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젤과 그 좁은 현관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크로마키로 합성을 해 놓은 듯한 엔젤은 그 자리에 있는 내가 이상하지 않은 건지 무덤덤한 얼굴로 신발을 벗도 들어와 내 발치에 흰색 비닐봉지를 던질 뿐, 나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흰 비닐봉지 안에서 소독약과 소염진통제, 붕대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잠깐 발가락을 움찔거리며 난색한 채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깐 고민하다 뻔뻔한 척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래야 덜 쪽팔릴 것 같아서였다.
고신 : "남는 옷 없냐? 병원 가야 되는데 이 꼴로 못 가겠는데."
등 뒤를 타고 열기가 올라와 귓볼과 뒷목을 데웠지만, 저자세로 나가긴 곤란했다.
엔젤 : "일요일에 무슨 병원."
고신 : "아, 오늘 일요일이냐? 그럼 응급실이라도 가게."
엔젤 :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는 알아?"
고신 : "폰 보면 알겠지. 아, 내 폰 어디 갔지. 미안한데 폰 좀 빌리자. 아니, 아니다. 일단 옷부터."
내 수중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지금 이런 채로 또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다. 순간 또 짜증이 났다. 어제는 왜 또 싸웠더라. 기억도 안 났다. 싸울 이유는 많아도 그걸 기억해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니까.
가슴이 답답할 지경인데 엔젤은 나를 스치고 방에 들어가더니 내가 입고 있는 것과 꽤 비슷한 셔츠 하나를 내밀었다. 왜 그렇게 협조적인가 생각해보곤 내 꼴을 내려다보자니 그냥 내치기엔 눈물 날 꼴이긴 했다.
막상 그걸 받아서 엔젤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려니 왠지 모르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단추를 푸는 손이 자꾸 헛돌았고, 그러자 엔젤이 그것이야 말로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에 본능적으로 내가 뭔가 변명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반사적으로 뭐야? 하고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내 눈 앞에 있는 엔젤이 이죽이며 팔짱을 꼈고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분명히 좀 전까지 손도 아프고 온 몸이 쑤셨는데 쪽팔리니 이상하게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진통제 같은 건 안 먹어도 될 정도로 통증이 무감각해지면서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우스운 꼴로 서 있다는 게 너무 쪽팔린 나머지 견디기 힘들어서 엔젤이 건넨 셔츠는 받지도 못하고 벗다 만 내 셔츠를 도로 입으면서 현관을 나설까 했다, 처음엔.
근데 그렇게 도망가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가, 못됐지만 그런 내 상황을 합리화 하려 쪽팔린 거로 치자면 얘가 나한테 더 쪽팔려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유치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고,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엔젤이 다시 내게 아무 말 없이 셔츠를 건넸다.
그 애를 학원 앞에서 마주쳤다는 것도 떠올랐고 나를 두고 가려는 걸 되지도 않을 끼를 부리며 졸졸 따라간 것이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결국 할 수 없이 나는 곧 한 수 접고 엔젤이 내민 셔츠를 받아들었다. 달아오른 얼굴의 온도 때문에 차마 고개는 들지 못했지만 여전히 나는 뻔뻔하게 입을 놀렸다.
고신 : "그 시간에 거긴 왜 있었냐."
엔젤 : "거기 다녀."
고신 : "니가?"
엔젤 : "너 같은 애도 다니잖아."
곧 나는 퉁명스럽게 발치에 구르는 소독약을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몇 년 만에 조우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생각했다. 자꾸 공백을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하게 들떠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약기운이 남아있나. 엔젤이 '근데 너 어제 왜 그랬니?' 하고 물을 까봐 잠깐 좀 걱정했지만 그냥 대충 취한 척 둘러댈 생각이었다.
목도 마르고 손바닥도 아프고 온 몸이 쑤셔서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대충 두른 붕대에 흉터가 엉겨 붙어 그걸 푸는데 다시 피가 줄줄 샜다. 시발, 존나 아프네. 말하자 엔젤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내 상처에 빨간 소독약을 쏟아 부었다. 뚝 뚝 바닥에 떨어지는 소독약을 신경도 쓰지 않고서.
찌릿하고 따끔거리는 통증에 소리를 지르자 엔젤이 낮게 조용히 좀 해, 말하고는 어제보단 그나마 정밀한 손길로 붕대를 감아주었다. 아주 가까이서 엔젤과 이러고 있는 게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엔젤의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멘티, 멘토로 마주보고 앉아있던 그 때가 생각이 났다. 너무 오래 된 기억이었다. 그 기억이 다른 기억들로 이어질까 두렵다. 두려움 때문일까 갑자기 눈알이 아려왔다.
그렇게 입을 꾹 닫아가며 신음을 참는 동안 약간 엉성한 모양으로 나마 붕대가 다 감겼다. 엔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타고 가다 점점 올라 얼굴에 닿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고, 얼마나 빨리 고개를 돌려버린 건지 순식간에 엔젤이 건넸던 셔츠로 옷을 갈아입고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왔다.
쪽팔렸으면서 나는 고맙다, 라는 인사치레도 못했다. 쪽팔려서 병원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쪽팔려서 온 몸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동네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신림동 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때 내 바지 뒷주머니에 폰과 카드 지갑이 있는 걸 찾아냈다. 빈 책상에 그걸 던지면서 다신 엔젤과 마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술만 취하면 쪽팔림에 그 집 앞을 방황했던 기억력을 되살려 그 집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