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OW
1화
서기 2500년의 겨울은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수분을 머금은 자연의 결정체가 아니라, 거대 기업의 기후 조절 장치가 내뱉는 미세한 화학 입자, 즉 '인공 눈'이었다. 육각형의 정교한 대칭을 이룬 그 가짜 눈송이들은 생명력 없이 차갑기만 했고, 바닥에 닿는 순간 녹아 사라지는 대신 딱딱한 서리처럼 변해 도시의 피부를 갉아먹었다.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에서 한참 떨어진 구석, 재개발조차 포기된 낡은 아파트 단지의 뒷길은 버려진 고철과 악취 나는 마력 폐기물로 가득했다. 그 좁고 습한 샛길 사이로, 기이한 형체 하나가 무거운 짐을 끌며 나타났다.
그것은 뉴 드래곤이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거실에서 비단 방석 위에 앉아 사랑받았을지도 모를, 윤기 잃은 비늘을 가진 암컷 드래곤. 녀석은 입에 낡고 눅눅한 종이박스 하나를 물고 있었다. 2미터가 채 되지 않는 왜소한 몸집의 녀석에게 그 박스는 제 몸 하나 뉘기도 벅찬 크기였지만, 녀석은 절박했다.
"크으으..."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신음은 포효가 아니라 비명에 가까웠다. 녀석은 쓰레기 더미 사이에 박스를 고정했다. 그리고는 이내 안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차가운 인공 눈이 박스 모서리에 쌓이기 시작할 무렵, 좁은 종이 상자 안에서 격렬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한 번, 두 번... 긁히고 찢어진 박스 벽면 너머로 억눌린 고통이 배어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친 숨소리 사이로 가느다란, 마치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마리였다.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비늘을 가진, 고양이 새끼보다도 작은 네 마리의 생명이 그 비참한 요람 안에서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어미 드래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쉴 틈이 없었다. 녀석은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굶주린 길고양이나 청소 로봇, 혹은 자신들을 '폐기물'로 취급할 인간들이 오지 않는지 경계하는 눈초리가 번뜩였다. 이내 안전함을 확인한 녀석은 다시 박스 안으로 기어들어 가, 차가운 바닥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기보다는 '감각'이 깨어났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따뜻한 향기였다. 그것은 눅눅한 종이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안심시키는 포근한 체온이 섞인 향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온기를 향해 기어갔다. 아직 다 펴지지도 않은 작은 날개가 바닥에 닿아 버둥거렸지만 상관없었다. 그곳에 나의 생존이 있었으니까.
입술에 닿은 엄마의 젖은 달콤하고 뜨거웠다. 그것이 내 몸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길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를 감싸던 거대한 온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였다. 엄마는 아주 낮은 저주파의 울림으로 우리에게 속삭였다.
기다려라. 멀리 가지 않으마.
그것은 명령이자 간절한 부탁이었다. 엄마의 형체가 박스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틈새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들이닥쳤다. 인공 눈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냉기였다. 형제들은 갑자기 사라진 온기에 당황한 듯, 갸냘픈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끼이, 끼이..."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박스 틈새로 비쳐 드는 희미한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하늘에서 하얀 가루들이 춤을 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엄마의 비늘보다 차가웠고, 도시의 불빛보다 창백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명확하게 인식한 풍경, 그것은 바로 '눈'이었다.
차가운 입자가 내 콧등에 내려앉아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세상은 이토록 차갑고도 아름다운 것인가. 나는 그 무감각한 백색의 향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박스가 흔들렸다. 엄마였다. 입가에 정체 모를 먹잇감을 물고 돌아온 엄마의 눈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엄마는 떨고 있는 형제들을 한곳으로 몰아넣더니, 길고 유연한 꼬리를 펴서 우리 모두를 덮어주었다.
"이제 자거라. 내일이 오면 조금 더 따뜻해질 거란다."
거짓말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추울 것이라는 걸, 어린 나조차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꼬리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촉감은 너무나 다정해서, 나는 그 거짓말을 믿기로 했다.
서서히 시야가 흐려졌다. 인공 눈의 냉기도, 형제들의 가느다란 숨소리도 멀어져 갔다. 나는 엄마의 꼬리 아래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기억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