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OW
프롤로그
서기 2500년, 서울의 하늘은 더 이상 푸른색이 아니었다. 거대한 마천루들이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고, 그 사이를 흐르는 자기부상 열차들의 궤도는 마치 거대한 도시의 혈관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화려한 초고층 빌딩 숲 아래 흐르는 공기는 100년 전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오염된 대기가 아니라, 저 먼 이계(異界)의 기운, 이른바 ‘마력’이 섞인 진득하고 이질적인 안개였다.
사람들은 100년 전 그날을 ‘대재앙’이라 부른다. 차원의 벽이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났던 날, 인류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불행은 곧 기회가 되었고, 재앙은 상품이 되었다. 마계에서 쏟아져 들어온 괴생명체들은 초기엔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자본주의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차츰 ‘자원’이자 ‘유희’로 변모해 갔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가장 사소한 곳에서 일어났다. 인류의 오랜 동반자였던 강아지와 고양이의 자리를, 마계의 피를 이어받은 ‘몬스터’들이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정점은 단연 ‘드래곤’이었다. 과거 신화 속에서 대륙을 불태우고 왕국을 멸망시키던 그 경외의 대상이, 이제는 백화점 쇼윈도 안에서 리본을 매단 채 주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드래곤 한 마리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당신의 품격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선진국의 기업들은 앞다투어 드래곤의 야성을 지우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유전자 조작과 마력 제어 장치를 통해 그들의 거대한 덩치는 축소되었고, 세상을 태워버릴 화염은 기껏해야 담배 불을 붙이거나 찻물을 데우는 용도로 순화되었다. 그렇게 50년 전, 인류 공학의 정점이라 불리는 ‘뉴 드래곤(New Dragon)’ 품종이 탄생했다.
뉴 드래곤은 완벽했다. 다 자라도 성인 남성의 키를 넘지 않는 2미터 남짓의 아담한 체구,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개조된 비늘,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온순한 성격까지. 그들은 더 이상 절벽 위 동굴에서 보물을 지키지 않았다. 대신 세련된 펜트하우스의 대리석 바닥 위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낮잠을 잤다.
하지만 이 완벽한 아름다움 뒤에는 서글픈 대가가 따랐다. 인공적으로 야성을 거세당한 뉴 드래곤들은 스스로 살아남을 능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길거리에 버려지는 순간, 굶주린 길고양이의 공격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유약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포효 대신 가느다란 가르릉 소리를 내는 그들은, 인류가 만든 가장 화려하고도 슬픈 장식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