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고신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시체가 걸어 돌아다니며 산 용을 잡아 뜯어먹는 세상에서 절망을 지고 있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하다. 분명 고신에게도 그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데빌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가 두꺼운 소설책 사이에 끼워두었던 종이를 꺼내들었다.
안녕 데빌! 나 블랙~ 일어났는데 옆에 내가 없어서 놀랐지? 미안해, 미리 말을 못 하고 가서.
.....있지, 나 아무래도 덴버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욕하지 말고!! 잊은 물건을 가지러 가야 해. 정말 소중한 건데..... 아무래도 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어. 아직도 제자리에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데빌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숙사 방문 바로 옆의 수납장 위쪽 벽에 걸려있던 거, 그거 우리 엄마가 선물해준 건데....., 엄마가 살아있는지 소식도 모르는 마당에 그거까지 없으면 나 진짜 슬플 것 같아. 근데 걱정 마, 데빌. 진짜 빨리 갔다 올게. 나 엄청 재빠른 거 알지? 데빌보다 다리도 길어서 나 진짜 빨리 갔다 올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덴버까진 금방이야! 꼭 돌아올게. 그럼 안녕! ................... -블랙-
실버손에서 덴버까지는 걸어서 삼일이다. 정말 덴버에 간 것이라면 블랙은 벌써 돌아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블랙은 핑계는 많이 댔지만 거짓말을 하는 애는 아니었다. 무얼 가지러 간다는 게 핑계였을지라도 돌아온다는 것은 진실이길 바랬다.
꼭 돌아올게, 데빌은 그 한 문장을 마지막 희망 삼아 붙잡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돌아오면 죽었어. 반성문 열 장이야. 다 못 쓰면 앞으론 각방 쓸 테니 각오해.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그렇게 쓰인 편지 마지막의 흘겨 쓴 블랙의 고향 언어 여섯 자는 데빌으로선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지역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용이 혹시 실버손 안에 있을까 싶어 그 글자를 옮겨 쓴 포스트잇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끝끝내 그 뜻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잠깐 왔던 파틴이 조금은 안다고 하여 보여주었는데,
파틴 : "사랑해, 자기야..... 인데요?"
데빌 : ".....그래?"
조금은 안심이 됐다.
편지를 덮어 원래 보관하던 곳에 잘 끼워 넣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고신은 어느새 수첩을 덮곤 고개만을 푹 숙이고 있다. 데빌은 달력에 X를 표시한 후 쇼파로 가 고신의 곁에 앉았다. 그제야 고신은 고개를 든다. 데빌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고신 : "있죠, 아까 아침엔 미안해요. 좀 제정시닝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잠깐 그랬나 봐요."
데빌 : "괜찮아요."
고신은 고맙다며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억지로 입꼬리만 겨우 올린 것이었다. 두 용은 말 없이 벽난로의 노란 빛을 바라보았다. 고신은 그걸 보고 있더니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야겠다며 데빌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고신 : "거실에서 자면 되는 거죠?"
데빌 : "아, 네. 괜찮으시겠어요?"
고신 : "네. 지내는 동안 벽난로는 제가 볼게요. 밖에 쌓인 거, 장작 맞죠?"
데빌 :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냥 데빌씨한테 미안해서요. 분명 웃고 있었는데도 그 얼굴이 참 슬퍼 보였다.
고신 : "불 피워놓을게요. 어서 들어가서 주무세요."
데빌 : ".....네. 고신씨도 주무세요."
블랙이 떠난 뒤론 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에서 깨면 넓은 침대에 혼자 누워 불안한 생각을 떨치려 안간힘을 쓰고, 해가 서서히 밝아오면 비틀비틀 거실로 나와 창가에 앉아 일찍부터 시간을 태우곤 했다.
또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해가 떠오르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벽난로는 활활 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자고 있어야 할 고신은 온데간데 없고 잘 정리된 이불만이 남아있다. 물을 뜨겁게 데워서 창가에 앉았다.
고신은 바깥 눈밭에 서 있었다. 데빌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서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고신만 서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데빌 : ".....너 언제 왔어?"
파틴 : ".....좀 전에요."
표정이 어둡다 못해 암울했다. 코 끝, 양 귀, 뺨, 손이 벌게져 있었다.
데빌 : "얼른 들어와. 춥지."
어깨를 감싸서 집 안드로 같이 들어갔다. 고신도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