고맙다.”
“당황한 모습이 꽤 웃기네, 농담이야.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평소에 진지한 모습을 잃어버린채로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 빙하고룡의 표정을 보며 엔젤이 피식 웃자 빙하고룡도 긴장을 푼 채로 다시 몸을 눕혔다.
“하루..정도 일려나. 네가 쓰러지고 흐른 시간이,”
“번개고룡은? 그리고... 고대신룡은....”
“말할거였어. 고대신룡은 아마 던전으로 순간이동 됐을거야, 번개고룡은 나이트를 따라 던전으로 이동했어.”
“뭐?”
빙하고룡은 힘들게 누운 몸을 다시 한 팔로 지지하며 일으켜 세웠다.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몰려왔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움직이면 안된다!”
몸 상태가 위험한 걸 안 파워였지만 빙하고룡이 다시 눕도록 하진 않고 그저 부축해주며 그
가 편안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화내지마, 그 방법 밖에 없었으니까.”
“아직 화내고 있는거 아냐, 넌 번개고룡을 혼자 가도록 내버려뒀어?”
“아니, 내가 보낸거 아니야, 그리고 그 중에 아무도 본인 스스로 간 드래곤은 없을거야.”
“단단히 미치지 않고서야 거길 어떻게...”
“나이트랑 같이 갔어.”
“누구?”
빙하고룡은 순간 잘못 들었나라고 생각했다.
“전 빛의 신전 대령, 나이트 드래곤이 그 얘랑 같이 갔다고. 그러니까 안심해.”
떨리던 빙하고룡의 눈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다.
“네가 쓰러진 이후 하늘의 신전은 완전히 무너졌어. 제우스도 죽었고 살아남은 몇몇 인원을 겨우 데리고 이곳에 왔지. 오래 있진 않을거니까 그렇게 신경쓰진...”
“엔젤님...!”
다급한 목소리로 제트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밖에...!”
불안감으로 가득차보이는 제트의 모습에 엔젤은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빙하고룡도 파워에게 안긴 상태로 따라오고 있었다.
“넌 왜 따라와?”
“나도 확인은 해봐야지.”
“맘대로 해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들은 제트의 불안한 외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름 한점 없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검게 물들어져 있었다. 엔젤은 침착하게 제트에게 시간을 물었다.
“지금.. 밤인가?”
“...농담이시죠?”
“그래야지만 믿을 것 같으니까.”
아까까지 밖에 있다가 빙하고룡의 깨어남을 확인하러 갔었던 엔젤은 이미 밤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사라졌을리는 없다, 하지만 해는 사라졌으며 어두운 창공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불쾌해.”
“뭐?”
먼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빙하고룡이었다. 엔젤이 뭔가를 오해한 것 같았지만 빙하고룡은 사나워진 그녀를 진정시키며 얘기했다.
“그냥 일어난 게 아니야. 해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저건 어둠이야. 어둠과 혼돈이 유타칸의 하늘 전체를 가린거야.”
“그게 말이....”
엔젤은 말을 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머리에 스친 생각과 함께 말을 멈추었다.
“봉인이 풀린건가.”
“제트.”
“예?”
파워는 갑작스레 제트를 불러 빙하고룡을 넘겨주었다. 빙하고룡이 어리둥절한 채로 제트에게 안겼다.
“뭐해?”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파워, 막으러 가야 할 것 같다. 여기서 기다려줘라.”
“뭐?”
“야, 네가 가면...”
파워는 그들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은 채로 다리의 힘을 주고서 곧 바로 뛰어 어디론가 가버렸다.
“원래... 저런 얘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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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내린 지하던전 심층부 안에서 미세한 빛이 세어나온다. 다크닉스에게 공격하는 것이 실패하고 봉인은 풀려났다. 지하던전
은 무너졌으며 힘을 내지 못한 채로 잔해에 깔려 죽게 될 운명 같았다.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흐릿한 정신 속에서 천천히 깨어나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중에 꼭 이야기 들려줘야 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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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한가위 되십셔. 내일 본편과 추석 특별편 올라갈 것 같습니다. 당연히 특별편은 본편의 캐릭터만 가져올 뿐 스토리와 관련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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