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게 2억? 내가 발로 그려도 저거보단 잘 그릴 듯.
도대체 뭘 그린 건지 짐작조차 어려운 난해한 그림은 아르테미스의 표현대로 누가 작정하고 캔버스 위에 아무 물감이나 막 처바른 것 같이 엉망으로 보이긴 했다. 그림을 2억이 넘는 돈에 낙찰해간 익명 사업가의 대리인들은 결혼식 사회자나 낄 법한 흰 면포의 장갑을 낀 채 조십조심 그 그림을 운반해갔다.
경품 사회자의 설명으로는 작가가 두 달 동안 스페인에서 체류하며 두달이나 창작의 고통의 몸서리 끝에 탄생한 그림이라고 했는데 암만 봐도 두 달 고심해서 그려낸 그림 같진 않단 말이다.
추상의 세계가 심오한 게 아니라 진짜 그냥 보는 눈이 길러지지 않아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며 시작한 이 짓은 늘 저딴 그림이 어째서? 라는 막말과 현타로 마무리가 된다.
엔젤은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자며 옆구리를 찔러대는 아르테미스의 채근에 못 이겨 한 장의 작품 경매를 더 남겨두고 경매장을 빠져나와 버렸다.
그러나 고신의 주 종목도 알듯 말듯 설명하는 이의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될 수 있는 그 추상화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한 번 이렇게 가슴에 새기고. 눈은 열심히 평창동 서울옥션 스페이스 근처의 맛집을 찾아 긁어냈다.
아르테미스 : "진짜 사기네. 넌 돈이 썩어 남아도니?"
그래도 산다고 줄을 섰드만 뭐. 엔젤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스푼으로 밍밍한 크림맛의 버섯리조또를 깨작거렸다.
아르테미스야 그럴 듯한 취미 갖고 있는 드래곤인 척 인스타에 올릴 사진 몇 장 건진 걸로 그럭저럭 만족해 하지만, 엔젤에겐 남는 게 없다. 이러고 돌아다니는 걸 자존심 상하게 고신이 알게 하고 싶지도 않다.
이 리조또야 말로 개 사기인 것 같은데. 평이랑 왜 이렇게 달라?
엔젤이 입 안의 까끌한 밥알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꼭 그림을 보고 나면 현타가 와서 좋던 기분도 잡쳐버리게 만들고 만다. 근데 꾸역꾸역 힘들게 작품전 예매해서 오는 이유를 스스로도 모르겠다 이 말이다. 이쯤 봤으면 안목 없는 것과 좋게 봐줄 만큼 마음이 넓디지도 않다는 걸 깨달아야 했는데.
나중에 에이전시 차리기만 해 봐. 너랑은 계약 안 해. 너 이 바닥에서 아예 도태 시켜 버릴 거야. 등등 갖은 막말을 고신의 뒷통수에 던져놓고 정작 고신의 그림은 점차 인정받고 있는데 엔젤은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다.
부모님이 에이전시 차려준다고 한 것도 아니야. 그 쪽에 인맥도 없어. 작품 보는 눈도 없어. 그렇다고 대학 전공을 그런 예술 계통으로 한 것도 아니야. 개뿔. 그냥 부모 잘 만나서 취준 걱정 안하는 휴학 복학 밥 먹듯 하는 대학생 1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시무룩한 기분 속에서도 꼬박 꼬박 아르테미스가 사진을 찍어댈 때 마다 엔젤은 입가에 힘을 주고 예쁜 척을 했다.
엔젤 : "이 길이 아닌가 봐."
아르테미스 : "맞아. 그 길은 아니다."
엔젤 : "엄마가 꿈도 꾸지 말래."
아르테미스 : "그래. 엄마가 말씀 잘 하셨다. 우리 다녀봐서 알잖아. 존나 예술 혐오만 풀충전하고 뭐 봐도 모르겠고."
엔젤 : ".....고신이 얄미워서 그러지, 내가."
4년 사귀는 동안 엔젤이 진상짓해서 차이고도 남을 잘못은 엄청 많이 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엔젤은 매순간 억울했다. 고신이 받아들이든 말든 엔젤은 아득바득 제 눈이 시뻘겋게 돼서 제 할 말만 다 하고 작업실 박차고 나와 버리기 일쑤였다.
헤어지지 못하는 건 아직 준비가 덜 돼서일 뿐이라고. 고신이 좋아서, 아직도 너무 많이 좋아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거다. 너무 좋아하는 건 뭐 반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고신 : [엔젤, 우리 얘기 좀 해]
하, 빌어먹을. 누가 리모컨으로 조절이라도 하나, 엔젤은 뭐에 홀린 용처럼 폰 붙잡고 일어섰다. 야, 너. 아르테미스가 미간을 확 구기며 엔젤을 올려다본다. 고신? 엔젤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건데. 도대체 왜. 머리는 그냥 앉으라고 난리가 났는데 몸은 무슨 최면에 홀린 이처럼 일어나서 나설 준비를 한다. 빠르다 빨라. 카톡 하나에 또 쪼르르 가는 것 좀 봐. 그럴 거면 성질을 좀 죽이던가. 아르테미스가 미간을 확 좁히며 말하는데 엔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봐야 될 거 아니야. 언니. 나 택시 좀 불러줘.
니가 불러 이년아.
실랑이를 좀 하다 그냥 엔젤이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아르테미스는 망부석처럼 앉아있을 뿐이었다. 입모양으로 내가 계산했어. 하고 말하니 지그시 중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곤 폰 화면에 코 박고 스푼을 열심히 놀린다.
가끔 엔젤은 생각한다.
아르테미스의 반의 반이라도 닮았더라면 마음이 좀 덜 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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