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칭 예술가들. 타투하고 힙합하고 밴드하는 애들은 만난 적 있지만 미술하는 애는 처음이었다. 예술병 걸린 애들. 좀 놀다가 차면 무슨 예술혼에 상처 받은 용처럼 처연하게 지 생채기 인스타에 막 다른 이들 보라고 전시하고 거기 푹 빠져서 엔젤을 소재로 뭐라도 만들어 내고. 혹시 고신도 그럴까.
엔젤은 그런 마음에 사귀지도 않으면서 일주일 내내 고신을 만나다 돌아오는 8일 째 되던 날 우발적으로 잠수를 탔다. 사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만날수록 자꾸 진심이 되어가는 마음이 괜히 좀 쫄렸다. 거기에 고신이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고. 근데 그 생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고신은 인스타 같은 SNS 계정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볼 수 있는 건 프사나 상메 정도였다. 근데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그 하늘색 기본으로 내내 고정되어 있고 그 옆의 상메도 비워둔 그대로였다. 오히려 상처 그 비슷한 걸 받은 쪽은 엔젤 자신인 것 같았다. 7일을 만나도 7년 만난 구남친 처럼 구는 애들이 예술 하는 애들이었는데.
엔젤은 연락 없는 폰을 쳐다보다 성질이 나는 마음에 아무나 막 꼬시고 다녔다. 용 꼬시는 거야, 정말 엔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홀랑 마음 다 넘겨받고 팽개치는 것도 쉽고. 그럴 수록 자꾸 생각이 났다. 그 미대생 고신. 마음이 없었던 건가. 마지막 날 손까지 잡아 놓고 그냥 그럭저럭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여겼던 건 아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그림 이야기를 할 때 진짜 모르는 데도 재미없고 관심도 없으면서 귀담아 듣는 척 고신의 반응을 살피면서 전전긍긍했던 게 그저 혼자만의 일이었던 건지.
상처는 누가 받고 있는 거야. 엔젤은 고신의 번호를 지워버리면서 결국 차단은 망설였다. 그냥 번호를 날려 놓고 엔젤은 미친 애처럼 놀러 다녔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 눅눅한 코튼 크림 향기는 잊혀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끔한 건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어서 엔젤이 대충 궁예한 건데 고신이라면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눅눅한 코튼 크림 샤프란 향기를 풍기는 그림쟁이 너드. 길을 걷다가 엔젤은 문득 무채색의 오버핏 남방을 걸친 남자를 스치기라도 하면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곤 했다. 그러다가 미친 애처럼 전화번호를 따기도 하고 실제로 연락을 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고. 대부분 시시한 순서대로 양다리 삼다리 오다리 걸치다 끝내는 걸 반복하고.
그러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고신이 먼저 엔젤에게 연락을 했다. 엔젤, 너 그렸는데 보러 올래? 지나간 용은 싸버린 똥과 다름이 없다고, 절대로 스쳤던 용과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나름의 철칙을 흐린 눈 하고 귀 막고 엔젤은 고신의 작업실로 갔다.
급하게 나온 듯 얼굴에 묻은 물감은 닦지도 않고 나온 게 귀여웠다. 그 날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기엔 전혀 닮지 않은 그림을 보는데 도저히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여워서.
그 날 고신의 그 코튼 크림 향기가 가득한 방에서 맥주를 마셨다. 엔젤이 좋아하는 안주도 없이 맥주를 들이키면서 고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엔젤 : "뭐 하고 지냈어?"
고신 : "그냥 그림 그리고 지냈어. 그러다가 내가 뭘 그렸는데, 그게 너인 거야. 진짜 하나도 안 닮았는데."
고신이 웃으면서 무안한 듯 중얼거렸다. 그 어두침침한 방에서 엔젤은 고신의 웃는 얼굴만 닳도록 바라봤다. 미쳤네, 나 이런 적 한번도 없었는데. 고신이 느릿하고 또박또박하게 뭔가를 말하는데 그 내용 같은 게 들리지 않았다. 음악 하는 애들 타투 하는 애들 시 쓰는 애들 대부분이 시기를 잘못 탄 비운의 예술가인 척 술 처먹고 헛소리 찍찍하는 게 진짜 기본 루트였는데. 고신은 술을 먹어도 얼굴만 좀 붉어질 뿐 반듯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가끔 무릎을 세우고 자신이 마치 화방인 듯 착각하게 만드는, 방에 굴러다니는 미술 재료들. 여러 종류의 붓과 연필, 물감들을 한 번 바라보다 엔젤을 지그시 보곤 했다. 그 뽀송뽀송하고 말랑말랑한 얼굴에선 눅눅한 코튼 크림 향기가 났고 조금 더 가까이 가니 고신에게선 물감 특유의 매트하고 퀴퀴한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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