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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MANTHUS]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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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117
  • 작성일2026.01.07

*성동애 소재 주의 / 이전작들과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가뭄 끝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단비소식에 요란한 소리를 내는 용들 덕분에 단비보다 더 단 잠에서 일찍이 깨어난 참이었다. 뒷문 빗장을 올려 문을 열자 굵어진 빗줄기가 마룻바닥에 튕겨 방 안까지 들어올 참이었다.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시끄러운 소음과 갑작스러운 추위였다. 드러난 어깨 위로 습기 어린 찬바람이 스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젖혀진 문의 아랫부분을 쾅 하고 다시 열어 벽에 부딪히게 하자 원했던 만큼 쾅- 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퍼져 나왔다. 이내 분주하던 용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로 박혀 들었다. 더러운 내 성미를 알고 있는 일꾼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소리와 걸음소리를 죽이며 하던 일을 이어 하기 시작했다. 이내 갑갑해진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끼며 문고리에 달린 끈을 당겨 문을 닫았다. 


다시 침소에 몸을 누이는데 쾅쾅 마룻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다시 귓전을 울려 심기가 잔뜩 구겨져 몸을 다시 을으키자마자 이내 벌컥 문이 열렸다. 내 방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어젖힐 수 있는 용은 단 한 용 데빌 뿐이었다. 데빌은 문을 열자마자 덮어쓴 도롱이를 흙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방에 거칠게 들어서 문을 닫았다. 성급한 성미가 걸음에서도 느껴진다. 사시쯤 되었는데도 해가 구름에 갇힌 탓에 방 안은 우중충 하기 그지없었고 나는 데빌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잔뜩 미간을 구긴 채였다. 




엔젤 : "대낮부터 뭐하는 짓이야. 밖에 사람들 안 보여?"


데빌 : "걱정 마. 대낮부터 너랑 티격 태격 할 생각은 없어."




데빌의 뿔에서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몹시도 거슬리기 시작하던 차였지만 나는 입술을 꾹 눌러 닫았다. 무언가 큰 일이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어둠에 적응이 된 내 시야로 데빌의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먹잇감을 발견한 금수의 눈빛 말이다. 저 눈은 무언가 성에 찬 사냥감을 물어뜯을 때나 볼 수 있는 눈빛이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몸을 제대로 곧추세웠다.




데빌 :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게지. 기회, 구질구질하게 양인들의 비위나 살살 맞추며 뒤로 하는 더러운 짓을 해도 되지 않아도 되는 기회 말이야."


엔젤 :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해."


데빌 :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역시 닦아놓은 자리는 배신을 하지 않는구만."




뭔 뜬구름 잡는 소리지. 슬슬 골이 나기 시작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입매를 올린 채 행복감에 젖어있는 데빌을 보며 무슨 기우인지 궁금해서 미칠 노릇이지만 괜한 닦달에 반감이 들까 성미를 눌렀다. 그러면서 돋아난 소름을 덮으려 저고리에 팔을 끼워 넣고 옷고름을 다시 여미었다.




데빌 : "이 도성에서 제일로 가는 부자가 누구냐? 바로 좌판 마대감이지. 너도 소문을 들어 익히 알 거야. 내가 그 양반과 내통하게 생겼단 말이다."


엔젤 : "그 양반이 뭐가 아쉬워 너 같은 놈과 내통을 한단 말이야, 어째서."


데빌 : "내가 만날 나가서 하는 짓이 무엇이더냐. 그 양반들 뒤를 닦으면서 드러운 짓거리를 일삼은 연유가 무엇이겠어. 그런 큰 인맥 하나 잡아 큰 건 하나 해치우기 위함이 아니었겠어?"


엔젤 : "그 양반이 정녕 너랑 내통한다 이 말이야?"


데빌 : "못 믿겠어? 이 금덩이를 보고도?"


엔젤 : "어서 본론이나 말 해."


데빌 : "절대로, 네 도움이 없인 이 일은 성사 될 수 없다, 엔젤아. 이 천금 같은 기회는 네 도움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야. 분명 쉬운 일은 아니지만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해낼 수가 있다. 거기에 마대감까지 있다면 말이야."




데빌은 붕뜬 시선으로 묘한 미소를 띄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어 시작된 사실이라고는 믿기 힘든 천인들 사이에 오가는 풍문과 같은 얘기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의심은 내 눈 앞에 있는 금덩이가 잠식 시켜버렸다. 나는 엽전크기만 한 금덩이를 보고 데빌의 얘기가 절대로 허풍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그러했다. 도성 내 제일로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부와 권세를 거머쥔 좌판 마대감의 아들, 열일곱의 나이로 장원 급제를 했다던 그 잘난 아들이 혼처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럴만 했다. 양반네 중에는 글공부에만 빠져 여자에게 흥미가 없는 샌님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금덩이를 빙긋이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까지는 서막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 때 놀랍게도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놀란 마음에 쥐고 있던 금덩이를 바닥에 떨구어 버릴 정도였다. 




데빌 : "알고 보니 그 마대감의 하나뿐인 금쪽같은 아들이 실은 여식이라는 것이지. 그러니 혼처를 구하지 못할 수 밖에, 마대감ㄴ네 혼처 자리라면 그 줄이 도성 밖을 한 바퀴를 빙 둘러도 남을 정도일텐데 왜 여직 구하지 못했겠어. 괜한 자리에 댔다간 그 금쪽같은 자랑스러운 아들내미가 여식이라는 것이 탄로 날까 그랬던 거겠지."


엔젤 : "그렇단 말은.."


데빌 : "니가 그 가짜 아들놈의 처가 되는 게지."





-










유월달이 찾아온 날씨는 방 안을 후끈하게 덥혀 놓았다. 연신 부채질을 하며 짜증을 내고 있는데 일꾼 중 하나가 벌써 미시가 되어간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거울을 꺼내 내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사내라면 조선이 난다 긴다 하여도 나를 모르는 체 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신분으로 살기는 안타까운 얼굴이야. 경국지색이 있다면 바로 너일 게다, 이제는 생김새의 기억도 희미한 어느 늙은ㅇ 양반의 말이 떠올랐다. 그 늙은 양반을 꼬여내 얻은 거라고는 몇 푼 되지 않지만 그 경국지색이라는 칭찬만은 듣기 좋았다. 과분한 칭찬은 아닐 것이다. 그 어떤 신분으로 두르지 않아도 나는 고고했고 아름답다고 자부했다. 



하늘의 나는 새도 떨군다는 권세와 명예는 없지만 모름지기 여자는 미모가 최고라지. 여인네는 미모로 나는 새의 날개도 꺾어버린다. 그럼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매 한가지일 것이다. 물론 나도 지금처럼 잔뜩 독이 올라 나를 단장할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첩 자리를 내어 주겠다 궤변을 늘어놓는 늙은 양반을 꼬여내는 것도 아니고 신분은 미천하나 돈만 많은 젊은 상인을 등쳐먹으려 단장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정체를 고스라니 드러내놓고 마주하기 위한 자리에 나설 뿐인데 나는 벌써부터 머리 끝까지 독과 함께 사기가 올랐다. 더 이상은 내가 아끼는 내 미모로 그런 추잡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 라, 결국 나는 데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쁠 건 없었다. 전국 팔도를 돌며 마주치는 늙은 영감이나 성에 차지 않는 못난 사내의 품에서 아양을 떠느니 같은 여자에게 들러붙어 거머리처럼 그 집 재산을 쪽쪽 빨아먹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양인들의 더럽고 추한 일에 가담해 비리라면 모를 것이 없는 데빌이 닦아놓은 자리에 한양에서 부자라고 하면 손 꼽을 정도의 마대감네 재산이라니, 엽전만한 금덩이를 아무렇게나 척척 내놓을 정도라면 그의 재산은 내 상상보다 더 어마어마할 것이다.


탐탁치는 않았으나 그 재산의 규모를 떠올리며 나는 애써 성질을 누르려 애를 썼다. 어쨌거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다지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기는 싫었다. 미시에 만나기로 하여 그 전부터 일찍이 단장하며 준비를 했던 이유도 그런 것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초조한 마음도 들고 마음도 급박해졌다. 그에 더 방 안의 공기가 후끈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고 생각했으나 이내 신경질이 나 부채를 집어 던지고 다시 머리를 매만졌다.


소란스러워진 바깥에 누군가 왔음을 느끼고 방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체구가 상당한 가마꾼들이 마당에 가마를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가마꾼 : "타시지요, 아가씨."




듣기는 나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마룻바닥에 발을 내려 신을 끼워 맞추었다. 장정 넷이 그런 내가 천천히 걸어서 가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곁눈질로 훔쳐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런 장정을 거느리고 이런 예쁜 꽃가마를 선뜻 내게 보낸 그 집안은 도대체 어떤 집안일까.


내 신분이 미천하고도 미천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이 꾀어낸 꾀에 동조하려는 질 나쁜 용인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의아스러웠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 전에 그 젋은 장정 넷이 나를 훑어보던 그 시선이 나쁘지 않았으므로, 역시 여인은 어여쁜 것이 최고라지. 난생 처음 올라타는 꽃가마에 내 기분도 함께 붕 떠올랐다.










-





가마가 세워진 곳은 산 어귀의 몫 좋은 호숫가였다. 누구의 소유인지 그 근처를 지날 때 항상 궁금했었지만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했었다. 양반들은 여기서 뱃놀이를 하고 논다지, 그리고 저 큰 정자에서는 장기를 두거나 밀담을 나눈다, 들었다. 필시 그 자리이리라 사뿐이 내려 밟은 걸음에 장정들이 물러서는 것이 느껴진다.


다시금 찬찬히 바라보자 정자에 누군가가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천천하고 느리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돌계단을 내딛었다. 그 때 데빌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데빌 : '너는 가나한 여느 양인의 가련한 막내딸이야. 어쩔 수 없이 종인들과 어울려 소소한 일거리를 하며 서방 없이 입에 풀칠을 하는 아주 가련하고 과년한, 불쌍한 열일곱의 애기씨인 거지. 신분은 마대감네 쪽에서 움직인 하인이 준비했다고 하더군. 네 얘기는 익히 해두었어. 하긴 그 양반, 지금 우리가 아니면 그 가짜 색시자리를 구할 방도가 없을 텐데 말이야. 고민하는 시늉을 해봤자 소용없음을 안 거야. 그러니까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 기 죽을 필요가 없고. 좌우간 용들 보는 눈이 있으니 혼인 전에 만나자고 청해 올 거야. 어차피 패는 우리가 유리한 쪽으로 쥐고 있으니 저 자세로 나갈 필요가 없어 엔젤아. 내 말 알겠지?'




비실 웃음이 샐 것 같았다. 거짓에 가까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의 주인인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 몇이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개 중에 어떤 여인은 나를 노려보는 것과 같은 눈으로 보기에 나도 같이 노려봐주었다. 이내 고개를 숙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고개를 들어 정자 안에 선 그 인물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파틴 : "어서 오시오.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사내의 음성이 필시 아니다. 애매한 음성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 인물은 제 얼굴을 커다란 부채로 가리고 있은 채였으니 말이다. 커다란 갓 아래로 보일 듯 말듯 한 눈빛이 일렁이며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그 눈의 생김새를 읽으려 애를 썼지만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그 가짜 아들의 몸태와 걸치고 있는 옷감, 갓의 크기, 부채의 문양, 부채를 쥔 손을 차례로 훑어 내렸다.




비실비실대는 약골 글쟁이 아들내미라는 소문이 났다고 하여 나는 작고 여리며 누가 봐도 여인네 티가 발산하는 체구일 줄 알았다. 허나 적지 않은 단단한 체구에 자세는 곧고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ㅍ내 예상을 빗나간 것은 비단 체구 뿐만이 아니었다. 걸친 도포 바지저고리의 양감은 그다지 비싼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진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기에 나는 먼저 자리에 앉아버렸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은 마대감이 아닌 이 여인에게 저자세로 나가며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조알 한 톨 만큼도 없었다.




엔젤 : "장정 넷이나 붙었는데 힘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저렇게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이 나를 불퉁하게 하고 아니꼽게 만들었다.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이내 나는 손부채질을 했다. 분칠을 한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것이 느껴진다. 괜한 노력이었나 싶어 다시 한 번 차림새를 훑어보며 휴우 하고 더운 숨을 내쉬었다.




파틴 : "더워 보이는 군요. 괜찮다면,"




일이 끝남과 동시에 탁, 하고 부채를 접는 것이 보였다. 이어 감춰진 얼굴이 드러났다. 또한 이로써 내 상상은 모조리 다 빗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상 속의 마대감의 가짜 아들인 여식은 여리하고 못된 성미가 묻어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아주 어색한 남장행색 때문에 아주 기괴한 행색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갓 아래로 드러난 반듯한 이마와 총기 가득한 까만 눈동자와 시원한 눈매, 온 얼굴에 가득한 광채와 총명함, 입하의 불쾌함을 날리는 듯 시원한 인상에서 무엇 하나 흠 잡을 곳이 없었다. 갓으로 그늘진 얼굴도 저리 빛날 수가 있을까, 조막만한 얼굴에 여인이라고 치자면 아주 손색없는 미인상이고 사내라고 치자면 여인네들이 죽고 못 살 미남자의 상이다. 


남성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고 그렇다고 남장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으니 부조화가 없어 전체적으로 여인에게나 사내에게나 호감을 살 만한 외모임은 틀림이 없다.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심장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무엇하나 내가 생가했던 것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다.


흐트러짐 없는 다정한 말투에는 예의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볕에 닿은 적 없는 듯 희고 고운 손에 잡힌 부채가 내게 향해 있었다. 나는 건네는 부채를 붙잡았다. 나는 부채를 펼쳐 당황스러움에 오르는 열기를 감추었다.




파틴 : "참으로 어려운 걸음 해주었어요. 예까지 나와 주어 고마워요, 낭자."




깍듯하고 기품 있는 말투에 당당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표정도 흠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가진 것 없이 방자한 것은 나였다. 그런 나를 눈빛이 초롱초롱 총기 가득 빛을 내며 바라보고 있다. 


순간 공기가 묘한 더위로 가득했다. 가만히 나를 내리 꽂아 바라보는 천진한 눈빛은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에서 호기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찌 이리 고울까, 속으로 깊은 감탄과 함께 탄식이 일었다.


내 표정을 살피는 두 눈동자에서 경계심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아 의아스럽다. 그치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이 자는 십수년 동안 거짓으로 위장하며 살아온 인물이 아니냐. 급제 후 바로 궐에서 관직을 하사받고 마대감을 이어 나라의 녹봉을 받아먹으며 탄탄대로의 쪽문으로 바짝 입성한 인물이다. 보통이 아닐 것이다.




엔젤 : "어려운 걸음을 다독이시려 소녀를 부르신 것은 아닐 테고, 마대감님도 없이 저를 찾으신 연유가 있으실 텐데요. 혹 제 낯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던가요?"


파틴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무어라구요. 감히 이리 어여쁜 그대 같은 낭자를 오라 가라 하겠나요."


엔젤 : "그렇다하면 연유가 무엇입니까."


파틴 : "괜찮다면 내 잠시 숨 좀 골라도 될런지요. 낭자의 낯을 보니 잠시 할 말을 잊어서 그만."


엔젤 : "어찌 그런 말씀을.."




그에 건넨 부채를 살랑 살랑 흔들었다. 맺힌 땀방울이 식는 것이 느껴진다.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 탓인지 이 부채바람 탓인지 저 천진한 시선 탓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서늘한 공기가 주변을 감돌았다. 청색 도포 소매로 삐져나온 손이 다부지게 양반다리를 한 무릎 위쪽으로 말아 쥐어 얹어져있다. 자세가 한 치 흐트러짐이 없다. 말 할 때 마다 갓이 움직이며 눈매에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으나 총기어린 눈빛만은 그늘에도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지날 수록 뚜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약점을 고스라니 상대에게 드러내고 있으나 절대로 꺾이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일 수록 묘하게 내 수를 틀어놓는다. 내 못된 성미를 해맑게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이런 기분을 말하는 것일 거다. 나는 양쪽 어금니를 꽉 깨물어 슬쩍 부채로 얼굴을 반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잠시 넋을 잃은 표정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짐짓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하려는지 작심한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파틴 : "뵙기를 청한 이유는 그저 다시 한 번 확답을 받기 위해서요. 낭자의 오라비에게 전달 받기로는 좋다 하였지만 내 간 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니 그 말을 내 직접 눈으로 내 귀로 듣고자 함이오. 내 사정은 뻔히 알고 있을 터이니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어요. 지금이라도 한 치의 어려움이라도 느껴지어 힘이 들 것 같거든 그만 두시어도 되오. 비밀을 묵인 한다 약조하시면 아버님이 친히 그에 따른 보상을 내리실 것이고 그 이후로는 없던 일로 해 드릴테니."


엔젤 : "그것을 묻기 위해 저를 예 까지 부르신 겝니까? 저는 오라비를 통해 내 대답을 전했어요. 그것으로 정녕 부족한 것 입니까?"


파틴 : "부족한 것이 아니에요. 사안이 사안인지라,"


엔젤 :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고 내 그리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겝니까. 정녕, 좌판 마대감님도 그리 생각하시는 겝니까? 혹 도령님에 견주어 보잘 것 없는 제 신분이 마음에 걸려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예 까지 불러 다시금 하문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소녀는 그리 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파틴 : "그럴 리가.. 같은 용에게 신분의 차가 무엇이 중하답니까. 내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정녕.. 낭자가 스스로가 그러기를 원하는지를 알고 싶었어요.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그 혼례를 없던 일로 하기로 작정하고 나온 것이오."


엔젤 : "좋습니다.. 들어 아시겠지만 도령, 저는 몰락한 이름도 없어진 가문의 비천한 딸이어요. 양인의 신분으로도 해보지 않은 일이 없어 갖은 고초를 겪었답니다."




내가 말하면서도 같잖은 거짓말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허나 상대는 내 말에 잔뜩 귀를 기울이다 못해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말에는 어쩐지 조금 서글픈 눈동자가, 그러니까 동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순진하기까지 하군.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머지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엔젤 : "더 이상은 찬 밥 더운 밥을 가릴 것이 없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이 몸뚱이를 만평지기의 첩 자리에 앉을까 아니면 기생팔자로 살아볼까 별별 생각도 다 했었지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었답니다. 내일 걱정 없이 살아보는 것이 이 소녀의 평생 소원이었다구요."


파틴 : "..."


엔젤 : "그러다 마대감님 댁에 진즉부터 연이 있는 오라버니가 제게 그런 비밀스러운 청을 하기에 저는 제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요. 어찌 제가 그런 일을 쉬이 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밤잠을 설치며 생각하고 또 고민하기를 수십 번, 긴 생각 끝에 저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지요."


파틴 : "..."


엔젤 : "이미 모든 것을 듣게 된 몸. 택하면 얻는 것이 너무나 많을 것이고 물러선다면 더 크나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습니다. 이미 결정된 일. 번복하는 일은 추호도 떠올리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대감님이라면 어떤 분이십니까. 저는 겁이 납니다. 그렇기에 다시 그 일을 없던 일로 무를 수는 없겠지요."


파틴 : "당치도 않는 소리입니다. 낭자, 절대로 낭자에게, 낭자의 오라비에게 위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어요."


엔젤 : "저는 이미 수 없이 어려운 일을 치러냈어요. 그렇기에 누구도 믿지 않는답니다. 하나뿐인 제 오라버니 밖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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