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여전히 아이들이 다 쳐다보는 복도에서 스칠 땐 시선을 의식해 여전히 모르는 이들처럼 쌀쌀맞게 스쳤고, 둘만 있을 수 있는 순간이 오면 처음 복도에서 그랬던 것 처럼 대했다. 가끔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엔젤의 몸을 꽉 끌어안을 때면 내 모든 불안이 잠잠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구체적으론 엔젤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질 수록, 그렇게 나의 뇌관이, 그렇게 조금씩 건드려지는 줄은 그 땐 미처 몰랐다.
엔젤 : "사랑해."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이를 규정할 수 있는 말. 곧 뭔가를 조르듯 내게 안겨든 엔젤이 내 목에 매달려 선배는? 하고 물어왔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눈이 아픈 것 같더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컴컴한 시야 속으로 먹먹하게도 사랑한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내게 들려왔다.
그건 내가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세상엔 대체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많다는 걸 엔젤을 보면서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자그맣게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흘렸다. 그 애가 기쁜 듯 나를 안고 내게 뱉었던 말을 되풀이 했다. 우리는 느지막이 교실을 빠져나와 어둑한 운동장 트랙을 뱅뱅 돌았다.
점점 더 늦은 시간까지 엔젤을 잡아두고 있었다. 그 학기 기말 고사 성적이 공고가 되었을 때, 엔젤이 입학 후 처음으로 전교권에 들지 못했다.
나의 바람대로 담임은 내가 유학을 가게 됐다는 사실을 하루 전 날 까지 반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주간의 마지막 날, 금요일 아침, 기습적으로 그 사실을 알린 담임의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 사실은 2교시가 되기도 전에 전교를 돌았던 모양이었다.
전학을 왔을 때부터 튀었던, 그 학군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로, 성적으로 아이들과 섞이지 못했던 내가, 전교 부회장과 스캔들이 있었던 나는 또 이슈를 만들어냈다. 쉬는 시간 마다 노골적으로 몰려와 내게 이것저것 묻는 아이들 때문에 쉬는 시간이 꽤 곤혹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이미 소문이 돌아 엔젤의 귀에 내 유학 사실이 들어갔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엔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자주 만나던 옥상이든 뭐든 어디서도. 심지어는 쉬는 시간 교실 앞을 지나쳐도 엔젤은 없었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깨닫게 되는 것 까진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너한테는 미리 말하려고 했었어. 그런 핑계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담임이 찾아 교무실로 가는 길 적막하게도 텅 빈 복도를 아주 천천히 걷다가 그냥 무작정 엔젤의 교실을 찾아가 수업중인 그 애를 끌어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심정이 들었다.
놀랍게도 교무실로 향하던 내 걸음이 딱 멈춰버렸다. 교무실에서 문을 열고 나서는 쟤가 엔젤인 것 같아서. 다리가 저려오는 것도, 눈 앞에 희뿌옇게 수증기가 차듯 현기증이 이는 것도 잊게 만들었다. 어설프게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내 쪽으로 걸어오는 엔젤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이가 보는 앞에서는 늘 모르는 사이였어야 했으니 또 모르는 척 스칠까 봐 약간 조바심이 났던 것도 같다. 의식할 다른 이들도 없는데 마치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경계하는 얼굴의 엔젤은 그런 틈에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적막한 복도에 울리는 엔젤의 발소리가 탁탁 내 가슴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엔젤 : "선배 유학 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엔젤 : "왜 말 안 했어요?"
엔젤의 두 눈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삽시간에 빨개진 눈에 눈물이 고여 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고개를 저으려 했건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그동안 나한테 왜 그랬어.
물어오는 목소리도 떨렸다. 자조적으로 웃는 얼굴에 나는 내 마음이 꽤 다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엔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말하려는 순간 그 때 누군가 교무실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엔젤의 뒤로 보였다. 제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자마자 엔젤은 턱을 똑바로 들고 눈만 내리 깐 채로 나를 스쳐지나갔다.
다른 건 의식 할 겨를도 없었다. 엔젤을 놓칠 새라 쫓아가 팔목부터 잡아끌었다.
"잠깐만, 엔젤. 잠깐만."
엔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교실 복도 창으로 누군가가 우리를 힐긋 거리고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별관이 있는 통로 쪽으로 엔젤을 끌어당겼다. 복도를 잇는 구름다리를 지나 바로 쪽문이 보이자마자 문을 열고 엔젤을 밀어 넣었다.
늘 허공 속을 감돌다 겨우 붙잡았던 손은 차가웠다. 꼭 잡으려고 해도 자꾸 빠져나가는 손가락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인지 뭔지 모를 액체가 뺨에 느껴져 얼굴을 감싸 안았다. 엔젤의 얼굴이 정말 상처받은 이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곧 엔젤은 내게 어떤 변명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 얼굴로 다시 나가버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엔젤을 볼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없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엔젤이 자살시도를 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문을 들었다. 너에게 나는 그 정도가 아니길 바랬다는 그 말이 그 애에게 칼날 같은 거라는 것을 알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이륙하는 비행기를 쳐다보며 내가 탈 비행기가 추락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죽음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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