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깁스를 풀고 조의금에서 빼둔 돈으로 사과를 사서 오는 길, 집 앞에 모르는 남자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깁스를 풀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탓에 굳은 팔을 움직이며 악력을 주었다 풀었다 하고 있는 사이 마주한 낯선 얼굴에 고신은 당혹해 했다. 그래서 엔젤과 함께 먹을 생각으로 산 사과 봉지를 떨어뜨린 걸 지도 모른다.
그 두 용은 봉지를 고신에게 주어주며 다소 험학한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은 채 흰색 종이도 들이밀었다.
남자1: "보호자 안 계십니까?"
고신 : "저한테 말씀하세요. 왜요?"
남자2: "학생, 여기 살아?"
고신 : "네. 근데 왜요?"
남자2: "여기 싸인 좀."
그들이 내민 것은 아파트 부지로 쓰일 이곳에 공사를 허용한다는 세대주의 서명이 담길 명단이었다. 고신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요란한 소리로 고층 아파트를 올리는 공사 현장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이면도로 기준으로 왼쪽 편에 살던 사람들을 몰아내던 과정을 생생히 지켜본 바가 있다. 처음엔 이렇게 웃을 것이고 나중엔 협박을 하겠지. 고신은 생각했다. 이 집의 보증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주인이 아니니 이 땅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보상을 받을 처지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쫓겨난 용들이 비참한 얼굴로 내몰리는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들 처럼 그렇게 되려나, 고신은 이 상황에서 웃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파놓은 도장이 없으면 손도장을 찍어도 된다고 했다. 고신이 엄지손가락을 인주에 찍어 서명 란에 도장을 찍었다. 비굴하고 음습한 표정으로 휴지를 내미는 남자를 밀치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킥킥대며 고신을 쳐다보고 옆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고신은 수도꼭지를 열어 손가락에 묻은 인주를 씻어내면서 비슷한 상황을 떠올렸다.
몇 개월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런 비슷한 기분이 들긴 했다. 이제 완전히 홀로 남겨지고, 이제는 쫓겨날 처지가 되고 나니 이젠 이런 일도 있구나 싶어 웃음도 나는 모양이다. 고신은 씁쓸하게 웃으며 수도꼭지를 돌려놓고 손을 닦았다.
주말이니까 엔젤은 좀 더 일찍 오겠다고 했다. 그런 엔젤에게 자신한테 찾아온 또 다른 불행을 전하기가 두렵다.
나쁜 건 금방 옮는데, 내 불행이 너한테 옮으면 어쩌나.
고신은 생각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두 눈을 꼭 감고 이빨을 꽉 깨물어 입을 닫았다. 그 순간 미친 듯이 오토바이가 그리웠다. 아슬아슬한 그 속도감이 그리웠다. 데빌이 오토바이를 잃은 탓에 탈 수 없는 상황이 되긴 했다. 근데 그 상황보다 더 고신을 오토바이에 오를 수 없게 하는 것은 엔젤과의 약속이었다. 그렇다면 엔젤을 보는 게 좋을까. 갑자기 오토바이에 대한 생각이 엔젤에 대한 생각으로 번져간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엔젤이 냉장고 위에 놓은 사과를 보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 갑자기 사과 먹고 싶은 거 어떻게 알았어? 생글 웃는 엔젤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엔젤은 부쩍 고신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고 예쁘게 와 닿는다. 원래도 예뻤는데 갈 수록 더 예뻐져 애가 탄 고신이 손댈 수도 없을 만큼 예쁘게 웃는 엔젤을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 어딘가 구겨진 감정을 느꼈다.
가방을 방 안에 내려놓고 과도를 찾아 꺼낸 엔젤이 서툴게 사과를 깎는 것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엔젤이 묻는 것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방문에 기대어 엔젤을 바라보았다.
야 너 사과 진짜 못 깎는다. 말하자 엔젤이 웃었다. 넌 이정도도 못 깎잖아. 말하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오른 것인지 엔젤이 과도를 내려놓고 고신의 왼 손을 쳐다보며 묻는다. 너 깁스 풀었어? 왜, 왜 말 안 했어? 고신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머리를 방문에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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