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불신, 그리고 비명
포스터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루아는 홀린 듯 신청서 양식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낡은 나무 책상 앞에 앉은 소녀의 심장은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법’. 그것은 루아에게 밤하늘의 별을 따다 주겠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단어였다. 하지만 포스터에 닿았을 때 느껴진 그 뜨거운 박동이 루아의 손끝을 계속해서 간질였다.
루아는 떨리는 손으로 낡은 깃펜을 들었다. 이름 ‘루아’, 나이 ‘11세’, 출신 ‘에델 마을’. 잉크가 종이 위로 스며들 때마다 루아는 자신이 마치 금기된 문을 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마을 우체국 마법 전송함에 넣는 순간, ‘딸깍’하고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루아의 행동을 금방 알게 되었다. 작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서 누군가 마법 학교에 지원했다는 소식은 산불처럼 빠르게 번졌다. 루아가 우체통에 넣고 마을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평소 그녀를 아끼던 이웃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루아, 정말 가려고 하는 거니? 거긴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갈 곳이 못 된단다.”
마을의 최고령자인 촌장 할아버지가 곰방대를 내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걱정과 회의감이 가득했다. 에델 마을뿐만 아니라, 유타칸의 수많은 시골 마을에서 마법사가 배출되지 않은 지는 벌써 수십 년이 넘었다. 거기에는 지독하리만큼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얘야, 마법이라는 건 결국 드래곤의 권능이란다. 아주 오래 전, 고대신룡과 다크닉스가 이 땅을 다스리던 시절부터 마법은 오직 드래곤과 그들의 선택을 받은 혈통들만이 부릴 수 있는 전유물이었어.”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 속에서 마법의 근원은 곧 드래곤의 마력이었다. 인간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드래곤과 계약을 맺거나, 아주 희박한 확률로 드래곤의 정수를 이어받은 가문이어야만 했다. 드래곤들이 자취를 감춘 지금, 평범한 농촌의 고아 소녀가 마력을 가졌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우리 같은 농사꾼들은 땅의 기운을 빌려 곡식을 키우는 게 순리야. 최근 몇 십년 동안 이 근방에서 마법 학교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느냐? 다들 헛된 꿈을 품고 갔다가 상처만 입고 돌아왔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루아의 귓가를 때렸다.
“맞아, 루아는 예쁘고 착하고 예쁘지만, 마법이라니…”
“드래곤의 피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마법을 쓰겠어.”
루아는 고개를 숙였다. 마을 사람들의 말을 틀린 게 없었다. 자신은 그저 밭을 일구던 소녀였고, 드래곤은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신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루아는 자신의 노란 머리핀을 꽉 쥐었다. 사람들은 보지 못 했지만, 루아는 보았다. 포스터가 뿜어내던 그 빛이, 자신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는 것을.
“죄송해요, 할아버지. 하지만… 확인해보고 싶어요. 제 안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지, 아니면 무언가 잠들어 있는지요.”
루아의 단호한 눈빛에 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길을 터주었다.
떠나는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비난 대신 소박한 정을 챙겨 루아를 배웅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루아가 마법사가 될 거라 믿지 않았지만, 홀홀단신 떠나는 어린 소녀가 굶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가서 배고프면 꼭 까먹어라.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고.”
“루아, 길 조심해라. 대도시는 무서운 곳이야.”
할머니들은 갓 구운 보리빵을 주머니에 넣어주었고, 아저씨들은 튼튼한 지팡이를 깎아 선물했다. 루아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마을 어귀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꼭…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게요!”
햇살을 받은 루아의 백색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은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와 같은 루아의 모습이었지만, 왠지 그 뒷모습에서 아주 먼 옛날 전설에서나 묘사되던 기묘한 위엄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루아는 마을에서 벗어나 황금빛 보리밭 사잇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이름 없는 숲과 산을 지나 대도시로 향하는 먼 여정이었다. 루아는 지팡이를 꼭 쥐고 자신의 발걸음 소리에 집중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리는 한적한 숲길 옆 오솔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루아는 지도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때, 평화롭던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악! 살려줘요!”
어린아이의 비명이었다. 평소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루아의 성격이 즉각 반응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몸은 이미 소리간 난 골목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누구 없어요? 제발!”
골목 안쪽,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막다른 길에서 절망적인 외침이 이어졌다. 루아는 숨을 헐떡이며 그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검은 연기 같은 기운이 일렁이는 괴생명체가 작은 아이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고, 아이의 앞에는 부러진 검을 든 한 소년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괴생명체의 기운은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게… 뭐야?”
루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마을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이 곳에 마물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괴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하고 불쾌한 압박감은 명백한 ‘어둠’의 기운이었다.
그 순간, 루아의 머리핀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루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만둬!”
어둠 속에서 괴생명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아를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안광이 루아를 향했고, 숲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운명은 루아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길을 나선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전설의 서막이 비명과 함께 막을 올리고 있었다.
-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