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바람이 옷을 파고 들어와 방금까지 따뜻했던 몸이 금세 서늘해졌다. 용 사는 냄새가 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페어플레이보다는 덜 추운 듯 했다.
고신 : "블랙이라는 용은 데빌씨의 연인인가?"
파틴 : ".....그랬죠."
고신 : "그럼 마카라란 용은?"
파틴은 걷던 걸 멈추었다. 아는 거라곤 마카라 이름 세 글자 밖에, 그래서 더 슬프고 싶다. 마카라. 그 세 자로 슬플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찌다. 씁쓸한 기분을 견딜 수가 없다.
대답이 없자 고신은 말을 이었다.
고신 : .....걔도 죽기 전에 게으름이 심했어.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겠지."
그 용도 물렸을 거야. 그래서 떠났을 거야.
고신 : "달력에 8일 부터 X가 쳐져 있어. 오늘 벌써 19일이야. .....블랙씨도 죽었을 거야."
파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온 김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고신은 생존자 캠프로 향했다. 데빌의 집에 머무르는 건 딱 삼일이고, 오늘이면 캠프로 가야 한다고 고신은 덧붙였다. 그렇냐며 끄덕였지만 파틴은 데빌을 설득해볼 생각이었다.
실버손 안쪽으로 들어서면 캠프가 줄지어 있고, 데빌의 집에서는 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파틴이 반대를 했음에도 고신은 결국 캠프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름을 올리고 이런저런 절차를 밟는 고신의 슬픈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겨워졌다.
고신 : "이거 꽤 오래 걸리겠는데. 먼저 갈래?"
파틴 : "아니에요. 이제 겨우 아침인데요, 뭐."
추운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파틴은 애꿎은 눈만을 발로 찼다.
고신 : "너 밖에서 오래 지냈다매."
파틴 : "네."
고신 : "쭉 밖에서 지냈어? 덴버 떠난 후로?"
파틴 : "네. 용들이랑 그냥 아무 건물에서나....."
고신 : "마카라란 용도 거기 있었구나, 그치."
파틴은 또 침묵을 유지했다.
고신 : ".....미안. 근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블랙이라는 용도, 마카라란 용도, 데빌씨도, 그리고 파틴, 너도. 그냥 다 슬픈 것 같아. 파틴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만한 내용이 있길 바랬다.
나온 지 두 시간 정도 후에야 두 용은 다시 데빌의 집으로 돌아갔다. 고신은 캠프로 떠날 채비를 하고 파틴은 데빌의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귀를 귀울여도 숨소리 하나 없다.
고신 : "데빌씨 안 나오셔?"
파틴 : "뭔가 이상한데요....."
파틴은 문고리를 붙잡고 망설였다.
.....마카라, 다 너 때문이야.
눈을 꽉 감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열리는 소리. 끼익대지 않는 부드러운 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그 소리 이후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졌다.
고신 : "뭐야....?"
고신이 그렇게 말하자 데빌은 질끈 감은 눈을 살짝 떴다. 흐린 사이로 본 방에 데빌은 없었다.
데빌의 겉옷은 그대로 있었고, 탁상에는 웬 노란색 편지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고신은 성큼성큼 들어가 그 편지를 집어 들곤 한참 조용히 있었다.
고신 : ".....가자. 데빌씨 찾으러."
고신은 편지를 있던 곳에 놓고 데빌의 겉옷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파틴도 편지를 집어 들었다. 블랙의 편지였다.
파틴 : ".....블랙 이 바보가...."
참으로 블랙 답다. 헛웃음을 짓곤 파틴도 고신을 따라 나갔다.
두 용은 뛰어서 실버손 밖으로 급하게 나갔다. 덴버로 갔다고 쓰여있었지만, 데빌이 정말 블랙을 찾아 덴버까지 향했을까. 덴버 방향의 도로를 걷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고신 : ".....너무 늦었나. 멀리 가신 걸까."
파틴 : ".....글쎄요."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멀지 않은 곳에서 데빌을 찾을 수 있었다.
실버손 장벽 뒤 쪽의 용이 오지 않는 곳, 거기에 데빌은 주저 앉아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는지 온 피부가 벌게져 있었다. 고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입김은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데빌 : "....파틴."
두 용이 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데빌은 힘겹게 파틴을 불렀다.
데빌 : "아까 쪽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어?"
파틴은 잘 접어 주머니에 넣어둔 포스트잇을 꺼냈다.
거짓말만 해서 미안해요. 사랑해, 영원히 사랑해.
그대로 읽었다.
데빌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힘 없는 조그마한 손으로 위태로이 붙잡고 있던 풍선을 놓친 꼬마마냥. 그러나 놓쳐버린 빨간 풍선은 그런 꼬마의 마음도 모르고 눈 내리는 잿빛 하늘로 빨려 들어가 처참히 터져, 남은 건 구멍 난 고무 조각 뿐이다.
데빌이 붙들고 있는 그건 분명 좀비가 된 블랙의 몸이었다. 경비가 장벽 주변 좀비를 정리할 때, 블랙도 거기 있었던 모양이다.
비명을 질러대는 데빌의 뒤에 서서 파틴은 나지막이 말을 놓았다.
파틴 : ".....나 차라리 그 마을에서 마카라를 못 찾았으면 좋았을 걸. 그럼 어딘가에서 가족들과 따뜻하게 있겠지 하고 멋대로라도 생각했을텐데....."
파틴의 중얼거림에 고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데빌의 우는 소리에 좀비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파틴 : ".....끈질기게도 우리는 살아있네요."
고신 : ".....그러게. 끈질긴, 아주 끈질긴......"
고신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파틴은 주머니 속 총알을 만지작거렸다.
사랑은 짙은 향만을 남기고, 짙은 슬픔만을 남기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