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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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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00:15









통통, 페인트가 다 벗겨진 주차장 벽으로 데빌의 테니스공이 튀었다. 데빌은 계속해서 공을 그 벽으로 던지고 받고를 반복한다. 고신은 출구 옆 계단에 앉아서 공을 튕기는 모습, 그리고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담배 필터를 길게 빨았다. 마지막으로 데빌이 세게 공을 던지고 그 공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주차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을 때 고신도 담배를 그 벽으로 튕겼다.


튕기는 도중에 담뱃재가 고신의 무릎 위에 덮여있던 데빌의 비닐 점퍼 위로 떨어졌지만 그 두 용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계단에서 일어난 고신이 뒤꿈치에 구겨져있던 신발을 고쳐 신으며 바닥으로 떨어진 데빌의 점퍼를 무성의하게 들어 올려 데빌에게 안겨주었다. 


튕겨져 나간 공 쪽을 가만히 바라보던 데빌이 느릿하게 그런 고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 쪽 손으론 바닥에 질질 끌리는 점퍼를 끌어안으며, 고신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가 다시 팽팽해졌다. 



너 딴 년 생각해?



데빌의 장난스런 질문에 고신이 역시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가 생각난 건 있었는데 왜 생각난 건지 모르겠네.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자 연기 같은 입김이 사방으로 날렸다. 여자면 가만 안 둔다, 시발. 작지만 날카로운 음성에 고신이 웃었다. 그러자 데빌은 씁쓸하게 웃으며 점퍼를 뒤집어쓰곤 팔을 꿰었다. 그 순간 점퍼주머니에서 딸랑, 하고 열쇠고리와 오토바이 열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건 주차장에 데빌의 오토바이를 세우기 전부터, 올림픽대로를 타고 속도를 내기 전부터, 교문에서 데빌을 만나기 전부터 하고 있었던 생각이다. 근데 왜 생각이 난 것인지를 고신은 알지 못했다. 순서는 뒤죽박죽이었고 관계성이 전혀 없었다. 



나 학교 애들이 피하잖아, 양아치에 일 년 꿇었다고. 근데 어떤 애가 있는데 걘 나한테 안 쫄더라? 반말에다, 피하지도 않고. 피식 웃는 고신을 보며 데빌도 따라 웃었다. 너한테 안 쪼는 년은 대체 어떤 년이냐, 면상 한 번 보고 싶다. 데빌은 별 감흥 없다는 투로 얘기한다.





근데, 이렇게 머릿속에 뜬금없이 떠오르는 용이 있었나.



우뚝 선 쇼바에 앉으며 점퍼 주머니에서 키를 뺀 데빌이 시동을 걸며 그 존재의 이름을 물어온다. 고신은 걔? 이름이 엔젤이래, 엔젤. 하고 대답을 하며 데빌의 뒤에 앉았다. 막상 데빌은 그 이름을 흘려듣는 듯 무심히 레버를 당겼다.


이름만 뱉었을 뿐인데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고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고신의 짝, 특이한 애, 고신은 지금처럼 뜬금없이 떠오르는 그 얼굴을 골똘히 되새겨 보았다. 얼굴은 존나 예쁜데, 당돌하고 겁대가리 없고. 고신과 짝이 되면 슬슬 피하다 종국엔 담임에게 자리를 바꿔줄 것을 사정했던 다른 아이들의 표정과 옆에서 무심히 필기 하던 그 표정을 겹쳐보았다. 



아무래도 다르다.



처음엔 특이했는데 어느 순간 그 얼굴을 다시 쳐다보게 만들었다. 책을 가지고 오지 않는 고신을 보며 제 책을 고신의 책상과 제 책상 사이에 펼쳐 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필기를 하던 그 사각거리는 샤프소리가 고신의 귓전에 맴돈다. 



이상해, 그런 적은 없는데.



강한 탄성으로 튕겨져 나간 테니스 공처럼 오토바이 바퀴가 튀었다. 일순간 속도를 올린 데빌 때문에 고신의 몸이 뒤쪽으로 많이 길울여졌다가 다시 데빌의 등으로 찰싹 붙었다. 데빌은 그게 좋아서 급작스럽게 속도를 올리곤 했다.



왜, 내가 걔를 생각하는 거야. 라는 고신의 말이 입속에서 탄성과 함께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렸다. 고신은 속도를 버티지 못하고 데빌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빠른 속도에서 생각은 풍경처럼 길게 날아가지 않았다. 




















고신 : "야, 너 내가 일 년 꿇은 건 아냐?"


엔젤 : "어. 근데 그게 뭐?"


고신 : "근데 그렇게 말이 짧으면 되냐?"


엔젤 : "같은 학년이잖아."


고신 : "야."


엔젤 : "뭐."





말이 막혔다.


고신은 황당함에 웃음만 나왔다. 화가 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엔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사각거리며 필기를 하던 엔젤은 문득 필기를 멈추고 고신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다 마는 것 같기에 뭐? 하고 되물었더니 그냥 아예 입을 꾹 다물고 필기를 한다. 고신이 엔젤의 샤프를 잡았다. 꾹 하고 누르자 샤프심이 툭 하고 부러지며 튕겨져 나갔고 이내 노트가 찢어졌다. 엔젤은 그제야 미간을 구겼다.


이번엔 샤프가 아니라 엔젤의 손목을 세게 쥐었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대체로 그렇게 하고 나면 상대는 이상하게도 두려움을 느꼈다. 언젠가 같은 학년이었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애를 때린 적이 있다. 뭔가 고신에게 거슬린 행동이나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릴 새도 없이 교식 구석으로 몰아넣고 무자비하게 밟았다. 코피가 터지고 교복 셔츠에 그 핏자국이 튈 때 까지, 아니 정확히는 학교 선생들이 고신의 팔을 붙잡고 끌고 가기 전까지 때렸던 것 같다.


그 일을 계기로 자퇴를 한 건 아니지만 그 이후로 아이들은 고신을 더더욱 두려워하거나 혹은 더더욱 경멸하기 시작했던 것 같긴 하다. 근데, 팔을 붙들린 엔젤은 어느 쪽일까. 고신이 손에 더 힘을 주자 구겨진 미간으로 한참 고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엔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고신을 바라보았다. 


두려움도, 경멸도 없는 눈빛. 주눅 들지 않는 눈빛.





엔젤 : "니가 이러면 내가 무서워할 것 같니?"


고신 : "....."


엔젤 : "정말 웃겨."





엔젤이 다시 필기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불쾌한 감정이 고신의 가슴에 솟구쳤다.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도 없다.


그 순간 알았다. 고신의 짝으로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던 다른 아이와 이 아이는 다르다는 것을. 엔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필기에 공들였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신은 몰랐다. 다시 화를 내야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동안 고신은 가만히 사각거리며 필기를 하는 엔젤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봤다.


예쁘긴 존나 예쁘네. 그냥, 그냥 이상했다. 이토록 멍청할 수가 있나, 고신은 생각했다. 화를 내야 하는데 화가 더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언제부터 예쁜 애들이라고 내가 욕을 하지 않은 적 있나, 다시 곱씹어 욕을 하려 했지만 허, 하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엔젤 : "필기나 해. 책 없으면 필기라도 잘 해야지."










그 때 화를 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고신은 바람결에 후회를 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감기는 눈에 고신은 그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앞으로 간다. 도무지 차근차근 순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 전에 또 무슨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까는 생각이 났는데 지금은 왜 생각이 나질 않을까. 


그러던 중 데빌은 속도를 더 올린다. 터널 속으로 데빌과 고신이 빨려 들어가고 고신은 순간을 받아들이려 아무 말이나 해버린다.



고신 : "너 비트 봤어? 거기서 주인공이 눈 감고 팔 벌리잖아. 눈 감고."



그러나 데빌은 듣지 못한다. 고신의 말은 터널 속에서 괴성으로 둔갑하여 울리고 데빌의 오토바이는 물결치듯 차선을 변경하며 뒤에 오는 차의 진로를 방해한다. 뒤에서 성난 경적이 들려오고 그 소리에 맞춰 고신이 잠시 팔을 펼쳐본다. 



이러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이거 타다가 죽으면?



그 말도 바람결에, 그리고 속도에 날려 버렸다. 





죽어도 상관 없어.





라고 말해버리고 나자 물결치던 데빌의 오토바이가 곧게 일직선으로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을 때, 또 다시 기울여지던 몸이 위험신호를 감지했는지 짜릿함으로 변모한 소름으로 온 몸에 돋아났을 때, 고신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걔를 왜 생각하는 걸까.



고신은 답을 찾지 못했다. 왜 라는 질문에 답을 해줄 사람은 고신 자신 뿐이다. 하지만 못한다. 불쾌한 감정이 다시 고신의 가슴을 치고 누른다. 















고신의 귓가로 사각거리는 샤프심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굉음까지 묻혀버릴 정도로 선명하고 점점 또렷해질 뿐이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고가도로 끄트머리를 비춘다. 어느새 텅 비어버린 도로 위에 데빌의 오토바이만이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고신의 동네를 뜻하는 글자가 박힌 표지판을 확인하고는 고신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샤프심 소리가 멎고 굉음이 귓가를 파고든다. 



일전에 데빌의 오토바이가 심하게 비틀거린 적이 있었다. 이런 심한 굉음과 함께 핸들이 제 멋대로 꺾여서 하마터면 오토바이가 전복 될 뻔했는데 그 때 데빌이 간신히 제 멋대로 움직이는 핸들을 붙잡고 브레이크를 잡아서 큰 사고는 면했었다. 


고신은 그 때부터 굉음이 들려오면 죽음과 가까워지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과 가까워져도 미련이 없는 용처럼 굴게 된 건 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더라도 죽는 게 아닐 것 같아서 일까, 아니면 차라리 죽고 싶어서 일까.





데빌 : "다 왔어."



데빌의 말에 고신이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골목이다. 고신이 데빌의 허리춤을 잡아당기자 데빌이 천천히 오토바이를 세웠다. 이면도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 오른쪽의 풍경이 판이하게 갈린다. 



왼쪽은 긴 장막이 둘러진 채 고층 아파트를 세우려는 준비가 한창인 공사현장의 모습이, 오른쪽은 가난한 달동네의 상징인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단층 주택들의 모습이. 고신은 왼쪽을 한 번 힐긋 바라보고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걸었다. 요란하게 핸들을 꺾어 방향을 돌리던 데빌의 시선이 길게 고신에게 붙었지만 고신은 손을 한 번 성의 없이 흔들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할 뿐이었다.



이 이면도로에 서면 고신은 쓸쓸해진다. 왼쪽을 견줄 수 없을 만큼의 가난이 고신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것 같다. 주머니 안에 찌그러진 담배를 만지며 오르막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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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제목은 처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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