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 잊을 수 없는 추억 (1)
“....”
헬이 침실에 누워 있는 채로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본인의 보금자리는 아니었다.
‘...여긴’
움직이려고 했으나 그 동시에 근육들이 전부 찢기는 감각을 느끼며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신의 몰골을 살펴보니 이곳저곳이 붕대에 감겨있으며 다리는 심하게 부러졌는지 두꺼운 깁스를 한 채로 있었다.
“후…. 좀 약하게 칠 것이지 나쁜 x”
“....”
금오는 그녀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하며 앉아 있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헬은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거를 물어보았다.
“언제부터야?”
“무엇을 말입니까.”
금오는 눈을 감은 채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앎에도 모른 척했다. 그렇게 한다면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에게 말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죄송합니다.”
금오는 모른 척했지만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번개고룡의 감시, 그건 금오 경감의 독단적인 일이었다. 번개고룡이 불의 산을 나간 이후로 그는 헬 청장 몰래 번개고룡의 행적을 전부 다 보고 있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아닙니다. 제 단독으로 행한 일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불의 산은?”
“청장님 없이도 잘 돌아갑니다. 빙하고룡에 의한 피해 규모는 상당했지만 대신 파이어 레드스톤들이 다시 잠잠해져서 다들 현재 일상에 만족하고 있어 보입니다.”
“후…. 담배 좀 줘.”
“안 됩니다. 안정을 되찾으신 후에….”
“그게 있어야 안정이 돼, 지금.”
헬은 금오 경감이 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도.”
“제 보금자리지 않습니까.”
그녀의 예상대로 이곳은 금오 경감의 보금자리였다. 남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 빈번히 있는 일은 아니기에 헬은 그 말에 동의하며 불을 붙이는 것은 그만두었다.
“알았어. 물고만 있을게. 부하가 상사한테 말대꾸나 하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가 툭 뱉더니.
“그래도 금오, 내 곁에 있을 거지?”
그 말에 금오 경감은 살짝 움찔하더니 천천히 그 말에 대답해주었다.
“네, 죽을 때까지.”
-
“친구분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우리는 그녀의 말에 따라 책상 하나에 의자가 딱 세 개 있는 곳에 앉아 기다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하늘의 신전으로 가던 도중에 우연히 모포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하고서는 다친 우리를 이끌고 자신의 보금자리로 보이는 곳으로 데려왔다.
들어오기 전에 수상함을 지울 수 없었던 우리는 몇 차례 거절했지만
“지금 다친 게 불 보듯 뻔한데.”
번개고룡의 팔이 아프다는 것은 외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나와 빙하고룡 파워의 몸의 몇 군데를 누르더니
“..!?”
얼마 안 가 우리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대신룡 도망쳐야 한다.”
빙하고룡이 두 팔로 입을 감싼 상태로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저 여자 수상해. 이러다간 전부 죽고 말….”
빙하고룡은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뭐 치료가 거짓말이더라도 속아서 나쁠 건 없지.”
“니들 뭐하냐?”
“괜찮아?”
치료를 마치고 나온 번개고룡이 심드렁한 우리를 보며 한 물었다. 나는 번개고룡을 보며 치료가 정말로 거짓은 아닌지 물어보았고 번개고룡은 뭘 걱정하냐며 팔을 보여주었다.
“말끔하게 나았어, 어떤 통증도 없이 말끔하게.”
“혹시, 내 말을 거짓말로 안 건가요?”
뒤에서 나온 그 녀석이 눈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냥 호의를 보여줄 녀석은 없으니까.”
어느새 일어선 빙하고룡이 그 녀석을 향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보통 호의를 보여준 사람한테 그렇게 반응하나요?”
“네 호의가 대가를 바라는 것이라면.”
녀석은 검지 손가락을 턱에 대며 긍정했다.
“대가라...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
“수상한 외형에 의심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넌 누구지?”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겠네요. 여러분들을 도와준 이유는 단순히 다쳐서 였지만 무엇을 하는지는 알지 못하니까요.”
“그게 무슨..”
“치료는 전부 끝났으니 이곳을 나가도 좋아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딱히 적의를 보이지 않는 드래곤에게 말씨름으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잠깐.”
갑자기 파워가 손을 들며 말했다.
“우리 치료, 안 됐다.”
“아~! 그런가요?”
녀석을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데. 이미 다 나은 것 같은데요?”
녀석의 말대로 아까와는 다르게 몸에서 힘이 나는 느낌이었다. 빙하고룡도 내상이 치유된 듯 더 이상 기침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보통의 드래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가? 그것도 고효율의 치료를 할 수 있는 드래곤이….”
빙하고룡이 중얼거리며 그 자의 정체를 유추하려고 했다.
“...! 얼른 가봐요. 나도 이제 다시 다른 드래곤들을 치료해야 하니까. 여러분들만 이 보금자리에 계속 있을 수 없다구요,”
그 녀석은 다급하게 우리를 내쫓는 느낌을 보이며 우리를 배웅했다.
“잘 가요~ 다음에 또 봐요.”
그렇게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그 녀석의 만남을 뒤로하고
“가자 마지막 재료를 찾으러.”
번개고룡이 앞장서며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하늘의 신전을 향해 나아갔다.
-
“이봐 더 다가온다면…!”
말을 하려던 골드 드래곤 목의 단검이 꽂히면서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끄럽다.”
얼굴에 튄 피를 대충 문질러 닦으며 서펜트가 쓰러진 골드 드래곤들을 무시하고 하늘의 신전 입구로 향했다.
“너…. 는…. 안….”
“이제 이 일도 귀찮군.”
답지 않게 마무리가 어색했나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골드 드래곤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펜트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발목을 잡은 그 손을 끊어버리고 목을 베었다.
“...이젠 상관없으려나.”
ep.25 잊을 수 없는 추억 (2)
던전에서의 법칙은 하나다.
누가 정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
눈앞에서 동족들이 짓밟히고 쓰러지고 그것들은 재밌다는 듯 우리를 갖고 놀았다.
힘이 없는 우리는 그렇게 짓밟히고 힘이 있는 저것들은 짓밟았다. 이것이 당연하다고 믿어왔다.
아니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텨야 했다.
그자는 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던 때에 나타났다.
“불공평하지 않나.”
누군가가 나타났는지는 관심 없고 나는 발톱을 날카롭게 세워 내 목에 갖다 데려고 했다. 하지만 겁이 났다. 내가 죽으면 그 아이들은…? 그래서 죽을 용기도 없는 채로 그자를 핑계로 나 자신에게 변명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꺼져.”
그자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보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분명 그들이 막고 있었을 텐데.
“단순히 네가 던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게.”
자세히 보니 그자의 손에는 검붉은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리를 탄압하는 그 녀석들을 뚫고 와야 했을 것이고…. 최후는 뭐 생각하지 않아도 뻔하군.
“난 네가 마음에 든다. 네가 갖고 있는 그 눈은 보기 힘들거든.”
하. 이 망할 세계는 편하게 죽지도 못하게 하는 건가.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해골 가면? 특이하군.”
“가면으로 보이나?”
그건 가면이 아니었다. 특이한 취향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너.. 드래곤이 아니군.”
“드래곤이 아니라면, 흥미가 떨어지는 건가?”
드래곤이 아닌 수상한 해골, 무슨 목적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자의 욕망이 충분히 선하지 않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리가. 항상 기다렸지. 이 굴레를 벗어 날 수 있는 순간을”
아무렴 어떤가. 나도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얼마든 이용하고 이용당해주겠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분명 도움이 될 터.’
“좋은 생각이야. 혹시라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쩔까 싶었거든.”
“뭐?”
나는 그 말에 서둘러 밖을 나갔다.
“하….”
“설마 동족이 죽었다고 당황하는 건 아니겠지.”
그 자의 손에 묻어있던 피는 그것들의 피만 묻어있던 것이 아니었다. 내 동족 또한 그곳에서 전부 죽었다.
“모두 자네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더군. 참 아쉬워.”
“하하…! 하하…. 내가…. 하하하!”
나는 눈을 가리며 웃었다. 그저 웃었다. 그건 슬픔일까 아니,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럼 분노일까 아니 오랜만에 느낀 자유는 그저 후련했고 상쾌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그 어떤 분노도 느낄 수 없었다.
희망,꿈 그런 건 여유가 있는 것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만약 그들의 못 봐줄 정도로 애틋한 여정을 보면서 나도 그들처럼 희망과 좀더 행복한 꿈을 꾸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까지 오진 않았겠지.”
골드 드래곤 무리가 서펜트를 둘러쌓는다. 아까보다 조금은 강해 보이는 녀석들이 창을 들고 서펜트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렇지 않다면…!?”
서펜트는 소리치는 그 녀석에게 달려들어 난도질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며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시끄럽군…. 시끄러워!”
그의 작은 단검이 한 골드 드래곤의 몸을 여러 번 관통했다. 피가 튀기는 그 끔찍한 광경은 골드 드래곤 무리를 잠깐 움츠리게 했다.
‘이미 약들을 전부 전달했고, 이곳에서 더 날뛸 이유는 없다.’
서펜트는 난도질 당한 골드 드래곤을 보며 과거를 떠올린다.
‘하지만 발버둥은 쳐도 되는 거 아닌가.’
“후…. 그대들은 날 잡으려고 온 거 아니었나? 어째서 벌벌 떨고만 있는가.”
그 말에 골드 드래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한쪽 팔이 없는 상태에서 이 무리를 상대하는 것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방향 감각과 여러 싸움으로 지쳤다.
한 번씩 창이 그의 몸을 관통 할 때마다 점점 힘이 빠졌지만, 더욱더 악착같이 발버둥 쳤다.
“큭!”
“다들 겁을 먹지 말고 달려들어라! 어차피 수적으로 우리가 우세하다!”
서펜트는 한 마리…. 한 마리 자신을 달려드는 골드 드래곤들의 목을 베어냈다. 이제 자기 피인지 적의 피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은 피들로 몸이 뒤덮이며 그들을 쓰러트려 갔다.
“말도 안 돼…. 신전 안에서…. 어떻게 던전 출신 드래곤이….”
“...”
마지막 남은 골드 드래곤이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도망가지 마라.”
서펜트는 지쳤음에도 마지막 남은 골드 드래곤을 쫓아 바로 죽이지 않고 다리 근육을 찢었다.
“자네는 방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어.”
그 골드 드래곤은 손으로 기어가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펜트도 그를 천천히 따라가며 말했다.
“던전 출신이라.. 그래…. 그렇지 나는 던전에서 태어났다.”
서펜트는 단검을 던져 그의 팔에 명중시켰다.
“근데…. 그게 뭐가 문제지? 너희들은 훨씬 더 편한 곳에서 자랐지. 하늘의 신전…. 아모르의 힘이 가장 잘 닿는 곳. 축복받은 너희들이…!”
서펜트가 눈을 부릅뜨며 다른 단검을 꺼내 골드 드래곤의 등에 꽂는다.
“우리를 차별했어야만 했던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움직임은 멈추었다. 서펜트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심호흡하고 피가 묻은 머리를 위로 올리고 옷들의 묻은 피를 닦으려고 했다.
“.....지워지지 않는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원래 이들을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던전이라는 말에 마음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지막 남은 그 드래곤까지 죽였다.
“...최대한 빨리 날아왔지만. 늦어버린 건가….”
“...!”
어느 순간부터 그곳의 공기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피로 뒤덮히면서 서펜트의 영향으로 어둡게 물들어가던 그곳이….
한 드래곤의 영향으로 다시 빛의 기운으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전우들이여…. 그대들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여기까진가.”
-
“여기 왜 이래?”
“끔찍하군”
우리는 하늘의 신전 입구에 있는 골드 드래곤들의 시체를 보며 경악했다.
“파워, 눈 뜨고 보기 힘들다.”
“최대한 피해서 따라와. 괜히 피 냄새 묻으면 오해를 사기 쉬워.”
“그냥 지나가도 되는 거야?”
“원래는 하늘의 신전 내부의 검증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좀 귀찮아서 다행이지 뭐.”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는지도 모른 채로 마침내 하늘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ep.26 잊을 수 없는 추억 (3)
그들은 하늘의 신전에 들어가고 번개고룡이 걷는 길을 따라 조용히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고대신룡이 빙하고룡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빙하고룡이 대답해주려는 찰나에 그걸 또 들었는지 번개고룡이 대신 대답했다.
“떠들지 마, 계획은 조금 틀어졌어도 아직. 아무튼 잠자코 따라 오기나 해.”
번개고룡은 약간 까칠하고 날 세워진 반응으로 그들을 대했다.
아까 전.
“근데 번개고룡, 나머지 재료는 다 모은 건가?”
빙하고룡이 하늘의 신전에 들어오자 번개고룡에게 물었다. 번개고룡은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다.
“암흑 물질은 내가, 폭발용액은 고대신룡이 네가 완전무결한 물방울과 안정….”
“내가?”
번개고룡의 손가락이 빙하고룡에서 잠시 떨리기 시작하더니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바람의 산맥에서 빙하고룡을 보러 갔다가 그가 폭주하는 바람에 안정 용액과 완전무결한 물방울을 챙긴 적이 없었다.
“.....있어?”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보았다.
“당연히 없지. 그 녀석이 챙겨 가버렸으니까.”
“그 녀석?”
“방울을 이용해 싸우던 드래곤이 있었지. 그 때문에 너희들과 어쩔 수 없는 싸움도 했고.”
“뭐?”
빙하고룡은 폭주했을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신경은 조작되어 스스로 원하는 움직임을 낼 순 없었지만, 의식만은 자신만의 것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불의 산으로 유인됐을 때까지의 과정을 기억하고 계산할 수 있었다.
“그걸 왜 말 안 했어?”
번개고룡이 눈이 돌변했다.
“그럼 그때 했던 말도 네 의지였다고?”
아.
빙하고룡은 급하게,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건 너희들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X쳐. 지금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번개고룡의 눈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빙하고룡은 그때 그녀를 모르는 척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닌 본인이 위협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었지만 그의 폭주는 불가피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파워와 고대신룡은 부들부들 떨리는 번개고룡을 보며 막아야 할지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번개고룡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말을 하고서 그녀는 뒤를 돌아 걸어갔다. 아무런 화도 내지 않고서 묵묵히 걸어가는 번개고룡을 보며 그들은 오히려 더 걱정되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말로 단순히 이해할 드래곤은 절대로 아니었다.
번개고룡은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따라 와, 뒤지기 싫으면.”
“...”
“..넵”
-
똑똑
누군가 그녀 보금자리의 문을 두들겼다.
‘이상하다. 이곳을 직접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는데….’
그녀 또한 이상함을 느끼면서 그 꺼림직함에 문을 쉽게 열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간절한 드래곤들이 이곳을 종종 찾아오지만….’
문 앞에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칠흑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고서 뒤늦게 뒷걸음질 쳐 보지만 붉은 손이 문을 꿰뚫고서는 문짝을 그대로 뜯어냈다.
“손님이 왔는데 열어주지 않는 건가?”
G스컬이 섭섭하다는 듯 말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마감이에요!”
싸울 생각도 수단도 없다.
그저 도망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보금자리 뒤편에 있는 숨겨진 비상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귀찮게 하는군.”
G스컬은 재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먼저 도망친 그녀를 따라잡을 만큼 빨랐다.
“잠시 대화를 좀 하려고 하는데.”
G스컬은 여유롭게 그녀의 옆을 같이 달리며 물었다.
“미안하지만 개인 질문은 안 받거든요!”
그녀는 G스컬의 존재를 안다. 탄생 경유는 알 수 없지만 오로지 목적을 알 수 없는 파괴를 일 순위로 살아가는 자.
대화같은 건 성립하지 않는다. 무조건 그녀에게 불리할 테고 거부권은 없겠지.
“생각을 오래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참을성이 없거든.”
그 말을 하고서 G스컬의 붉은 손이 그녀의 한쪽 팔을 향해 다가갔다.
“우선…. 팔 하나….”
“당신, 전에 다친 적 있었네요?”
그녀는 기적적으로 G스컬의 취약점을 찾고서 슬며시 웃었다.
“....!”
“참아요, 내 치료는 좀 아픈 편이라서요.”
그녀의 손이 G스컬의 손이 맞닿자 약한 섬광이 터졌다.
눈 부신 빛이 꺼진 후 그녀는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자신의 손이 약간 타들어 간 것을 확인했다.
“잔꾀를…!”
G스컬 또한 붉은 손이 검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그녀와는 다르게 그렇게 큰 피해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대화만 하려고 했지만….”
섬뜩해지는 G스컬의 표정과 함께 누군가 그 둘 사이에 질풍과 함께 나타났다.
“제트…!”
“섬광을 보고 바로 날아왔습니다. 아무래도 늦지 않은 것 같네요.”
“어딜!”
G스컬은 손을 뻗었지만 푸른 깃을 가지고 있는 제트 드래곤은 그녀를 업고서 재빠르게 날아갔고 애먼 땅만 균열이 생겼다. 더 이상 쫓아갈 수 없는 하늘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G스컬은 추격을 멈추었다.
“하…. 역시 그놈이 없으니 힘들군. 일은 참 잘하는 녀석이었는데.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제트 드래곤이 날아가는 곳을 응시했다. 슬며시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이고, 한 곳에서 멈추었다.
“뭐, 다행히 길을 묻지 않아도 괜찮아졌군.”
G스컬은 제트 드래곤이 날아간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다시 멈춰서고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낌새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남을 엿보고 엿듣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지.”
그 녀석은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이곳을 바라보고서는
“적어도 내가 눈치채지는 못하게 했었어야지.”
눈이 가늘게 찢어지더니
“감상은 여기까지.”
ep.27 잊을 수 없는 추억 (4)
제트 드래곤은 그녀를 업고서 매우 빠른 속도로 하늘의 신전까지 도착했다. 제트는 신전 안쪽으로 들어가 신전에 또 다른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제트는 그녀를 내려주었지만 팔의 부상이 심각한 것을 보고서 더욱 초조했는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전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떨리는 어깨에 천천히 손을 올려주었다.
“하지만 엔젤님은….”
“이 정도는 예상했어요.”
엔젤은 그저 웃음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보면서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제트에게 그렇게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어깨에 있던 손이 슬퍼 동요하는 제트의 뺨으로 움직이며 그녀를 달랜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깨어난 건지는 몰라도 정말 고맙고 다행이에요.”
“몸은 괜찮은 건가요? 이렇게 바로 움직여도 되는 거에요?”
제트는 얼마 전까지 아니 그녀를 구하러 오기 전까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독에 감염되어있었다.
그 독은 엔젤의 치유 능력으로도 해독할 수 없었고 특별한 약재를 찾기 위해서 신전 밖으로 나가서 다양한 드래곤들을 치유해가며 어떤 증거라도 찾고 있었다.
“멀끔하게 나았습니다.”
제트는 팔의 힘을 주고서 튀어나온 알통을 자랑하며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엔젤은 가볍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제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완벽하게 나았다. 엔젤은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엔젤…. 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서펜트 드래곤이 그녀에게 안겼다.
“..?!”
“엔젤님 손이..! 흐엉엉 도대체 뭘 하다가 돌아오신 거에요!”
그 서펜트 드래곤은 타들어 간 엔젤의 한쪽 팔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콧물을 흘려댔다.
“멜, 난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
그들의 사정을 자세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눈물을 흘리며 멜이라 불리는 서펜트를 향해 엔젤은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녀를 안정시켰다.
“흑”
아이는 훌쩍하며 눈물을 그치고
“그보다, 어떤 손님들이 엔젤님을 찾아왔었어요.”
“,,,뭐? 누가?”
하늘의 신전에서 서펜트와 같은 어둠, 던전의 드래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발각 시에는 어둠의 드래곤은 즉결 처형 되고 숨겨준 이는 감옥에 갇힌다. 그녀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찾아오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자리를 비워놔서 누가 올 리는 없었을 텐데. 사라진 지 꽤 됐다는 소문이 퍼져서 올 드래곤은 없어야 맞다. 그럼 누가?“
“지금은 필립씨가 그들을 대신 맞이하고 있긴 해요.”
“들키진 않은 거지…?”
“네!”
그녀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긴장을 늦추어선 안 됐다.
‘빠르게 돌려보내야 해…. 여차하면 내 계획이….’
“제트, 멜을 지켜줘.”
제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멜은 방을 나섰다.
침을 삼키며 손님이 있는 방의 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방 안쪽에서는 필립의 목소리와 멜이 말한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
익숙한 목소리.
‘설마….’
그녀는 자연스럽게 방문을 열어 손님들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오셨네요. 저분이 여러분이 찾던 그분입니다.”
방문을 열자 손님들과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상태로 앉아 책을 든 채로 있는 필립이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필립의 시선을 따라 손님으로 보이는 번개고룡,빙하고룡,고대신룡,파워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이렇게 또 만날 줄이야.”
“우리 만난 적이 있었나?”
번개고룡이 갸웃하며 말했다. 그 대답에 엔젤은 한숨을 쉬며 망토를 뒤집어쓰며 입을 열었다.
“이러면…. 생각이 나나요?”
“어?!”
그제야 그들은 눈치챘다는 듯 다들 놀란 표정으로 엔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게 말이 되는 거였나….”
“..아무튼 무슨 일이야? 문은 닫혀있었을 텐데.”
“안에 드래곤 있는 것 같길래 열 때까지 두들겼지. 손님 안 받아?”
“뭐 이런 무례한 경우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투가 바뀌었네?”
“신경 꺼. 왜 찾아왔는데?”
둘의 신경전이 쉴 틈 없이 진행됐다.
“몰라서 묻는 거야? 예전엔 신전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쉽게 됐었지만, 지금은 다르거든.”
“유타칸에서 가장 많은 정보가 있는 곳.”
빙하고룡이 거들었다.
“너도 알아?”
“...나도 탐험가니까.”
“하...”
엔젤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때랑 성격이 완전 다르네. 혹시 이중인격 그런 거야? 샴드래곤 애들도 너보단 덜하겠다. 왜 그렇게 날카로워?”
“....”
생각해보니 엔젤은 번개고룡에게 사납게 굴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날을 세웠던 것은 자신이 숨긴 어둠의 드래곤이 타인에게 들킬 위험성에 의한 경계 반응이었다.
“그새 많은 일이 있었거든…. 무례하게 군건 미안해. 이상한 소문 낼 건 아니지?”
엔젤은 피로에 지친 듯한 표정에서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그들에게 사과했다.
“하는 거 봐서.”
“뭐가 궁금해서 찾아온 거야?”
“빛의 조각. 그거 어디 있어? 얘한텐 물어봐도 자신은 알려줄 수 없다면서 자꾸 잡아떼더라고.”
번개고룡은 필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필립은 지적당하면서도 그저 눈을 감으며 침묵하고 있었다.
“이거 봐, 이젠 내 말에도 대답을 안 하네.”
“...필립은 정말로 몰라. 빛의 조각은 하늘의 신전에서도 평범한 드래곤들은 알지도 못하는 것이니까.”
‘필립?’
“넌 어떻게 알아?”
“스승님이 있었잖아 바보야.”
번개고룡은 질문을 하는 고대신룡에게 비난하며 엔젤이 하는 설명을 계속 들었다.
“무슨 일에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해.”
“...진심이야?”
번개고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 내지마.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ep.28 잊을 수 없는 추억 (5)
“왜 포기하라는 거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그니까 왜. 자꾸 답답하게 굴 거야?”
번개고룡이 손가락에 힘을 주며 화를 참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번개고룡.”
“조용히 해. 나도 알아.”
“반대로 물어볼게. 포기하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뭐야? 그게 왜 필요한 건데?”
“다크닉스를 다시 봉인하기 위해. 그게 필요하니까.”
엔젤은 그것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필립이라는 스마트 드래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말…. 정말이야? 물론 낌새가 이상하긴 했지만 확실해?”
엔젤이 떨리는 말투로 하지만 눈빛은 아까보다 강인해진 상태로 물었다. 그 물음에 번개고룡은 더 당당하게 대답했다.
“확실해. 그리고 반드시 막을 것이고.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제우스가 갖고 있어.”
“...!”
번개고룡은 턱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왜 포기하라고 했는지 알겠지? 표정을 보아하니, 어리버리한 둘을 빼고는 이해한 것 같네.”
전에 헬 청장도 언급했었다.
빙하고룡은 유타칸을 돌아다니며 들은 소문으로 번개고룡은 불의 산의 경관으로써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평화의 마을에서만 있던 파워와 똑같이 빛의 신전에서만 지냈었던 고대신룡은 자세하게 알 수가 없었다.
“제우스가 왜?”
“...내가 너와 처음 만났을 때 했었던 말 기억나? 모든 드래곤이 고대신룡을 충성하는 게 아니라고.”
고대신룡은 아하! 하며 과거를 기억해냈고 그때 한 말을 읊조렸다.
“하늘의 신전에서는….”
“그런데 제우스는 사실 하늘의 신전만 다스리는 게 아니야. 빛의 신전을 제외한 그 외의 지역들에서 생기는 일도 그 녀석은 알 수가 있거든.”
“그건 알고 있지.”
“전혀 몰랐어.”
“....”
자꾸만 대비되는 반응에 엔젤은 지쳐만 갔다.
“한 드래곤만 말해줄래? 자꾸 헷갈리거든.”
“그럼….”
“아마 운이 나쁘면 바람의 신전에 있었던 일과 우리가 불의 산에서 했던 일이 전부 그 녀석의 귀에 닿았을지도 모르지. 뭐 헬의 말이 사실이라면 불의 산의 일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겠지만 워낙 믿을 수 없는 녀석이라.”
“불의 산?”
“제대로 난장판을 펼쳤거든.”
“난장판?”
엔젤이 궁금하다는 듯한 어투로 물어보았다.
“헬 청장을 때려눕혔어. 우리가 한 건 아니지만…. 그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
“와….”
“아 그래서….”
필립이 말을 하려다가 아차 하고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필립은 침묵하자 엔젤이 그가 말하는 것을 허락했다.
“말해줘.”
“아까 전 신전의 인원 몇몇이 불의 산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제야 이유를 알겠네요.”
“언제?”
“아마 지금쯤 돌아올 겁니다. 꽤 오래전이었으니까요.”
그 말에 번개고룡이 깜짝 놀랐고 조금 다급해진 기색으로 엔젤에게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제우스만 있어도 힘든데 그 녀석을 호위하는 드래곤까지 전부 뚫어낼 방법은 없어. 그러기도 싫고.”
“다른 방법…. 있어.”
“뭔데!?”
번개고룡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엔젤에게 달려들었다. 엔젤은 당황스럽다는 듯한 반응을 하고서는 천천히 다른 방법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신전의 지하감옥으로 너희들이 직접 들어가는 거야. 빛의 조각이 있는 장소는 거기가 가장 가깝거든.”
“...?”
다들 한순간 조용해졌다.
“...농담이지?”
“진짠데. 마침 죄도 있고.”
가만히 있던 고대신룡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고대신룡인걸 이용하면 안 되나?”
“...아 네가 있었지.”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필립은 화색이 돌던 번개고룡에게 말했다.
“이곳에 있는 드래곤들의 다수가 당신의 존재를 모를뿐더러. 그에겐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거든요…. 결국 그 삼지창에 닿으면 죽을 테니까.”
불길한 소리와 함께 엔젤이 정정하며 우리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무튼 제우스는 만나지 말라고. 정말 죽을지도 몰라.”
“네가 더 편한 방법을 소개해줬다면 이런 도박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미안 이게 최선이야.”
엔젤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처럼 느껴지자 번개고룡도 민망한 듯 그러지 말라며 사과를 했다.
“야…. 농담이야 농담. 나도 염치는 있어.”
“알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한 건 사실이니까. 꼭 성공했으면 좋겠네.”
엔젤의 배웅을 끝으로 그들은 정말로 신전의 경비원들에게 스스로 잡혀 들어가기로 했다.
“그들이 우릴 제압하려고 힘을 쓸 테지만 반항해서는 안 돼. 알겠지 파워?”
“알았다.”
파워가 끄덕이며 말했다.
“하…. 감옥이라니.”
번개고룡은 자신이 조만간 닥칠 미래에 대해 난감한건지 한숨을 끊임없이 뱉으며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드 드래곤과 나이트 드래곤으로 보이는 드래곤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골드 드래곤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나타났다.
“너희들이 불의 산 소동의 주범인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얌전히 지하감옥에 넣어주겠다.”
“하....”
번개고룡은 침을 삼키며 얌전히 그들을 따랐다.
-
“들어가있으십쇼.”
그들은 그대로 감옥에 내팽개쳐졌다.
“...윽! 정말이지, 빙하고룡을 제외하고서는 사실 피닉스가 다 한 건데 왜 내가 이런 신세를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빙하고룡이 움찔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대신 고대신룡이 웃으며 그녀에 혼잣말에 대답했다.
“우리가 꼭 죄를 지어서 이곳에 온 건 아니잖아? 빛의 조각, 그거 찾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었으니까…. 그리고 불의 피닉스를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도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번개고룡은 벌떡 일어서 철창을 잡았다. 바로 탈출하기 위해 번개를 사용해 철창을 녹여버리려고 했지만, 이상한 기운과 함께 번개는 나오지 않았다.
“...어라?”
ep.29 잊을 수 없는 추억 (6)
“왜 그래?”
의문을 품는 고대신룡에게 번개고룡은 자기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번개가 안 나와.”
“내가 해보겠다.”
파워가 주먹을 쥐며 감옥의 철창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기 위해 팔을 뒤로 뻗으며 자세를 취했다.
“굳이 힘 빼지 마라. 소용없다.”
하지만 파워가 주먹을 뻗기 전에 우리가 오기 전부터 감옥에 있던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너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어두운 그늘에서 서펜트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초록색의 머리는 차갑게 굳은 피가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건 얼굴 쪽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좀 더 피로감이 느껴지는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번개고룡은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렸다. 서펜트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주먹을 맞아주었다.
“뭐야 너? 안 피하네?”
번개를 두르지 못해서 그다지 아파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몰골이 예전보다 매우 초췌해 보여서 아주 약간이나마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해보니 그 마음은 사라지고 왜인지 후련함이 느껴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감옥에 온 이유를 굳이 설명해야 하나? 여전히 당돌하면서도 단순한 드래곤이군.”
“몇 대 더 맞자.”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에 번개고룡이 휘두르려던 주먹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서펜트는 피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리를? 네가 왜? 그렇게 죽고 싶었어? 말만 해. 내가 지금 능력은 안 나오지만..”
고대신룡은 흥분한 번개고룡의 양팔을 잡고 서펜트에게 물었다. 이 감옥에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올 것을 어떻게 예상한 것일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고대신룡의 말에 안심한 서펜트가 말을 이었다.
“그나마 이성적인 드래곤이 있어서 다행이군.”
“뭐?”
“....그대들의 목적이 다크닉스의 봉인인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아마 봉인에 필요한 마지막 재료인 빛의 조각을 가지러 온 거 아니었나?”
“감시하는 능력이라도 있어?”
“꼭 그걸 감시해야 아나? 본인이 멍청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지.”
“이게 또 맞고 싶은 건가?”
번개고룡이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둥거렸지만 고대신룡은 최대한 그녀를 붙잡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막지 마! 이거 놓으라고! 너 기억 잃었냐? 쟤 때문에 불의 산에서 그딴 일이 일어난 거라고! 파워! 고대신룡 좀 떼 봐!”
고대신룡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고대신룡조차 좋지 않았다. 서펜트는 그의 배를 단검으로 관통시켰고 그는 서펜트의 팔을 잘라내고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고대신룡. 지금 네 행동은 맞는 건가?”
이번에 파워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번개고룡의 말을 무작정 따르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고 고대신룡이 하는 그 행동에 의심하고 있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짧은 만남 속에서도 파워가 본 고대신룡은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 동료를 해쳤던 이를 가만히 둘 드래곤으로 보진 않았다.
“나도 서펜트 드래곤, 저 녀석 가만히 두면 안 되는 거 안다. 빙하고룡을 다치게 했고, 그 결과 번개고룡도 다쳤다. 하지만….”
바람의 산맥에서도 먼저 서펜트를 쫓으러 갔던 고대신룡이 지금 망설이고 있음을 파워도 느꼈고 그가 서펜트의 편을 드는 것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고대신룡이 그러는데 이유가 있을 거다. 안 그런가?”
“맞아. 가만히 있어 줘.”
“윽..! 이거 놓….”
고대신룡은 서펜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그 기묘한 느낌을. 그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익숙한 그 느낌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고대신룡은 지금 서펜트의 눈을 안다. 전에도 한 번 보았고 단 한 순간도 그 눈빛에 대해 질문을 멈춘 적이 없었으니까.
서펜트는 그를 혼자 두고 떠나간 형님의 눈빛과 닮았음을 느꼈다. 하지만 서펜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대신룡의 눈빛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라. 어린 고대신룡이여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알겠는데. 그대는 날 이해할 수 없다.”
“....”
“다들 왜 이렇게 저 녀석에게 관대해? 내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결국 다 나았잖아.”
가만히 있던 빙하고룡이 거들었고 그 말에 화가 난 듯 그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너는 화가 안 나? 네 보금자리가 거의 다 훼손되었고 정신까지 미쳐버리게 했는데…!”
“나는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상관없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게 확실하지만, 저 자에겐 뭔가 있어 보이니까. 그리고….”
“..?”
빙하고룡은 말을 하던 도중 망설이더니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시 서펜트에게 말했다.
“계획이나 말해.”
“계획?”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여길 빠져나간다는 뜻. 아니었나?”
“계획 따윈 사치지. 가장 쉬운 방법은 항상 그대들이 갖고 있었으니까.”
나를 포함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서펜트는 그런 우리를 보고 한숨을 푹 쉬더니
“그대들은 이곳 감옥의 특이한 점이 무엇인지 아나?”
“....번개가 나오지 않았어.”
“그래, 그게 왜 그런지는 알고 있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짜증이 날라 하니까 자꾸 돌려 말하지 말아줄래?”
“성격이 급하군….”
“고대신룡 놔 봐. 한 대만 때릴 게 제발.”
“...우리의 힘은 우리가 나고 자란 곳에서 나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래서 저 번개고룡은 불의 산에서, 저 파워는 희망의 마을에서 최적, 고효율의 힘을 낼 수 있지.”
“너는?”
“...말 해줘도 모를 거다.”
서펜트가 벽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이곳의 감옥은 제우스가 직접 만든 벽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되어있다. 그래서 너희들이 힘을 낼 수 없는거다. 힘의 공급을 완전히 끊어버리니…. 그래서인지 내 능력인 언령 또한 발동하지 않는다.”
서펜트가 방울을 꺼내 들며 흔들었다. 전에 그의 방울에 경험이 있는 번개고룡과 빙하고룡이 흠칫하며 놀랐지만, 그저 방울의 역할대로 방울 소리만을 낼 뿐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놀랄 필요는 없네, 더 이상 그대들을 해칠 마음은 없으니.”
서펜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왜 이것을 설명 했다고 생각하지.”
“그것을 구애받지 않는 드래곤은 없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서펜트는 답답한 듯 말을 그만하고 손을 올려 그들 중 하나를 집었다.
“그 외의 존재가 있지 않은가. 너희들 중에 그 제한을 무시하는 드래곤.”
서펜트는 고대신룡을 집으며 미소를 지었다.
ep.30 잊을 수 없는 추억 (7)
“나고 자란 곳이라 했었지….”
“어린 고대신룡이여, 그대는 어디서 나고 자랐지?”
1대 고대신룡은 아모르에 의해 빚어졌다. 그렇다면 2대 고대신룡은?
그의 탄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드래곤은 현재 1대 고대신룡. 하지만 탄생을 알고 있던 유일한 존재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알 수 있는 방도가 없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건 형님의 얼굴과.. 신전 안이었던 것만 기억나.”
그런데도 2대 고대신룡의 첫 기억이 빛의 신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당연한 사실이지, 고대신룡이니까. 하지만 이상한 건 그대가 모든 드래곤들이 갖는 보편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있다는 거다.”
드래곤은 나고 자란 곳에서 힘을 얻는다. 그럼 1대 고대신룡에게서 파생된 2대 고대신룡은 어디서 힘을 얻는가?
“빛의 신전….”
“이미 무너졌지. 그리고 그대의 형도 함께 사라졌다.”
고대신룡이 자란 빛의 신전은 무너졌고 그를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1대 고대신룡 또한 사라졌다. 그러면 원래 법칙에 따르면 2대 고대신룡은 힘을 공급받을 곳이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대는 여전히 빛나는 빛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지금은 거의 기억하고 있는 이가 남지 않은 아모르의 빛이.”
“아모르? 그게 말이 돼?”
번개고룡이 따졌다.
“그대들과 함께하던 드래곤이 고대신룡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건가? 현재는 사라졌어도 그 뿌리는 거스를 수 없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힘이다.”
“그래도 말이 안돼. 법칙을 거스를 순 없어! 1대 고대신룡도 다크닉스와의 싸움 이후 아모르와 연결이 끊기면서 힘을 잃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두 눈앞에 있는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모자란 일이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그대를 위해. 내가 생각해본 가설을 설명해주겠다.”
번개고룡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서펜트는 손가락을 펼치며 말했다.
“첫째, 빛의 신전이 무너졌지만 그건 우리의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 무너졌다 한들 존재는 하기에 힘을 공급해주는 것.”
“아니 그럴 수 없어. 빛의 신전 자체가 1대 고대신룡의 의해 유지되었으니까.”
“나도 안다, 말이 안 되는 걸 알지만….”
“결국 가능성의 문제겠지.”
서펜트는 뜸을 들이다 고대신룡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두 번째.. 애초에 1대 고대신룡이 죽지 않은 걸 수도 있다.”
“그럴리가! 분명….”
그 말에 고대신룡이 소리쳤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펜트는 가만히 앉아 차분하게 말했다.
“죽는 걸 목격했나? 마지막으로 그가 죽은 그 모습을 목격한 건지를 묻고 싶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사라진 상태이었어.”
“지금까지는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이군.”
서펜트는 만족한다는 듯 결론을 내렸다.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지?”
“살아있다면…. 현재 어떠한 이유로 행동에 제약이 생겼거나, 혹시 모르는 일을 위해 어딘가에 고의로 숨어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뭔가 짐작 가는 거는 없나?”
서펜트는 고대신룡을 보며 물었다.
“....아니 없는 것 같아.”
“그런가…. 그럼 잡설은 이제 그만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지. 어린 고대신룡이여, 그때 내게 보여줬던 그 검으로 감옥을 부수면 된다. 자네라면 손쉽게 가능할 테야.”
고대신룡은 서펜트가 말한 대로 빛의 검을 빈손에서 생성했다. 이젠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이 없어도 자연스레 그의 형처럼 무형의 빛의 검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감옥에는 여전히 흉악한 드래곤들이 갇혀 있으니, 다른 방에는 영향이 가지 않도록 하고 저 벽만 무너뜨리면 된다. 어차피 방음까지 되어 있으니 다른 소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고대신룡은 끄덕이며 검의 크기를 조절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고대신룡이 빛의 검을 휘두르자 감옥의 벽이 폭발하듯 파찰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뭐…. 뭐야? 어떻게 나온 거지!?”
감옥 앞에 있던 나이트 드래곤이 놀란 듯 소리쳤다.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아하니 수습 나이트 용이었나보다 서펜트는 그에게 달려가 방울을 흔들어 잠재웠다.
“빛의 조각이 있는 곳은 저쪽이다.”
“잠깐!”
떠나려고 하는 서펜트를 향해 번개고룡이 소리치며 잠시 멈춰 세웠다.
“우...우릴 왜 도와준 거야!?”
“?”
“지금까지 방해하고 심지어 내가 모은 재료들까지 몽땅 빼돌렸으면서 이제 와서 용서라도 바라는 거냐고!”
번개고룡은 어색해하며 말했다.
“허…. 참 기묘한 드래곤이군. 그동안 본 시간이 있는데 이것을 도움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지는 마라.”
“이상하잖아!”
“나는 그대들의 선택을 응원한다. 어쩔 수 없이 그대들과 마찰이 있었지만 나는 항상 그대들이 그자보다 먼저 그 목적을 달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서펜트는 그리고 그 여느 때와 똑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참 이상한 드래곤이다.”
“뭐가?”
그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파워가 입을 열었다.
“저렇게 깊은 슬픔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은 처음 본다. 마을에도 슬픈 드래곤 많았지만, 저 드래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뭐,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거겠지.”
고대신룡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서펜트는 이해할 수 없다며 딱 잘라 말했기 때문에 더 관여하진 않겠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렇겠지만, 보통 일은 아니었을 거다. 고대신룡이 형을 잃은 것처럼. 매우 많은 것을 잃어버린 듯한 눈이었다.”
“그래…. 나도 알아. ”
“너희, 도움 한 번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저 녀석 몸에 묻어있던 피 못 봤어? 이미 돌아올 수 없다고.”
번개고룡의 말에 파워와 고대신룡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침묵에 조금은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그녀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적어도 빛의 조각만 있다면 시간이 다시 걸리더라도 되돌릴 수 있으니까….’
번개고룡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빛의 조각이 있는 곳으로 보이는 공간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문 사이로 희미한 빛이 빠져나오며 감옥의 복도를 빛내고 있었다.
“열게.”
번개고룡은 긴장하며 문을 열었다. 문 끝자락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우중충한 감옥의 복도와는 대비 되는.. 도저히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공간과 그 가운데에는 그 공간을 비추고도 남는.
“저것이...”
빛의 조각이 있었다.
“빛의 조각이지.”
그건 빙하고룡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
고대신룡과 파워는 빛의 조각을 모른다. 하지만 그 공간에 있는 누군가가 그들을 대신해 말했다.
“그리고 결정체이며, 하늘의 신전을 유지하는 심장이자 원동력.”
쇠가 바닥에 끌리며 긁히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 나타나며 말했다.
“너희들의 존재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제우스...?”
제우스가 매우 거대하고 긴 삼지창을 머리 위로 한 바퀴 돌리며 바닥에 내려찍었다.
“쉽게 가져가진 못 할 거다.”
ep.31 잊을 수 없는 추억 (8)
“기껏 피해 왔더니…. 이럴 거면 감옥엔 왜 들어온 건지….”
최악의 상황. 번개고룡의 말대로 그들은 제우스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일부러 지하감옥으로 들어오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제우스가 있었다. 그는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번개고룡의 표정을 보았다.
“너희들이 이곳에 온 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인가?”
제우스는 반짝이는 노란 빛의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나는 하늘의 신전 드래곤이 아닌 이질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원래 같았으면 그저 골드 드래곤과 나이트 드래곤들을 보내 막았겠지만, 그 서펜트 녀석과는 다르게 난동을 부리지 않아 바로 잡아가는 것을 망설였다.”
“왜 나중에 그들을 보낸 건데?”
“너희들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불의 산에 알 수 없는 소동과 그 넓은 유타칸을 채운 그 빛의 원인을 조사한 그 결과가 너희를 향하게 한 것이지.”
고대신룡은 그날을 기억한다. 며칠 전 빙하고룡의 부탁으로 빛의 검을 강하게, 오랫동안 하늘을 향해 비춘 적이 있다. 그의 빛이 멀리 있던 하늘의 신전 너머까지 닿았다.
“하지만 그 고대신룡이…. 소동의 주범일 줄은….”
제우스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네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 그런 고대신룡이 아닐 거야.”
“누가 뭐라든 너의 본질은 그것과 같다. 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는 거라면 넌 도대체 뭐지?”
제우스가 물었다. 고대신룡은 그 질문에 답을 망설이며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검은 아니었지만, 감옥에서 스스로 검의 모양을 유지하며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는 빛의 검을.
“나도, 잘 모르겠어. 형님도 이 번개고룡도 내가 유일하게 다크닉스를 막을 드래곤란 것 빼고는….”
“고작 그런 이유로 이들을 따라온 건가. 참으로 단순한 드래곤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빛의 조각이 필요해. 비켜줄 수 없는 거야?”
제우스는 여전히 창을 땅에 꽂고서 그 기세를 유지했다.
“비록 연유는 알지 못하나, 너희들의 목적… 그 끝에 반드시 이것이 필요함을 나는 안다, 또한 이해한다.”
제우스의 말은 이어졌다.
“허나, 너희가 뜻을 좇듯, 나 또한 나의 뜻을 위해 이것을 지켜야 한다. 두 뜻이 충돌하였으니이제 부서지지 않는 자만이 끝내 남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삼지창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도전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삼지창에서 눈부신 노란색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제우스를 감쌌다. 그 기세는 그동안 만났던…. 그 피닉스보다도 강한 느낌을 들도록 했다.
“살아남아서 앞으로 나아가려거든 너희들의 모든 것을 몰아쳐야 할 것이다.”
긴장하며 번개고룡 또한 손에 번개를 두르며 말했다.
“절대 저 창에 닿지 마. 진짜 죽을지도 모르니까.”
-
“여기까지인가….”
한쪽 팔이 없는 상태로 피를 뒤집어쓴 서펜트 드래곤이 있었다.
“너는 던전의 드래곤이군. 어떻게 그 상태로 이곳까지 온 거지.”
“이유라…. 그런 건 없다. 본능에 따라 죽였을 뿐. 던전의 드래곤이 어찌하든 궁금하지 않겠지. 넌 신전의 드래곤이니까.”
“그런 거였나.”
그를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내 할 일은 하늘의 신전에 침입하는 위험한 것들을 제거하는 것, 이 자는 너무 많은 드래곤을 죽였다. 모든 던전 드래곤을 싫어하고 싶지 않았지만 던전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그 본능을 거스를 순 없던 것이었다.
“그들의 여정의 끝을 보고 싶었지만…. 결국 여기서 끝나는 건가. 뭐, 되도록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지만….”
나이트 드래곤은 그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
“그냥 한탄이다. 죽여라, 시간 끌지 말고. 자네 정도 되는 드래곤에게 저항할 힘은 없으니”
서펜트는 그렇게 팔을 벌려 자신을 무방비한 상태로 놓았다.
“...”
나이트 드래곤은 답지 않게 망설였다.
(“나 좀 죽여줄 수 있을까? 너라면 할 수 있어.”)
익숙한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라 그를 끝장내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서펜트에게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을린 자국.”
불에 탔다기보단 좀 더 강한 열로 인해 잘린 자국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런 힘을 낼 수 있는 드래곤은 그가 알기론 자신을 제외하고서 단 한 명뿐이었다.
“너, 고대신룡을 만난 적이 있나?”
“...쓸데없는 말 말고. 죽여라.”
서펜트의 말에도 나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방금 말한 그들이…. 고대신룡을 포함한 말이었나?”
“날 죽이라고 말했을 텐데!”
참다못한 서펜트는 자꾸 질문을 하는 나이트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힘이 다 빠진 상태로 서펜트 드래곤은 본래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나이트 드래곤은 서펜트가 공격하기 전에 그의 뒤로 움직여 기절시켰다.
서펜트는 지하감옥에서 깨어났다. 왜 나이트가 자신을 살려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고대신룡과 관련된 일임은 틀림없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건가.”
서펜트는 어두운 감옥의 천장을 바라보며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기어코 여기까지 와서 끝까지 방해하는군…. 어린 고대신룡이여.”
그들을 만난 서펜트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동안 그들의 목적을 방해 하는 게 그의 주된 일이었으니.
약점이 잡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용서받을 수 없었고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회피하는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결국 도망치기만 하는 거야?’)
“맞아, 난 두려웠던 거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거였나.”
바람의 신전에 있었을 때…. 그때 들렸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자기 내면을 투영한 그 목소리는 죄책감이었다.
‘끝까지 용서를 구할 수 없겠지.’
서펜트는 마침내 빛의 결정체에 도달한 그들은 그들의 여정이 곧 끝날 것을 예상했다. 비록 그 마지막을 지켜볼 수도 없겠지만 그는 더 이상 후회는 없었다.
그저 모든 책임을 전부 짊어지고 사라지는 것.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으니까.
‘....’
서펜트의 눈동자에서 G스컬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네를 높게 평가했었어. 하지만 지금 와서는 정말로 실망스럽군.”
그야 G스컬을 만나자마자 도망쳤지만 한순간에 따라잡혀서 일격에 목이 날아간 시점에서부터 발성 기관이 끊겨버렸고 더 이상 뇌는 사고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G스컬이 서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도망치는 것밖에 못 하는 건가? 보기 참 추하군. 차라리 그때 동족을 따라가자 그랬나?”
서펜트의 눈이 점점 빛을 잃어갔다. G스컬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갈 길을 갔다.
ep.32 잊을 수 없는 추억 (9)
번개고룡의 붉은 번개가 제우스를 향했다. 제우스는 번개를 삼지창으로 막아내고 창을 고쳐잡은 후에 달려오는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번개고룡은 방향을 다시 잡고 창의 리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제우스의 속도는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방향을 바꾼다 한들 제우스는 그녀를 따라왔다. 그의 삼지창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순간에 얼음기둥이 솟아나며 창을 막아냈다.
“얼음….”
“여전히 무모해….”
제우스는 중얼거렸고 빙하고룡이 한숨을 내쉬면서 손에서 냉기를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깜박인 순간 파워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다치게 두지 않겠다!”
파워는 제우스가 창을 휘두르려 하자 더 깊숙이 파고들어, 중간에서 그의 창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하게 틀어막았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서 빙하고룡은 삼지창에 얼음기둥을 꽂아 넣어 움직임을 봉했다.
“좋은 동료를 두었군.”
제우스는 힘으로 얼음을 으깨 부수고 삼지창으로 파워를 향해 찔렀다. 하지만 파워는 틈을 파고들며 삼지창을 팔에 끼워 잡아냈다.
“대단하군.”
창이 거세게 흔들렸지만 파워는 제우스의 힘마저 버텨내자 놀라며 그를 칭찬했다. 그리고 그 등 뒤로 번개고룡이 넘어오며 번개로 활의 모양을 만들면서 제우스에게 번개의 화살을 조준했다.
제우스는 창을 포기하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빙하고룡이 그의 발을 묶으며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잡았…!”
번개의 화살은 제우스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너무나 허무하게도 그의 손에 의해 전부 흩어져버렸다.
“전략은 좋았으나, 위력이 부족하군.”
제우스의 발을 묶은 얼음들이 부서지면서 제우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워 또한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번개고룡이 씨익 웃었다.
“뭐 잊은 거 없어?”
그녀의 웃음에 제우스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고대신룡은..?“
번개고룡을 쫓기 위해 원래 자신이 지켜야 할 것과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와의 전투가 아닌….
‘결정체…?!’
제우스가 빛의 결정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빛의 결정체는 멀쩡했고 아무도 그것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당해줘서 고맙다. 너라면 그럴 줄 알았거든.”
번개고룡의 말과 함께 다시 돌아보았고 제우스는 본인의 앞에서 빛의 검을 잡은 고대신룡과 눈이 마주쳤다.
“훌륭하….”
말이 끝나지 못한 채 빛의 검이 제우스를 베어냈다. 제우스는 그저 베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검격과 함께 벽으로 처박혔다. 벽이 무너지면서 제우스가 잔해에 깔렸다.
“잡은 건가..?”
번개고룡의 작은 중얼거림 후에도 무너진 잔해 속에서는 어떤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무모하단 말이지.”
“하지만 결국 해냈죠?”
번개고룡의 말에 빙하고룡이 피식 웃었고 그들은 빛의 결정체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다시 재료들을….”
“...나는 너희들의 전력을 보고 싶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해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잔해에서 큰 구멍이 생긴 상태였다.
“허나 아직 너희들은 목숨을 내걸 각오조차 보여주지 않는군."
그들의 머리 위에서 제우스가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제우스를 감싸는 빛나는 노란 기운이 눈에 띄게 거세지고, 압도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번개고룡은 이마에 맺힌 땀을 느끼면서도, 여유롭게 웃으며 받아쳤다.
”전력? 아까 네가 당황한 건 뭐였지?"
제우스의 시선이 번개고룡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내가 착각했군. 너희들에게 전력을 다하라 말했지만… 나부터 전력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너희들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우스가 손을 뻗더니 바닥에 있던 삼지창이 그의 손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무겁고 깊어졌다.
"이번엔… 단 한 순간도 생각할 틈을 없이 내 전부를 몰아쳐 주겠다."
“..이런”
제우스가 삼지창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휘둘렀다. 그리고 그들은 저것에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고 생각했다.
“너희들은!!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
공간째로 갈라버리는 참격이 그들을 향했다. 동작이 큰 만큼 빈틈이 생길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공격은 한 번에 하나의 참격이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참격들이 날아왔다.
빙하고룡의 얼음은 생성하자마자 부서지며 번개고룡의 빠른 속도로도 피할 수 없었다. 파워는 버텨보려고 했지만 결국 몸에 치명상을 입고서 쓰러졌다. 그 고대신룡도 빛의 검으로는 모든 참격을 막아내기엔 부족했다.
“부족하다…. 아직 그런 힘으론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아까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하고서 어느샌가 모든 상처를 회복한 제우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너…. 말조심해.”
번개고룡이 입과 몸 구석구석에서 피를 흘리며 몸을 떨고 있었지만, 아직 무릎을 완전히 굽히지 않는 상태로 제우스를 노려보았다.
“곧 죽을 이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제우스는 다시 창을 들어 올렸다. 번개고룡은 피해야 했지만, 제우스의 전력에 전투의 의지를 상실해버렸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녀를 도와줄 것 같은 동료는 남지 않았다. 전부 참격에 베여 그 고통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안타깝게 되었다, 너희들의 목적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직 때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그 뜻은 너희가 아닌 다른 이가….”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 큰 돌덩어리를 들어 올리는 건지 궁금했지만….”
“그저 저 단순한 돌 조각이 원인이었다니. 생각보다 시시하지 않나.”
G스컬은 제우스를 집어 던지고서 번개고룡을 바라보았다. 번개고룡은 쓰러진 채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한 지역의 왕이라는 자가 저렇게 시시하게 끝나는 것도. 참 볼품 없기마련이지. 안 그런가?”
G스컬은 소름이 돋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말로만 들었던 G스컬은 생각 이상의 끔찍한 기운으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보통 누군가 말을 하면 대답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G스컬은 잠깐 생각한 후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이건 예의가 없군.”
제우스에 참격에 당한 파워가 그의 뒤에서 나타났지만 G스컬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의 주먹을 받아내었다.
“번개고룡 건들지 마라!”
“드래곤들의 문화는 참 이해할 수 없어. 그 녀석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아무리 아까의 싸움으로 지쳐있어야 할지라도 G스컬은 그 파워의 팔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받아내고서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를 억눌러가며 다가갔다.
“이 작은 힘으로 감히 나를 잡으려고 한 건가? 아니 턱없이 모자라다!!”
G스컬이 파워의 팔을 꺾었다. 그 무엇에도 밀리지 않을 것 같던 파워가 고통에 소리쳤고 G스컬은 그대로 파워를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파워!!!”
ep.33 잊을 수 없는 추억 (10)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나? 난 또 벙어리인 드래곤이 있는 줄 알았건만…. 뭐 결국 팔을 뜯어내야 하는 건 똑같지만.”
G스컬의 검붉은 팔이 번개고룡의 팔 쪽으로 향했다. 겁에 질린 번개고룡의 모습을 보고서 그는 희열에 찬 듯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고통도 결국 다 한순간일 뿐일 테니.”
“G스컬!!!”
다행히 G스컬이 번개고룡의 팔을 뜯어내려고 하기 전에 고대신룡이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빛의 검을 만들어 돌진했다.
“어이쿠,”
그는 고대신룡의 외침에 팔을 다시 거두었고 그 덕분에 G스컬은 되려 자기 팔이 잘리는 것을 면했다.
“좋은 시도였다. 하지만 모든 시도가 성공….”
G스컬은 빛에 그을린 바닥을 천천히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방금 자신을 지나친 고대신룡의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고대신룡이 있었다. 그리고 G스컬의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동시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너…. 네가 어떻게?”
‘빛의 섬광이 유타칸을 뒤덮었던 그 날을 기억한다. 끔찍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순수한 빛이 모든 것을 감싸 안았지.’
운 좋게 살아남긴 했지만 온전하게 살아있진 못했다. 몸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는 것으로 끝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나. 고대신룡 두 마리를 전부 죽이는 값에 비해서는 효율적이지 않은가.
이제 그저 남은 힘으로 내 눈앞에 있는 성체 고대신룡 한 마리를 끝장내면 된다.
한 마리?
섬광 전에는 분명 고대신룡 두 마리가 있지 않았었나? 분명 성체 한 마리를 빈사 상태로 만들고 해치 한 마리만을 남겨놓았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성체 한 마리만 남은 거지? 또한 그가 쓸어버린 에메랄드의 군대들 또한 보이지 않았다.
G스컬은 혼란에 빠졌었다. 하지만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남은 한 마리라도 빠르게 끝장내고 갔어야 했다. 빛의 신전이 사라지지 않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계속 있다가는 소멸하고 만다.
그는 성체 고대신룡에게 손을 뻗었다.
“뭐야…?!”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이 고대신룡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G스컬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한 그는 빠르게 빛의 신전을 빠져나오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고....고대신룡? 네가 어떻게?”
G스컬은 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알 수 없는 오싹함이 그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에 느껴보는 그 오싹함이 다시 그를 지배하려고 했다.
(“지은 죄가 확실하지 않으니 여기서 끝내겠다. 하지만 다시 이런 일을 벌인다면….”)
G스컬의 기억 속에서는 현재 고대신룡과 같은 빛의 검을 든 드래곤이 그를 향해 명백한 살의를 드러내며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의 G스컬은 그날 머리만을 남긴 채로 살아남았다. 언데드인 덕분에 몸은 재생했지만, 그때의 그 공포는 지금까지도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분명 확실하게 죽였다고 생각한 그 드래곤과 흡사한 모습을 한 녀석이 다시금 그에게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G스컬…. 여기서 전부 끝내자. 네가 죽으면 다크닉스의 봉인이 풀리는 일도 없겠지.”
G스컬은 그의 말을 듣고서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았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아니…. 아니야! 저건 그때의 그 녀석이 아니다!’
“넌 그 어린 고대신룡이구나! 그래! 그 녀석은 확실하게 죽었어! 아니!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어! 내가…. 이 내가!!”
G스컬은 정신이 나간 듯 몸을 떨었고,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본 번개고룡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놈..’
“하....”
G스컬이 진정한 듯 차갑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붉은 안광으로 고대신룡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끝장을 내주겠다. 넌 고작 애송이에 불과하니까.”
G스컬은 고대신룡을 전부 파악한 듯한 말투로 도발했다.
‘다가오는 순간 일격에 끝내주겠다.’
그의 도발은 고대신룡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고대신룡은 금세 달려들 것 같은 자세와 안정되지 못한 듯한 상태로 요동을 치는 빛의 검을 들고서 G스컬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빛의 강도에 약간은 압도 되었지만 자신에게 바로 돌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고대신룡을 보고서는 G스컬이 빛의 검이 어떠한 형태도 잡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했고 안심한 듯 그를 비웃었다.
“고대신룡! 도망쳐! 아직 이놈을 막기에는 부족…!”
G스컬은 쓰러져 있던 그녀를 걷어차고서 그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역시 넌 그 녀석이 아니었던 거야. 감정에 휘둘려 어떠한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상태로 나를 어떻게 잡겠다는 거지?”
“난 형님이 아니라서, 형님처럼 행동할 수 없어.”
형님은 강했다. 그 강함으로 다크닉스를 봉인했고 유타칸의 평화를 지켰다.
G스컬이 자신의 아래 턱을 기괴하게 열면서 말했다.
“아니!! 결국 너 또한 아무것도 못 할 거다! 그 고대신룡도 3마리의 드래곤을 희생시켜놓고 결국 다크닉스를 죽이지 못했어! 그런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그 말을 나는 떨리는 두 손으로 무형의 빛의 검을 잡은 채로 G스컬에게 말했다,
“형님이 그런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거야. 형님은.”
형님은 지혜로웠다. 그 지혜는 빛의 신전을 다스렸고 나를 2대 고대신룡으로 만들었다.
“멍청하긴! 그놈은 그저 약해서 죽은 거다! 약한 힘과 그 오만함으로 동료를 죽인 거다! 빛의 신전이 무너진 것이고!”
G스컬의 손에서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기운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너 또한 이제 따라가게 될 것이다!”
G스컬은 여전히 망설이는 고대신룡을 향해 달려갔다. 번개고룡이 소리쳐보았지만 고대신룡에게는 들리지 않았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왜 형님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 나를 지켜낸 걸까. 그리고 그것을 모두 알았다는 듯한 그 눈빛마저도 여전히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한다.”)
꿈속에서만 들리던 그 목소리가 고대신룡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리고 고대신룡의 떨리던 손이 고대신룡 자신조차 알지 못하게 점점 진정되고 있었다.
‘어째서.’
그것은 대답에 관한 질문이 아니었다. 고대신룡은 그것과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자신의 물음은 그저 한탄으로 그칠 것으로 생각했다.
(“모두를 지켜낼 너의 빛이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은 고대신룡의 한탄에 기꺼이 답을 해주었다.
“...!?”
G스컬은 점차 안정 되는 빛의 검과 고대신룡의 기세를 보며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미세한 두려움이 다시금 그의 속에서 생겨났지만, 그저 찰나의 위화감이라 생각하고서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멈추라고!”
“소용없다!”
번개고룡의 번개가 G스컬에게 향했다. G스컬은 그저 한 손으로 번개를 쳐내고 다시 고대신룡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고대신룡이 G스컬에 앞에서 베어낼 준비를 끝마쳤다.
“경고는 단 한 번뿐.”
“!!!”
고대신룡의 일격이 G스컬의 몸통을 정확하게 베어냈다.
ep.34 잊을 수 없는 추억 (11)
G스컬의 어깨 부분이 통째로 잘려 나가며 빛과 함께 타들어 사라졌다. 그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고 얼굴에는 공포를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더듬거렸다.
“!!!.... 너는 설마…!?”
그저 어린 고대신룡이라 생각했던 결코 그 녀석과 같지 않을 것으라 생각한 그의 예상을 전부 뛰어넘었다. 단 한 순간도 예측, 예상할 수 없었던 그 드래곤이 다시 그의 앞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을 깨달은 G스컬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고대신룡!!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던전에서는 죽고 죽이는 게 당연한 거였어!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그리고 고대신룡은 손을 뻗으며 사과를 하는 G스컬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자신의 호소가 통한다는 것으로 이해한 G스컬은 머리를 땅에 박으며 말했다.
“다시는! 던전 밖으로 나서지 않겠다! 너희들을 더 건들지 않고 이곳에서 손을 떼겠어! 그…. 뭐야 그래! 다크닉스! 다크닉스도 부활하지 않을 거다! 날 살려만 다오! 나…. 나도 살 권리를 줘야 하지 않겠나…?”
G스컬은 힐끔 고대신룡의 반응을 확인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자신을 바로 베어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통한 것이라 봐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고대신룡이 입을 열었다.
“다크닉스의 부활…. 그리고 살 권리라….”
“그래!! 그냥…. 보내주면 조용히…. 가만히 살겠다!! 한 번만 봐줘!”
G스컬이 기뻐하듯 고개를 들었다.
“근데 나는 어려서 그런 거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고대신룡은 이미 G스컬을 다시 한번 베어내기 위해 검을 들었고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끝이다. G스컬.”
빛의 검은 G스컬의 목을 향했다. 그러나 빛의 검은 G스컬을 베어내지 못했다. 간소한 차이로 그들이 있던 공간이 크게 흔들려 검은 목을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고대신룡은 당황하며 큰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하하!! 역시 아직 어린 고대신룡이군! 결국 감정에 휩쓸려버려서 중요한 걸 잊어버렸던가?!”
고대신룡은 G스컬의 몸통을 정확하게 베어냈다. 그리고 그의 검은 G스컬을 포함해 그들이 있던 방마저 갈라버렸다. 검격은 빛의 결정체를 담고 있던 기둥을 지나쳤고
무너져 버린 기둥은 더 이상 빛의 결정체를 가두지 못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버린 빛의 결정체는 더 이상 하늘의 신전을 유지할 힘을 공급할 수 없었고
이제 하늘의 신전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머뭇거리지 말았어야지! 너의 그 머뭇거림이 유타칸을 멸망으로 이끄는 거다!”
G스컬은 혼란을 틈타 바닥에 떨어진 빛의 결정체를 향해 온 힘을 다해 기어갔다. 그의 손이 빛의 결정체에게 거의 다 다가갔을 때 바닥이 부서지면서 추락하기 시작했고 G스컬은 빛의 결정체를 놓쳐버렸다.
“젠장!”
추락하고 있는 것은 G스컬 뿐만이 아니었다. 기절한 빙하고룡과 파워가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고 하늘의 신전 지상에 있던 드래곤들이 날개를 펼쳐 신전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늘의 신전 전체가 무너지며 추락하고 있었다.
번개고룡도 힘겹게 날개를 펼쳤다. 거대한 잔해들을 피해 가며 추락하고 있는 빙하고룡과 파워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역시 추락하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빙하고룡! 파워!”
그들을 깨우기 위해 소리쳐 보았지만, 소용 없었고 심지어 운은 그녀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번개고룡에 날개가 떨어지는 신전 잔해에 뚫리게 되면서 이제 그녀 또한 추락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온전한 상태로 남은 고대신룡은 공중에서 잔해들을 피해 가며 빛의 결정체를 찾기 시작했다.
‘신전의 붕괴는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빛의 결정체가 G스컬에 넘어가는 것만은….’
하늘의 신전이 무너지더라도 그것을 유지하고 있었던 빛의 결정체만 있다면 그 기반을 통해 신전 드래곤들이 힘을 잃지는 못하도록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그 기반마저 사라지는 상황.
고대신룡은 그 상황만은 막고 싶었다. 그리고 잔해 속에서 빛을 내뿜으며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빛의 결정체를 발견했고 즉시 잔해들을 헤쳐 나가며 날아갔다.
“안타깝군!”
하지만 그것을 발견한 건 G스컬도 마찬가지였고 그것을 먼저 잡은 것도 그가 먼저였다. 그런데 그때
“이건…?!”
G스컬에 손에 닿은 빛의 결정체가 스스로 빛을 내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잔해와 함께 터진 빛의 결정체는 메케한 연기로 하늘의 신전을 감쌌다.
그들은 추락했다. 고대신룡은 폭발에 휘말려 날개에 상처를 입었고 추락으로 뇌에 이상이 생겼는지 귀에서는 이명이 들렸고 눈은 초점을 잡지 못해 흐릿했다.
“으....”
잔해에 폐가 눌려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그저 앓는 소리를 내며 눈 앞에 빛의 결정체가 있음에도 손을 뻗는 것조차 힘들어 가져갈 수 없었다.
“이런 장치가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마지막까지 스릴 넘치지 않았나?”
불행하게도 얼굴의 반이 뭉개져 내려갔지만 G스컬은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서 절망을 지켜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뭐가 웃긴 거지? 다크닉스를 부활시키려면 빛의 결정체가 필요한 게 아닌가?”
고대신룡은 역으로 여유롭다는 듯 웃었다. 빛의 결정체가 피아식별할 수 없는 폭발을 일으킨대도 G스컬이 빛의 결정체를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키킥 여전히 오만하구나, 어린 고대신룡이여 내가 빛의 결정체를 만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꺼낸 것 같군?”
그러나 G스컬은 그를 비웃으며 계속 예상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설마’
“제대로 보았군! 나는 이것을 만질 수 없는 게 맞다.”
고대신룡의 예상대로 G스컬이 빛의 결정체에 손을 갖다 대려고 하자 빛의 결정체는 폭발하려는 듯 흔들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멀어지자 그것은 잠잠해지며 빛의 세기 또한 사그라들었다.
“제우스, 이상한 술수를 쓴 것 같더군. 정말 까다로운 놈이야.”
G스컬은 있지도 않은 혀를 차면서, 쯧 이라는 말을 하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반쯤 갈려버린 턱을 잡고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군. 내가 부활에 뭐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나?”
고대신룡은 그때 자신이 모든 것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들이 재료로 모았던 것은 다크닉스의 부활을 막기 위한 봉인의 재료였다. 어째서 G스컬과 서펜트가 그들의 재료를 바꿔가며 가져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분의 부활에 이것은 필요하지 않아,”
G스컬은 그저 보잘것없다는 식으로 그것을 보았다.
“나의 힘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는 상태에서 직접 이곳에 온 건 너희들이 이것을 가져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너를 제외한 세 마리는 이제 잔해에 깔려 보이지 않고 너 혼자서는 이제 재료를 모으기도 힘들 테니….”
G스컬은 고대신룡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소름이 끼치는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죽음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불의 산에서 ‘어쩔 수 없다’라는 무력감을 느끼고 포기하려고 했었다. 운이 좋게 금오 경감과 피닉스 덕분에 그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불의 산이 아니다. 여정을 같이 했던 드래곤들의 생사를 알 수 없고 그들 중에서 하늘의 신전에서 믿을 만한 동료가 있던 것도 아니다. 고대신룡은 정말로 이제는 더 그들을 도와줄 드래곤들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그래 그 표정이다!! 모든 것을 잃은 허탈함! 무력감! 죽을 듯이 쓰라린 그 고통을 너도 느껴보아라!!”
G스컬은 끝까지 차오르는 희열과 쾌락에 만족한 듯 더욱더 고대신룡의 표정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만족스럽구나, 어린 고대신룡이여 너의 첫 만남부터 끝까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하지만 너를 살려둘 수는 없다. 항상 고대신룡은 예상할 수 없었거든. 안타깝구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드래곤이여.”
고대신룡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늪처럼 깊은 무력감이 그를 삼켰다. 그의 표정을 본 G스컬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그를 이제는 보내주려고 한다.
“........그러게, 멸망을 왜 막으려 한 거지? 가만히 있었다면 조금은 더 살 수 있었던 것을”
G스컬은 손에서 붉은 기운을 내뿜어져 있었다. 그의 형을 끝장냈던 일격을 준비했다.
“이봐요, 환자는 건드는 거 아니거든요?”
“!!”
엔젤은 양손에 작은 빛 만들어 무너져내린 G스컬의 몸에 쑤셔 넣었다. G스컬의 몸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오며 폭발했다. 하지만 그를 제압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네가 감히!!”
G스컬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는 엔젤을 향해 붉은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때처럼 제트가 나타나며 G스컬을 밀쳐냈고 엔젤이 다치는 것을 면했다.
“제트..!”
하지만 제트의 몸은 멀쩡하지 못했다. 그저 그 기운에 닿았다는 것 자체로 제트의 몸이 검게 물들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가며 몸에 힘을 주는 것이 힘들었다.
“...고작, 고작 그 한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인가? 참으로 안타깝구나!!”
G스컬이 아까보다 훨씬 강한 기세로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엔젤은 눈을 감았다. 죽음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 고대신룡이 그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순 없었다.
비록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 사이에 고대신룡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아주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몸을 던졌지만 너무나도 볼품없는 죽음이라 생각했다.
‘역시….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충분했다. 그 한순간.”
무언가 튕겨지는 소리가 나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들의 앞에서 들렸다.
ep.35 잊을 수 없는 추억 (12)
날개가 잔해에 관통당하고서 추락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무언가에 맞았던 것이 기억난다. 아무래도 그 후에는 기절한 것 같았다.
아직 생각이란걸 할 수 있는 걸 보면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능력도…. 써지지 않았다.
‘평범한 잔해가 아니라, 감옥의 재료로 쓰였던 돌들에 의해 깔린 건가.’
팔과 다리에 아무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출혈도 조금 심한 것 같다 이대로는 점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 죽은 거랑 뭐가 다른 건지….’
그녀는 어둡고 점점 추워지는 그 공간에서 천천히 생각했다. 알 수 없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기절한 뒤 빙하고룡과 파워는 어떻게 됐을까, 살아있긴 한 걸까. 고대신룡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많은 생각이 지나쳤다. 그리고 어쩌면 G스컬에게 전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두를….
“---”
밖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작은 희망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대신룡이…. 살아있나? 그렇다면 애들도…!’
번개고룡의 머리 위에 있던 잔해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고대신룡! 나 여깄어!”
그녀는 목이 쉬었지만 어떻게라도 들리길 바라며 최대한 큰 소리로 고대신룡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 잔해는 움직임을 멈췄다.
“어? 고대신룡! 나 여기 있다고!”
“아무래도…. ---야겠군.”
“?”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고 난 후에 그 잔해의 절반이 짧은 빛줄기와 함께 순식간 잘려 나가 쪼개졌다.
“고대신룡! 성공한 거야!?”
그는 고대신룡이 아니었다. G스컬도 아니었다. 온몸에 회색의 갑주를 낀 나이트 드래곤이 그녀의 위에서 나타났다.
“뭐라는지 모르겠군…. 네가 번개고룡인가.”
“,,,?”
“당장 던전으로 날 안내해라.”
번개고룡은 황당하기만 했다. 대뜸 처음 보는 드래곤이…. 그것도 하늘의 신전의 나이트 드래곤이 던전으로 안내하라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그게 아니죠! 꺼내 줘야죠.”
“아.”
엔젤이 뒤에서 그의 등을 치니 나이트 드래곤은 아차 라는 듯한 반응을 하고 재빠르게 검을 뽑아 몇 번 휘두르고선 번개고룡을 잔해와 분리했다.
“아…. 아! 부러진 것 같아!”
“엄살이 심하군.”
“아니 진짜로~!”
나이트 드래곤은 한숨을 쉬더니 몸에서 미세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약간은 고통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고 그제야 번개고룡은 얌전히 그에게 업힐 수 있었다.
“운 좋게 살아남았군. 너도 고대신룡의 동료인가?”
번개고룡은 나이트 드래곤의 부축을 받고서 밖으로 빠져나오는 사이에 나이트 드래곤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근데 내가 갑이야.”
“재밌는 농담이군.”
“진짠데.”
밖으로 나온 번개고룡은 우선 주변 환경을 살펴보았다.
“처참하네.”
보자마자 나온 말은 그거였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개판 하늘의 신전은 무너지고 여러 드래곤이 잔해를 피하지 못하고 깔려 죽었다. 그중 살아남은 일부마저 이제는 터전을 잃었으니 노쇠하게 되고 운 나쁘면 야생 몬스터에게 죽게 될 것이다.
나이트 드래곤은 번개고룡을 들고서 엔젤을 따라갔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곳에서는 20을 넘기지 못하는 드래곤들이 누워있었다.
“하...”
그곳에는 심각하게 다친 것으로 보이는 빙하고룡과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흔들었지만 약간의 고통을 호소하는 파워도 있었다.
“하하…. 살긴 살았구나.”
“너도 저기 누워.”
“나도?”
“치료받아야지. 다리 부러졌잖아? 시간 없어, 빨리.”
자꾸 재촉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일반은 그녀의 말에 따랐다. 전에 보았던 나이트 드래곤과 제트드래곤이 전부 모였다고 말한 뒤에 그녀는 끄덕거리고선 양손에 마주 잡고서 조심스레 펼치기 시작했다.
“좋아요. 아직 괜찮아요..”
그녀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 가는 손바닥 사이에서 조그마한 빛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야…. 너?!”
엔젤은 땀을 흘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엔젤은 정신을 붙잡으며 그 빛의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 빛이 겨우 주먹만 해졌을 때 손바닥을 누워있는 드래곤들에게 향하자 빛의 크기가 확장되며 그들에게 내려졌다.
‘상처가….’
번개고룡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드래곤들의 상처가 점점 아물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었는지 파워는 깨어났지만, 여전히 빙하고룡의 상처는 완전하게 치유되지 못했다.
“엔젤님!”
제트 드래곤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량의 코피를 쏟으며 쓰러진 엔젤을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늘의 신전의 드래곤이었던 그녀가 거의 사라져가는 힘으로 이 정도를 끌어내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잊었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고대신룡이 있었다면…?’
“고대신룡?!”
아까부터 왜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내가 깨어났을 때부터 찾았지만 하늘의 신전의 처참한 환경과 급한 상황이라는 이유로 깜박하고 말았다.
고대신룡이 보이지 않는다.
“번개고룡.”
파워와 나이트가 동시에 그녀를 불렀다. 나이트 드래곤은 잠깐 뒤로 물러나 눈을 감으며 파워에게 먼저 양보하는 듯한 것으로 보였다.
“번개고룡, 빙하고룡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가?”
파워가 빙하고룡의 상태를 이미 파악한 건지 그러한 낌새로 물어보았다. 심각한 수준의 상처는 본래 살던 곳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 아마 그게 엔젤에게 받는 치유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어차피 엔젤이 더 치료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것 같았지만.
“아니, 그건 나도 몰라.”
“그럼 파워, 빙하고룡 평화의 마을로 데려가야겠다. 그곳에서 빙하고룡 안전하게 데리고 있겠다. 번개고룡은…. 안심하고 다녀와라.”
“뭐? 어딜?”
“파워하곤 이미 이야기가 되었다.”
파워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나이트 드래곤이 대신 말을 이었다.
“언제 다크닉스가 깨어날지 모른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날 던전으로 안내해라. 고대신룡은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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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또 온다. 준비해라!”
헬 청장의 부상 이후로 불의 산은 하루도 조용한 날 없이 흘러간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던전의 드래곤들이 어떻게든 헬 청장을 노려보겠다면서 불의 산에 침입한다.
주로 오는 것은 심벌즈 몽키 무리나 드워프들인데. 심벌즈 몽키는 문제가 없으나 드워프들은 화염에 내성이 있어서 화염 내성을 뚫고 전부 불태워 버리는 헬의 불꽃이 없는 그들의 입장에선 조금 까다롭다.
심벌즈 몽키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갈색 원숭이가 후발대에서 군대를 몰며 지휘를 맡고 있었다.
“하하! 너희 대가리만 없으면 그분의 계획이 더 차질 없이 진행되겠지!”
“하하하하하!”
승리를 확신했다고 느껴지며 웃는 순간, 그의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며 같이 웃고 있었다.
“아…. 근데 뭐가 그렇게 웃겨?”
피닉스가 우두머리 심벌즈 몽키를 미소 지으며 보았다.
“어?”
그게 그 심벌즈 몽키의 유언이었다.
불의 산에는 헬 청장만 있는 게 아니었다. 피닉스는 전신에 붉은 불꽃을 두르며 불의 산에 침입한 심벌즈 몽키와 드워프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피닉스의 불꽃에 심벌즈 몽키와 드워프들은 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빠른 속도로 제거되었다.
악바리를 물고 한 드워프가 겨우 뒤에서 피닉스를 기습했다. 도끼는 피닉스의 몸을 두 동강 냈다.
“으악!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피닉스의 형태가 갑자기 이상해지며 고통을 호소하는 듯한 말을 했다.
“이…. 이럴 리가.”
하지만 그건 정말로 아파서가 아닌 드워프를 놀리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 두 동강 난 그녀의 몸이 일렁이며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너, 불 본 적 없어?”
“예?”
“칼로 불을 베면 꺼지겠냐고.”
그리고 그녀는 드워프의 머리를 발로 차버리자 머리가 사라졌고. 몸통만 남은 그 육체는 천천히 쓰러졌다.
헬 청장이 없는 불의 산은 피닉스를 주축으로 돌아갔다. 피닉스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가 아니라. 가장 까다로운 녀석이 매일 찾아와 귀찮게 했다.
(“어쩔 수 없는 행동이긴 했지만 한 지역의 수장을 그렇게 한 것에 책임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어쩌라고!”)
(“불의 산 식구들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피닉스님.”)
“.....재수 없는 새x”
“저 말입니까?”
“어.”
“....깔끔하게 정리하셨군요.”
“내가 누군데, 이제 일 끝났지? 헬 그 새x도 이제 깨어났을 거 아니야. 설마 일하기 싫다고 떙깡부리는건 아닐 테고.”
금오는 말이 없었다.
“...아니지?”
두 번째의 물음에도 그저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는 금오 경감을 보며 피닉스는 조금 언짢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제 더 신경 쓰지 않으려 마음을 먹었다.
“나 이제 찾지 마라.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땐 식구고 뭐고 없어.”
차갑게 돌아서는 피닉스를 바라보며 금오 경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관심 없다~”
“번개고룡이 죽습니다. 당신이 제 얘기를 듣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의 말에 멈칫하더니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새빨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얘기해봐, 죽기 싫으면 뭐든지.”
Ep.36 잊을 수 없는 추억 (13)
“그럼….”
피닉스는 설명하려는 금오 경감을 기다려주지 않고 우선 목부터 잡았다. 깜짝 놀란 그는 기침하며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녀는 금오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만족이라도 한 듯 웃었다.
“왜, 이건 예상 못했어? 이 정도는 각오는 되어있었어야지.”
“꽤 과격하십니다….”
금오 경감이 두 손으로 피닉스의 손에 저항하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직 안심하지 마 안 끝났으니까.”
피닉스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단숨에 자신의 보금자리가 있는 불의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설명해봐.”
피닉스는 금오 경감을 대충 바닥에 던지며 내려주었다. 금오 경감은 금빛 실로 그물을 만들며 자신을 보호하고서 땅에 착지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말을 한 겁니다.”
금오 경감은 따가운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 가능성... 그럼 지금 내가 개 빡쳐서 너 죽일 가능성은 생각 안 했냐?”
“피닉스님이라면 분명 가능하실 겁니다.”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던전으로 가야 합니다.”
“아니 애초에, 너 ‘이런’거 못 알려준다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알려주는 이유가 뭐야?”
피닉스는 예전에 금오 경감이 미래를 보고 예지하는 듯한 말을 듣고서 어디까지 아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고 금오 경감은 분명 알지도 말해줄 수도 없다고 한 적이 있었다.
“분명 그렇게 알고 있는데…. ‘알려줄 수 없다고’ 근데…. 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피닉스가 발끝에서부터 점차 강렬한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알려줄 수 없다 한 것은 제가 말한다 한들 그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에 피닉스는 전에 금오가 말한 것을 떠올리고서 불꽃의 세기를 약간 낮추었다.
“반작용….”
전에 금오는 그렇게 말했었다.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청장님이 그렇게 되신 건 그 흐름을 막으려는 반작용입니다.”)
“기억하시는군요.”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피닉스의 뇌리에서 여전히 빠져나가지 않았다.
“뭐가 바뀐 건데?”
“정해진 길, 그 길 외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당신이 이제 그 일부가 되었습니다. 가능성이 당신의 존재를 포용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좀 쉽게 말해봐.”
“적어도 반작용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불의 산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이가 있었더라면 현재는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나는 불의 산 밖에선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데?”
피닉스는 불의 산의 기운을 전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드래곤이다. 불의 산으로 정의된 공간 안에서는 그녀는 끝없이 불타오를 수 있으며 그 말은 죽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불의 산 밖에서는 그녀 또한 평범한 드래곤처럼 힘을 제대로 쓸 수 없고 죽을 수도 있다.
“정해진 길…. 그 길 속에 있는 작은 일을 비틀기 위해서는 반작용을 뛰어넘는 대가가 존재합니다. 번개고룡의 죽음을 감내하기 위해서 당신은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습니까?”
“하…. 이 귀여운 새X가..”
피닉스가 해탈한 듯 고개를 숙이고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어깨를 들썩였다.
“선택은 당신의 몫. 당신은 번개고룡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까?”
“...해”
“뭐라 하셨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난 그 애를 위해 다 걸 수 있어. 그니까 말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금오 경감은 피닉스를 불의 산 외곽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근데 너, 경감이란 놈이 불의 산 밖으로 와도 되는 거야?”
생각해보면 금오도 불의 산에서 그리 낮지 않은 직급을 갖고 있었다. 피닉스는 그 높은 위치에 있는 지휘관이 사라지면 분명 타격이 클 것으로 생각했다.
“다들 잘할 겁니다. 저 없이도 말입니다. 더 이상 무력한 아이들이 아니니까요.”
“....말 되게 이상하게 한다. 더 안 만날 애들처럼 말하네.”
“그렇습니까?”
금오는 그렇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불의 산의 공간으로 정의되었던 불의 산의 외곽에 도착했다.
“어떻습니까. 반작용이 사라진 느낌이 드십니까?”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왔을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번개고룡을 만나기 하루 전이었으니
아마 일주일 정도 됐을 것이다. 그때 느꼈던 힘과 비교하자면….
“몸이 살짝 더 가벼워진 느낌이야.”
“아마 불의 산을 나오는 것 자체로 당신은 반작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대로 움직이려고 마음 먹었었더라면 분명 더 큰 반작용으로 당신을 억압했을지도 모르죠.”
“그건 생각하기 귀찮고. 어디로 가면 되는데. 지금 이 상태면 어디든 하루도 안 돼서 갈 수 있을 것 같거든.”
이 전에 피닉스는 약화 된 힘으로 인해서 모든 성체 드래곤이라면 반나절도 안 걸려서 돌 수 있는 유타칸을 혼자서만 사흘을 걸쳐 회복해가며 돌아다녔어야 했다. 그런 피로함에 피닉스는 외각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다.
“전에 한 번 가보신 적 있을 겁니다.”
“내가 밖에서 가본 적 있는 곳이라면…. 던전?”
금오는 피닉스의 유추에 다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좋아, 일단 최대한 빨리 가야겠지. 안내해, 나 길 몰라.”
“전에 가본 적 있지 않았습니까?”
피닉스는 으쓱대며 말했다.
“그때도 번개고룡이 안내해줬어, 전에 헬이랑 갈 때도 네가 해줬었잖아. 난 불의 산 아니면 길 잘 안 외워. 갈 일이 얼마나 있다고.”
“아.”
-
“고대신룡이 왜 던전에?”
“날 따라와라.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걸 봐야 한다.”
나이트 드래곤은 번개고룡이 쓰러졌었던 자리로 돌아왔다.
“왜 여기로 다시 오는데?”
그는 그곳을 조금 서성였다.
“잠깐…. 여기 오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번개고룡은 그곳을 다시 오니 기분이 찝찝했다. 단순히 자기가 죽을 뻔했던 장소였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이트 드래곤은 그 장소에서 조금 더 움직인 후 걸음을 멈추고 번개고룡을 불렀다.
“여길 봐라.”
“이건….”
나이트 드래곤이 부른 곳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잔해도 시체도 그저 이상하게 회백색으로 타들어 간 잔디들이 있을 뿐.
“텅 비었잖아.”
하지만 그곳의 기운은 역겨울 정도로 불쾌한 느낌이 났다.
“근데 여기…. 기운이 왜 이래? 좀 불쾌한데…. 뭔가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것….”
“알아볼 수 있겠나?”
“아까부터 자꾸 뭐를.”
나이트 드래곤이 바닥을 신발로 툭툭 건드리자 붉은색의 빛을 내며 숨겨져 있던 거대한 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탁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거대한 법진.
이것 때문에 번개고룡이 그 불쾌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우욱...”
번개고룡은 역겨움을 참고서 그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이게 왜 여깄지?”
“알아볼 수 있겠나?”
“모양을 봐서는 순간이동을 위한 것 같은데….”
그녀는 법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법진의 존재 의의를 고민해보았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설마….”
그리고 나이트 드래곤이 말을 꺼냈다.
“네가 깨어나기 전, 난 엔젤과 제트 드래곤을 공격하려던 G스컬을 가까스로 막아냈지.”
-
“충분했다. 그 한순간.”
나이트 드래곤이 G스컬의 팔을 막아내며 그들 앞에 나타났다.
“하! 또 누군가 나타나셨나?!”
나이트 드래곤은 G스컬을 멀리 밀쳐내며 엔젤과 제트 드래곤을 호위했다.
“뒤로 물러서라.”
엔젤은 조용히 다친 제트 드래곤을 잡고서 뒤로 물러났다.
“...조금 놀랐지만, 고작 하늘의 신전의 나이트 드래곤이라니…. 그저 운.좋.게 막아 낸 것 두고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봐라! 그 약해 빠진 검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고대신룡이 아니라면 날 잡을 수 없다고!”
G스컬의 말처럼 나이트 드래곤의 검이 그 일격을 버티지 못했는지 뒤늦게 금이 가기 시작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
“....!”
그는 부러진 검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검을 잡았다. G스컬은 그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돼, 내가 고작 하늘의 신전 드래곤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고?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놈은 고대신룡이 아니다!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일 거야!’
G스컬은 아까와 같은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건 예상할 수 없는 그를 막은 드래곤이 고대신룡이라는 특이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저 하늘의 신전 드래곤이 자신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기세는 좋으나…. 기세만으로는 날 죽일 수 없을 거다! 그저 하늘의 신전의 드래곤이여!”
G스컬이 손에서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나이트 드래곤에게 돌진했다.
“죽어라!”
“오만하군.”
나이트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너희들이 싫다.”
나이트 드래곤의 부러진 검에서 조금씩 반짝이는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커지며 모양을 잡기 시작했고 모여든 빛은 부러진 검을 대신하여 빛나기 시작했다.
“다크닉스의 추종자여, 너는 이곳에 오면 안 됐다.”
Ep.37 잊을 수 없는 추억 (14)
“잠시 멈추죠.”
날던 도중 금오가 비행을 멈추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뭐야? 더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혹시라도 늦으면 어떡해?”
피닉스도 따라내려 왔지만 갑작스러운 금오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조금 쉬도록 하죠.”
금오는 바람의 산맥 외각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어두운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으므로 피닉스는 금오에게 불을 지필 수 있는 나뭇가지 정도를 모아오라 시켰다.
“불만 있냐?”
금오의 한 손에서 대량의 금빛 실 가닥이 생기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실들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다지 밝게 빛나고 있진 않았고 피닉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금오를 바라보았다.
“어쩌라고.”
“아마, 불에 탈 겁니다.”
금오는 시선을 회피했다. 피닉스는 여전히 황당할 뿐이었지만 더 말을 하기엔 귀찮았기 때문에 대충 손가락을 튕겨 그 실에 불을 붙었다.
작게 타오르던 불은 순식간에 커지더니 어두운 밤도 밝힐 수 있었다.
‘이게 왜 되지.’
피닉스는 불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자신의 꺼져가던 불의 열기를 다시 모으다 갑작스럽게 생각난 것이 있어 금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금오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번개고룡은 왜 던전에 갔는지 말해줄 수 없냐? 혹은 누구랑 갔는지만이라도…. 아니다 무조건 걔네들이랑 갔으려나?”
“던전에 고대신룡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금오가 말해주지 않을까봐 눈치를 보는 피닉스였지만 그녀의 예상외로 금오는 순순히 말해주었다.
“뭐?”
피닉스가 벌떡 일어섰고 피닉스에 감정을 내비치는 듯 불길도 좀 더 세진 것 같았다.
“고대신룡이 왜 던전에 있어? 걔 혼자 갔어?”
“그 누구도 그곳에 스스로 간 것이 아닙니다.”
“똑바로 말해.”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움직여야 할 때는 지금이 아닙니다.”
“어떻게 확신하는데?”
“우리보다 더 확실한 드래곤이 그녀와 함께 있으니까요.”
피닉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누군데.”
“모든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드래곤이 있습니다.”
“자신의 동족과 동료들 그리고 가장 소중했던 자신의 친우의 죽음을 막는 힘이 있음에도 오로지 지금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던 드래곤이 그녀의 곁에 있으니까요”
-
나이트 드래곤은 그대로 G스컬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맞받아쳤다. 당연하게도 G스컬은 나이트 드래곤의 빛의 검을 막을 수 없었고, 그대로 나머지 한쪽 팔마저 빛의 검에 의해 잘려 나갔다.
‘어떻게 고대신룡도 아닌 놈이 빛을?’
짧은 순간에 부러져 있던 칼이 빛을 머금은 빛의 검이 된 것을 보고 G스컬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에 비해. 너의 몰골은 볼품없군.”
G스컬은 이제 양팔이 잘려 나갔다.
“이런…. 이런…. 이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고대신룡도 아닌 네놈이 빛을 다룰 수 있는거냐고!! 인정할 수 없다!!”
나이트 드래곤은 분에 찬 듯 소리치는 G스컬에게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고대신룡은 자신의 빛을 일부 떼어내 다른 드래곤에게 넘겨줄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다면 왜 고대신룡은 그동안 너 같은 놈들을 더 만들며 다크닉스를 막지 않은 거냐고!”
“그래….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내가 방법을 깨닫기 전까지는.”
나이트 드래곤의 검이 더욱 빛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걸 왜 내가 너한테 알려 줘야 하지?”
나이트 드래곤은 G스컬의 목을 베어냈다. G스컬의 머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이…. 이런…. 이런 이런!! 빌어먹을!! 이건 말도 안 돼!!’
원래도 제대로 된 발성 기관 없이 잘만 말했었지만 G스컬은 목이 끊기면서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떨어진 G스컬의 머리를 향해 나이트 드래곤이 천천히 걸어온다. 차갑고 낮은 소리를 발걸음이 점점 크게 들려오면서 G스컬은 자신의 죽음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전에 너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녀석을 상대해봤지. 분명 목을 베어냈지만, 그 어둠의 드래곤의 특성 때문에 스스로 부활하더군.”
나이트 드래곤이 G스컬의 앞에 선다.
“죽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무래도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군.”
나이트 드래곤이 빛의 검으로 G스컬의 머리를 갈라내려는 순간. 여러 개의 화살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하는 이상한 살기에 반응했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냈다.
‘이 화살은…. 레골리스들이 왜 여기에?’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많지 않은 화살을 막아낸 후에는 하늘을 덮는 양의 화살이 그를 향했다.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 화살들은 엔젤에게도 향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G스컬님,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나이트 드래곤이 다른 곳에 시선이 팔린 사이에, 핑크 젤라틴이 G스컬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G스컬은 붉은 눈만이 껌뻑거릴 뿐이지만 핑크젤라틴은 철석같이 전부 알아들었다.
“물론이죠, 준비는 다 해놓았습니다. 이제 G스컬님의 원대한 계획이 실행되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
G스컬은 다시 눈을 껌뻑거렸다.
“흠…. 그것까지 아직입니다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군요.”
“쓸데없는 짓을, 이게 너희들 방식인 거냐. 도통 변하질 않는군.”
짧은 사이에 나이트 드래곤이 엔젤에게 빛의 장막을 펼쳐주고 레골리스들을 전부 제압하고서 다시 그들에게 도약했다.
“음.. 역시 G스컬님이 이 정도로 고전하신 이유가 있군요. 확실히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핑크젤라틴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당신, 끝내려면 아까가 유일한 기회였으니까요.”
나이트 드래곤은 작은 젤라틴의 말을 무시하고서 다가갔다.
그 순간 핑크젤라틴과 나이트 드래곤 사이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먼지가 걷어지고 탁한 기운과 함께 재앙의 칼리시가. 땅에 자신의 지팡이를 꽂은 상태로 그곳에 등장했다.
“칼리시, 늦었군요.”
“간사한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구나…. 내가 할 일은?”
“시간만 끌어주십쇼. 가능한 한 많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저 녀석은 재밌겠구나.”
칼리시는 지팡이를 들며 나이트 드래곤을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마주쳤다.
“시끄럽군. 고대신룡이 있던 동안 모습을 보이지도 않던 놈들이….”
나이트 드래곤은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더 세게 칼을 쥐었다.
“아쉽구나, 이 전에 만났더라면 더 좋은 상대였을 것을….”
칼리시는 미소 지으며 지팡이에서 불꽃같이 일렁이는 붉은 기운을 뿜어냈다.
-
“칼리시까지 왔었다고?”
번개고룡이 듣던 도중에 놀라며 소리쳤다.
“어떻게 됐는데?”
나이트 드래곤은 자신의 왼쪽 팔의 갑옷을 뜯어냈다. 나이트의 팔뚝이 무언가에 관통했지만 다시 재생한 것 같은 상처가 보였다.
‘오 근육’
“아무리 던전 밖이었다 한들 칼리시는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한쪽 팔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으니.”
-
‘다가가기 쉽지 않다.’
칼리시의 공격은 까다로웠다. G스컬은 나이트 드래곤이 그저 평범한 드래곤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전 고대신룡과의 일방적인 전투에서 얻은 큰 부상 때문에 상대하기 쉬웠지만
칼리시, 그녀는 나이트 드래곤의 검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마치 시간을 끄는 듯 그를 견제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이트 드래곤은 후일을 위해 반드시 그녀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생각할 여유 없이 칼리시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칼리시는 깜짝 놀라며 지팡이를 뜨겁게 달궈 화염을 만들었다.
“역시 근접전을 택했구나! 하지만 그게 나의 노림수였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
나이트 드래곤의 발이 있는 지면이 갑자기 폭발했다. 폭발로 인한 반동으로 나이트 드래곤은 찰나였지만 칼리시에게는 엄청난 빈틈을 보여주었다.
“방심했구나!”
뜨겁게 달궈진 칼리시의 지팡이가 나이트의 갑옷을 뚫고 지나갔다. 나이트 드래곤은 가까스로 심장에서 빗나가게 할 수 있었지만 팔이 관통당한 것은 치명상이었고 밝게 빛나던 나이트 드래곤의 검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이트 드래곤이 아모르의 힘을 쓰는 건 처음 봤지만…. 역시, 힘이 꺼져가고 있는 거겠지?”
나이트 드래곤은 말없이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빛이 희미해진 걸 보아하니 맞구나…. 상대로도 알맞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정도를 버텼구나. 하지만 아쉽게….”
칼리시는 지팡이를 빼내려고 했다.
‘....뭐지? 빠지지 않는다.’
이상했다. 지팡이는 빠지지 않았고 분명 꺼져가는 것처럼 보였던 나이트 드래곤의 기운이 다시 거대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다가왔군.”
그의 기운은 꺼져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약해지는 척하며 그녀가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그 순간을 노리기 위해. 인내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허풍은! 내부에서 불태워줘야겠구나!”
칼리시는 지팡이를 달궈 나이트 드래곤의 팔을 그대로 태워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힘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빛에 베어져 정화될지어다.”
나이트 드래곤은 다시 찬란하게 빛나는 검을 잡고서 칼리시를 향해 휘둘렀다.
Ep.38 잊을 수 없는 추억 (15)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나이트의 검은 칼리시의 몸통을 사선으로 베어냈다. 그의 검격에 따라 베인 그녀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칼리시는 지팡이를 놓고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나이트는 묵묵히 일어서며 지팡이를 뽑아낼 뿐이었다.
“이거…. 였구나.. G스컬님이 그냥 당하실 분이 아니었는데….”
칼리시는 이제야 나이트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네놈이 특별한 건 그 빛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그보다 더 특별한 건 하늘의 신전이 무너졌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그 힘이었던 거지….”
꽂힌 지팡이를 뽑아내고서 그의 팔뚝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얼마 안 가 멈추었다. 나이트가 빛의 힘으로 그새 상처를 아물게 했다.
“이토록 불합리한….”
“우습군, 던전의 미물들이 불합리함을 논하다니.”
검을 쥔 그의 위로 향했다. 이제 저항할 수 없는 그녀의 목을 잘라내는 것만이 남았다.
칼리시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녀에게 착 달라붙는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고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젤라틴?”
그 후 그녀는 빠른 속도로 당겨졌다.
“후훗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닥쳐라.”
“이놈들이….”
이상함을 인지하고 나이트가 핑크 젤라틴을 저지하러 달려갔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혀 다가갈 수 없었다.
바닥에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붉은색으로 빛나며 넘어갈 수 없는 벽을 만들었다. 핑크젤라틴은 사라지면서도 나이트에게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아쉽게 됐습니다. 당신이 그녀가 아닌 나를 막으려 했다면 달라졌을지도….”
-
“그렇게 그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대신룡도 함께.”
나이트는 사라졌다는 시늉을 하는 것인지 양손을 펼치며 이야기를 끝냈다. 번개고룡은 어리둥절했지만 그가 말한 내용을 추려보고 법진을 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네 말대로라면 이 문자들은 던전으로 이동하기 위한 법진인 것 같네.”
“법진을 사용할 수 있겠나?”
번개고룡은 눈을 찌푸리며 결계 너머의 문자를 보았지만 역시 알아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용은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봐서는 정확히 무슨 문자가 되어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어”
“알아볼 수 없다?”
“아마 그 젤라틴 혹시라도 누군가 이 법진으로 그쪽으로 다시 갈 수 없게끔 외부에서는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 같은데. 근데 애초에 들어가질 못하니 무슨 의미인지 싶지만.”
“만약 들어가면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건 그렇긴 한데…. 아까부터 사용 여부에 대해 굉장히 집요하네…. 그게 중요해?”
“중요하다.”
그는 말을 하자마자 그의 손에서 약간의 노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있으니까.”
천천히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붉은 색의 벽을 향해 나이트 드래곤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빛나는 황금색의 빛을 감은 자신의 두 손을 그 결계에 갖다 댔다.
나이트의 손이 벌벌 떨리더니 처음에는 양쪽의 다섯 손가락의 끝부터 뚫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두 손 전체가 전부 들어갔고 그 후 그는굳게 잠긴 문을 강제로 비집고 열 듯이 결계를 찢어 약간의 공간을 만들었다.
“들어가면 돼?”
“그래.”
번개고룡은 고개를 숙이며 나이트가 찢어놓은 그 결계로 들어갔다.
“어으..”
구역질이 나오려는 기운을 참아가며 안쪽에서 주문을 확인했다. 대부분 그녀가 아는 주문이었다.
“뭔지 알겠나?”
“당연하지, 날 뭐로 보고.”
번개고룡은 주문을 일부 지우고 고쳐쓰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G스컬이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순간이동 될 공간을 다시 설정하고 순간 이동할 물체를 특정해 적어나갔다.
이리 간단했다면 왜 처음부터 순간이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걸 말하자면 ‘수정’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간이동 법진을 만들려면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던전이 아닌 이상 날아가는 게 훨씬 빠르다.
그 핑크젤라틴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거대한 법진을 만드는 것은 드래곤으로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아마 몬스터여서일려나..’
번개고룡이 주문의 수정을 마치고 그에게 돌아왔다.
“끝났나?”
“어, 이제 내가 이 주문에 번개를 흘러 넣게 되면 작동하겠지.”
“그럼….”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
“뭐지?”
“....고대신룡하고는 무슨 관계야?”
-
“그 드래곤은 뭐 하는 녀석인데?”
“그저 평범한 나이트 드래곤이었습니다.”
피닉스가 하는 질문마다 그는 그저 말해줄 수 없다고 했지만, 처음으로 금오가 제대로 말해주었다.
“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태초에…. 당신이 불의 산을 수호하는 피닉스가 되기 전에 일어났던 빛과 어둠의 전쟁을요.”
“지겹게도 들었지. 헬 그놈이 그걸로 날 엄청나게 볶았다고. 자기는 그걸 눈앞에서 봤다느니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둥. 아오…. 갑자기 빡치네.”
“그 전쟁으로 많은 빛과 어둠의 드래곤이 죽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는 숨겨진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대신룡이 자신의 빛 일부를 떼어내어 다른 드래곤들에게 전해준 겁니다.”
“...그게 말이 돼?”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졌는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습니다만, 그 고대신룡의 빛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서 그의 힘을 쓸 수 있는 드래곤은 나이트 드래곤이 유일했습니다.”
피닉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흠…. 뭔가 이상하네? 그때는 아모르의 연결이 끊긴 것도 아니었을 텐데. 나이트 드래곤 같은 녀석을 만드는 게 어려웠을까?”
그것은 질문이었을까. 금오는 그녀가 아는 지식 너머에 대한 물음에 늘 같은 방식으로 답해주었다.
“현재로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기 시작했다.
“내가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바보는 아니야. 그리고 내 경험상 넌 무조건 뭔갈 알고 있어. 맞지?”
“...그것에는 답해드릴 순 없습니다.”
“말하지 마, 이미 확신하고 있으니까.”
“어떤 나이트 드래곤…. 네가 말한 그 녀석이 유일했던 이유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야.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거지. 다른 드래곤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했던 이유도 그렇게 되어야지 빛과 어둠의 전쟁이 완전한 고대신룡의 승리로 되는 게 아니니까.”
“과한 추측입니다. 어째서 아모르가 고대신룡의 편을 들지 않겠습니까.”
피닉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래 추측이지. 더 해볼까? 내 생각에는 아모르는 처음부터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던 거야 고대신룡도 다크닉스도 완전한 승리를 이룰 수 없도록 조정 했을 뿐이지.”
“왜? 균형의 수호자였던 그 녀석 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유타칸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
“그렇게 둘 중 누구도 완전하게 승리하지 못한 결과. 고대신룡은 약해졌고 다크닉스는 봉인되었지.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모르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거지. 균형은 언젠가 깨지게 될 테니까.”
“그게 그 나이트 드래곤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깨진 균형을 바로잡을 드래곤이.”
“아니 걔도 결국 도구에 지나치지 않아.”
“그렇다면….”
“빛과 어둠의 전쟁은 단 한 번도 끝난 적이 없었어. 처음부터 그 전쟁을 끝맺을 녀석은 걔가 아니었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두 번째 고대신룡이 아모르의 계획이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금오가 웃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던 금오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뭐야. 왜 웃어? 죽고 싶은거야?”
처음 보는 금오의 모습에 피닉스는 그저 당황스럽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괜히 부끄러웠다.
“놀랐습니다.”
“갑자기? 뭐를”
“당신은 역시 평범한 드래곤이 아닙니다.”
“어쩌라고.”
그녀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하는 금오가 언짢았다. 그러나 다음에 금오가 한 말은 그녀가 예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피닉스의 눈이 커지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해도 되는 거냐? 뭐 정해진 길 어쩌고저쩌고….”
“말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들을 자격이 됩니다.”
피닉스가 잠시 뚱해지고선 괜히 가만히 타오르는 작은 모닥불의 크기를 더 키울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그저 이야기를 즐거워하는 해치 드래곤처럼 순수한 눈을 하고서 금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뭔데? 그 진실이란 거.”
“당신 말대로 빛과 어둠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자는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모르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고대신룡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죠.”
-
(“다크닉스, 내가 어떻게 너를 죽이겠어.”)
고대신룡의 빛의 검은 다크닉스의 목 앞에서 멈추며 베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다크닉스의 검은 불꽃을 두른 손은 고대신룡의 복부를 관통했다. 다크닉스는 이성을 잃은 채로 고대신룡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대신룡도 공허하면서 길을 잃은 분노를 담은 다크닉스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 상태, 고대신룡도 느꼈다. 더 이상 자신은 그를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의 희생이 헛되게 할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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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나이트는 사실 개그캐로 생각해뒀습니다. 깨알같은 매력이 있어요.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비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