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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st] 16

10
  • 조회수23
  • 작성일2026.02.22






그 시기엔 이유도 없이 누군가에게 강렬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것도 나보다 한 살 어린 애를, 그것도 내게 호의적으로 굴지 않는 누군가를. 내가 그럴 리 없다는 부정에서 싸가지 없게 반응하는 반동형성으로 방어기제가 옮겨가게 된다. 나중엔 내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던 것도 같다. 내가 지금 이럴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며. 



내 반항심이 극에 달할 수록 성적은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학교에선 담임이 개교 이래 이런 성적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면박을 서슴지 않았고, 집에선 점점 내 미래를 위한다는 핑계로 부모님이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엄마의 치맛바람은 강남 바닥을 휩쓸다 못해 내 머릿속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다. 아버지가 미국이니 뉴질랜드니 유학을 보낼 수 있는 학교를 몰색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 바닥에 있는 내 성적을 전교권으로 올려준다는 학원을 찾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내 의견을 듣지 않았다. 



갑자기 졸부가 되면 저렇게 되는 건가. 언젠가 로또 1등 당첨자가 돈이 갑자기 생겨나니 가족끼리 불화가 생겨 개판이 됐다고 했던 인터뷰 내용이 생각이 났다. 어떤 식으로든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런 혼란 속에 엔젤에게 이끌리는 것도 반항과 방어기제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그 엿 같은 제도의 마지막 주간, 마지막 기말 고사를 하나 남겨둔 그때 쯤 나의 유학이 최종 결정 되었다. 지리멸렬한 부부싸움의 승자는 결국 아버지였다. 이름도 너무 길어 외울 수도 없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상류층에 속하는 미국가정에 홈스테이를 하는 것도, 그에 관련한 서류도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제 각기 다른 인종, 그러나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드넓은 잔디밭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학교 홍보 책자를 보니 정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책자를 거실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왜 내 인생을 엄마 아버지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냐고 처음으로 직접적이게 반항하며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너무 화가 나니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제어하지 못하고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거기 보내면 정말 내 마음대로 막 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 이후 유학시절 미국의 그 학교에서 마리화나를 건네는 친구를 보며 고래고래 핏대 세워가며 뱉어낸 그 말이 현실이 된다는 것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냥 해본 말이지만 결과적으로 막 살겠다는 내 으름장은 현실이 되었다.



부자가 아니라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던 우리 가족의 일상은 너무 오래 전, 마치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인 듯 빛이 바래졌다. 엄마가 준 카드로 명품 쇼핑을 하기 시작한 누나들 눈에 뭐가 보였을까. 유학이 부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미국에서 적응을 잘 해서 내친김에 거기서 자리를 잡아 시민권이라도 따면 더 좋은 일이라고 부모님의 의견을 추켜세우기도 했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 주간의 월요일, 우리는 똑같이 했던 대로 나는 가만히 앉아있고 엔젤은 교재에 적힌 영어 지문만 읽어나가며 앵무새처럼 해설을 해주고 문제를 풀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시선에 붙잡힌 듯 가만히 눈을 들여다봤다. 내 혼란을 이식시킨 듯 엔젤의 눈동자가 요동치며, 눈가가 떨리는 것이 느껴지면 이상하게 엔젤에게 뭐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나 유학 가, 드라마틱한 말. 너한테 끌리고 있다는 말 같은 건 못하니까. 어떤 심정으로 그 시간을 흘려보냈던 건지 모르겠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정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강박이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다음 날, 엔젤은 프로그램 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6교시 때 구금차가 급히 학교 안으로 들어와 누군가를 급히 들것에 실어 나가는 장면이 떠올라 혹시 그것 때문에 늦어지나 싶었다. 의외로 그 학교에선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시험기간에 가끔 몇몇의 아이들이 두통이나 복통을 호소하며 보건실을 찾는다던가 급하게 외출증을 끊어 병원을 다녀오는 일 같은 것.



걱정인지 뭔지 모를 생각으로 초조해 하고 있던 그 때 , 엔젤이 슬그머니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상기 된 두 뺨에 자그마한 흉통이 급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숨이 벅찬 듯 숨을 고르는 태도도 그랬다. 뛰어온 건지 넘겨진 머리카락이 정갈하지 못했다. 그 머리카락 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는데 갑자기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엔젤 : "30분 늦었으니까 30분 더 보강할게요."





엔젤은 안 그런 척 했지만 늦은 만큼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았다. 자꾸만 빨라지는 목소리에, 교재 모서리를 문지르는 뾰족한 손끝이 붉어진 것도, 꽤 마음에 걸렸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 까지 엔젤은 자신이 채우지 못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런 건 지키지 않아도 되는데.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내 입을 그런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막는 것 같았다. 



유학까지 남은 시간을 곱씹으며 눈 앞의 약간은 다른 날과 달리 흐트러진 엔젤의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견딜 수 없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솔직히 표현하자면 그 소문처럼, 그 애와 데이트라던지, 뭐 그런 걸 하고 싶었다. 



텅 빈 교실에 마주 앉아있다는 사실이 내게 뭐라도 해보라고 또 다시 부추기는 것 같았다. 할당량을 채워갈 수록 엔젤은 점점 조바심을 내려놓고 차분해져갔다. 반대로 나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뭐라 말이라도 한 마디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번번이 입을 도로 잘근잘근 깨물어 삼켰다. 내가 곧 다리를 떨기 시작하자 엔젤이 뚝 하고 말을 멈췄다. 



시계를 보니 원래 마쳐야 할 시간에서 조금 더 지나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엔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소문을 의식해서 먼저 일어나 쏜살같은 걸음으로 사라졌던 것과 대조되는 행동임은 틀림없었다. 





"해가 짧아졌네."



중얼거리며 창밖을 빤히 쳐다보던 엔젤이 느릿하게 나를 쳐다봤다. 의식할 애들도 없으니까 같이 나서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 같은 생각인지 엔젤도 마치 나를 기다리는 듯 먼저 일어나 느리게 걷다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시간에 학교에 남은 이는 정말 없는 듯 했다. 



텅 빈 복도에 엔젤의 단화 구둣발 소리와 구겨 신은 내 운동화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노을이 지면서 복도의 창가로 방대한 양의 노을빛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런 풍경은 낯설 정도로 서정적으로 비춰졌다. 그런 공간 속에 나와 엔젤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고, 이것도 얼마 남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며 아주 잠깐 자기 연민에 빠져 들었던 것도 같다. 



그냥 한 때의 호기심 정도로 묻어야 될까, 이 감정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억울했다. 유학을 가야 한다는 것도, 끌리는 누군가에게 말 한 마디 못한다는 사실도.



그러다 엔젤이 갑자기 복도 중간 쯤 걸음을 멈춰서선 창 밖 하늘 어디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필 애가 서 있는 그곳이 딱 그 노을이 쨍하게 반사되는 지점이었다. 눈을 얼마나 아리게 반사 되어 오는지 잠깐 주춤하며 고개를 돌린 채 의도치 않게 엔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잔잔하게 갈린 구름에 닿은 노을빛이 그림처럼 예쁘긴 했지만 가만히 서서 넋을 놓고 지켜볼 만큼은 아니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러고 선 엔젤을 두고 지나치진 않았다. 아린 눈을 반쯤 감은 채, 구름에서 창틀로, 창틀에서 엔젤의 얼굴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깟 노을보다야 엔젤이 더 예뻤다. 엔젤의 눈이 천천히 내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몸을 돌렸다. 





모든 것이 멈춰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그랬다. 



어쩌면 충동적으로 그러길 바랐을 지도 모르겠다.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떨리는 걸 볼 때마다 묻고 싶었다. 너도 그러는지, 너도 내게 이끌리는 걸 견딜 수가 없었는지.





엔젤 : "선배 지금 무슨 생각해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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