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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st] 25

10
  • 조회수7
  • 작성일02:17






격양된 탓에 삑사리가 났다. 발바닥이 따끔거려와 아래를 보니 슬리퍼 한 짝이 벗겨져 맨 발이었다. 옆을 보니 흰색 구찌 슬리퍼가 보도블럭 끝에 뒤집혀 있었다. 그러던 중 행인에게 걷어차여 데굴데굴 굴러가 주워오기 애매한 곳 까지 가버렸다. 그 웃긴 상황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노을이 얼마나 쨍한지, 눈가를 아리게 찔러 와서 정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조차 없었다. 용들이 그런 우리를 스쳐지나가며 멀뚱히 대놓고 쳐다보기도 했다. 그만큼 적대적이면서도 구질구질한 이상한 모습이었다. 



역광으로 비춰진 엔젤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아 표정을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 내가 그 어떤 말이라도 곧 시작하지 않으면 그냥 가버릴 것은 분명했다. 





고신 : "야, 넌 그런 적 없어? 뭔가가 시작부터 망쳤다는 기분이 들면 그냥 작정하고 아예 다 망쳐버리게 될 때 말이야. 난 게임을 하나 하더라도 첫판부터 뭔가 잘못되면 아예 막 되는대로 해버려, 성의 없이."


엔젤 : "그래서 뭐."


고신 : "초등학교 4학년 때 잠깐 미술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어. 그 때도 그랬어. 스케치를 하는데 연필이 부러지면서 제대로 안되는 거야. 망했다고 생각해서 아예 엉망으로 그렸어. 뭘 그렸는지 알아볼 수도 없게. 그 때 내가 그런 류의 용이라는 걸 처음 진지하게 깨달았던 것 같아. 나 원래 그래. 처음부터 뭔가가 망가지면 그냥 아예 망쳐버려."


엔젤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고신 : "...그래서 그 때 우리 관계는 시작도 못하고 망가진 거라고 생각하고 내가 망쳤어."


엔젤 : "......"


고신 : "내가 미리 유학을 가게 된다는 걸 말하게 되면 우리 둘 다 아프기 시작할까 봐 무서웠거든. 니가 자꾸 내 안에서 커져가는 게, 너한테 내가 그렇게 되어가는 것도."


엔젤 : "......"


고신 : "미련 남을까 봐 겁나서 그냥 갖고 논 척 망쳤어. 나는 원래 그런 용이니까. 그래서 내가 아예 망쳐버린 거야. 봐. 나 사는 것도 좀 봐. 니가 그랬잖아, 쓰레기 같이 산다고. 난 원래 그런 용이니까, 지금까지도 망가진 채 살았어. 변명 같지만 여태 그렇게 살았어. 그렇게 게임처럼, 그림처럼 뭐든 함부로 생각했어."


엔젤 : "그게 하고 싶었던 말이야?"


고신 : "....근데 게임은 다시 전원을 껐다 키면 되고, 그림이야 다른 도화지를 꺼내서 그리면 되지만. 그렇지만, 너랑 나의 관계는,"





목울대가 시큰거려왔다. 잠깐 눈을 비볐다가 목을 쓰다듬었다. 





고신 : "내가 죽어버린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지금 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야."


엔젤 : "......"


고신 : "내 맘 편하자고 사과하고 떠나려는 거 아니야. 그 짓은 이미 오래 전에 해봐서 알아. 안 돼. 이번에 그렇게 미국 가버리면, 거기서도 계속 이렇게 살게 되면 나 진짜 길거리에서 총 맞아 죽을 수도 있어. 진짜 그럴 것 같지 않아? 지금도 나 총 있으면 쏴버린다는 애들 한 트럭이야. 너도 그 중 하나잖아."





내가 뱉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엔젤이 얼핏 눈썹을 구기며 웃는 듯 우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신 : "나 너랑 있고 싶어. 제대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 정말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오늘 너한테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야."


엔젤 : "......"


고신 : "나한테,"


엔젤 : "......"


고신 : "나한테 기회를 줘. 제발."





정면에서 타들어가던 노을이 땅으로 떨어지고 거리가 어둑해지자마자 엔젤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엔젤은 운다고 하기에도, 웃는다고 하기에도 어색한 그 얼굴 그대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던 눈물이 눈가를 적시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눈물일까. 후회의 눈물일지 회한의 눈물일지, 아니면 그냥 쪽팔려서 우는 것일지. 잘 모를 것 같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지진아처럼 코를 훌쩍거리며 소매로 콧물인지 뭔지를 닦아내자 나를 따라 눈가를 손으로 문지른 엔젤이 뭔가 민망한 듯 슬리퍼가 발라당 뒤집혀져 있는 길바닥을 가리키며 저거나 신어, 하고 말했다. 목소리가 좀 전보다는 풀어진 것 같아서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한 쪽 발로 콩콩 거리며 뛰어가 슬리퍼를 발에 꿰었다. 



다른 이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엔젤의 앞에 섰다. 그 다음엔 별 말이 없었고, 우리는 학원 건물 쪽을 등지고 서서 한참 가만히 마주볼 뿐이었다. 우리 둘 사이에 익숙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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