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신 : "그게 의문이라니까. 굳이 다른 용도였다면 이렇게 외모를 만들 이유가 없을 거야, 그리고 스스로를 로봇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정교할 필요도 없을 거고."
엔젤 : "아직도 혼란스러워?"
고신 : "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로봇들이 너무 덤덤한 거야. 어떻게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을 그렇게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물론 나도 어떨 땐 그래 내가 로봇이니까 이런 거겠지. 어쩔 수가 없는 거겠지. 내 기억의 일부가 조작일 수도 있겠지. 싶을 때도 있어. 근데 가끔은 그렇지 않아. 폐차되어 나뒹구는 고철 덩어리처럼 나도 그렇게 된다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이 들어. 다른 용도가 있었더라면 그 목적성에 부합하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거잖아. 설령 니 말대로 내 잠재의식.. 아니 그 메모리 속에 내 목적을 찾는다고 해도 결과는 폐기 처리 되고 마는 거니까."
용의 신체 온도는 36.5도, 로봇은 기계이기 때문에 오래 가동되면 그 온도를 넘을 수가 있을 거다. 엔젤의 손을 확실히 37도는 넘었다. 그 정도로 따뜻했다. 그 손길이 가슴에 닿은 것도 아닌데 뭉클해진 가슴도 함께 38도 쯤으로 열이 올랐다. 코 끝이 찡한 걸 보니 40도 까지는 올랐을 게 틀림 없었고 쳐다보는 눈길은 70도에 육박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손을 잡는 건 처음이었다. 로봇과는. 용의 손을 잡았을 때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없었다. 태생이 로봇이라 로봇한테 끌리는 건 당연한 걸까. 고신은 성큼 다가선 엔젤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고신 : "뜬금없는데 말이야. 너 진짜 예쁘게 만들어졌다."
엔젤 : "마음에 들어?"
고신 : "응."
엔젤 :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참 완벽한데 좀 이상한 로봇이야, 너는.
다닉과 있을 때도 다닉이 먼저 요구를 하지 않으면 없었던 생각들이 엔젤을 보고는 들기 시작했으니 고신은 곤란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 시간마저도 길지는 않겠지. 곧 나는 폐기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감정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용으로 살았던 기억과 여기서 로봇으로 살았던 기억들 모두.
J가 구해온 팬텀에서 최근 개발된 모델의 매뉴얼을 보는 척 진지하게 다리를 꼬고 있는데 불쑥 엔젤이 찾아왔다. 실은 약간은 거리를 두는 중이었다. 갑자기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해서 쪽팔림 기능을 상실하고 들이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부터.
엔젤 : "너 도대체 그건 왜 봐."
고신 : "이거 봐야 돼."
엔젤 : "책 보는 척 하지 마."
고신 : "그런 척 하는 거 아니야. 누가 그러는데 내가 미국회사 팬텀사의 로봇일 가능성이 많대. 그럴 확률이 크다고 하니까. 어쩌면 내 태생에 대해 알게 될 지도 모르잖아. 잠재의식에만 의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엔젤 : "왜 쓸 데 없는 짓을 하고 그래. 거긴 아니야."
고신 : "맞을 수도 있잖아."
엔젤 :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 고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다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엔젤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네 내면에 더 집중해. 고신은 가만히 생각을 해 봤다. 집중 할 수록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저 애가 좋다. 엔젤. 엔젤이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자 속을 읽힐 것 같아 얼른 매뉴얼에 시선을 박았다.
웃겼다. 내가 만들어진 이유가 로봇을 좋아하기 위해서라고? 가슴 부근의 온도가 100도에 육박했다. J가 어렵게 구해준 매뉴얼 뭉치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가슴만 뜨거운 게 아니라 진짜 속이 울렁거렸다.
고신 : "로봇이 누군가를 좋아할 수가 있나?"
엔젤 : "당연하지."
고신 : "넌 어떻게 알아?"
엔젤 : "원래 난 모르는 게 없잖아."
고신 : "근데 그게 이렇게 돈을 투자해가며 만들 이유가 돼?"
엔젤 : "응."
고신 : "진짜 네 목적이 누군가와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엔젤 : "응."
나도 뭔가를 끊임없이 사랑하지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면. 신기하게도 결론이 자꾸 그렇게 흘러간다. 로봇회사에서 미쳤다고 그런 로봇을 양산할까. 로봇끼리 사랑하게 만들어서 용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런데도 자꾸 엔젤에게 끌리는 느낌. 엔젤과 감정을 교류하고 싶었다. 그리고 엔젤을 보고 있으면 마음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파져 온다.
로봇의 이런 감정은 용에게 하등 도음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오류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엔젤이 고신의 손을 살짝 잡았다. 이 온도는 로봇의 것이 아니다.
고신 : "엔젤아 근데 너 아무리 봐도 너무 용 같다."
엔젤 : "너도 용 같은 걸."
엔젤은 사랑하는 용이랑 영원히 살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던데. 그 용이 내가 되는 걸까. 고신은 고개를 기웃했다. 근데 나는 용이 아닐 걸.
엔젤 :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떠오르는 걸 받아들여."
고신 : "..."
엔젤 : "그냥 끌리는 대로 해."
마치 처음 마주쳤을 때 처럼 슬프게도 웃는 엔젤을 보고 고신은 제 가슴을 어루만졌다. 가슴이 뜨겁다. 그리고 가슴이 아프다. 사랑이 뭔지 알 것도 같다. 사랑은 아픈 거구나. 그래서 사랑은 아프다고 한 거구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이 옅어지고 있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미래에 대해 떠올렸다. 영원히 엔젤과 함께 어디선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행복할 것 같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그 앞에 엔젤도 같이 쭈그려 앉았다.
엔젤 : "고신아,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갈래?"
고신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엔젤 : "고신. 나랑 나가자. 응?"
고신 : "어휴, 여기서 어떻게 나가. 저렇게 경비가 삼엄한데. 그러다가 우리 끔찍하게 폐기된다."
엔젤 : "아니야. 나갈 수 있어. 나는 방법을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