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기다려도 고신은 그림만 그리고 있고,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등이 모가 났다. 한 시간 째 별 말 없이 얼굴만 내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또 괜히 빡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대리석 바닥 몇 번 찍 찍 스키드 마크 나는 듯 시끄럽게 슬리퍼가 긁히는 소리가 났는데도 고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건성으로 대답할 거 알아서 엔젤은 고신을 부르지도 않았다. 엔젤은 그 잘나신 에이전시 사장이 사다 바친 캡슐 커피 머신기 앞에 서서 괜히 피슉 위웅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잔 연속 커피만 내렸다. 또 그렇게 간접적으로 시끄럽게 신호를 주는데도 고신은 반응이 없었다.
캡슐 커피는 싫어. 배민으로 디저트랑 커피 시킬까? 하고 혼잣말 아닌 혼잣말 하는데 고신은 대충 성의 없이 돌아보며 어어, 하고 대답한다. 한껏 오르는 짜증 억누르며 나 배고픈데. 또박또박 중얼거리자 파스타 먹고 온 거 아니야? 그건 좀 신경 써서 대답하는 것 같았는데, 이미 엔젤의 기분이 좀 많이 상해버린 뒤였다.
엔젤 : "내가 좀 전에 그 기분으로 무슨 파스타를 먹냐고 그랬잖아."
고신 : "아... 맞다. 그럼 뭐 좀 먹을까?"
고신이 앞치마를 벗고 이젤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폰으로 급하게 배민 어플을 누르는 것 같은데. 엔젤은 대뜸 싫어, 안 먹어.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3잔 연이어 내린 커피를 싱크대로 다 쏟아 부었다. 아 갑자기 왜 이런 짓까지 꼬이게 보일까.
아메리카노 써서 못 먹는 초딩 입맛 고신이 웬 아메리카노야. 예민해지기 시작하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서 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약간 눈치를 보는 듯 고신이 어정쩡하게 벗은 앞치마와 폰을 동시에 쥐고 서있는 것이 보인다. 어... 뭐시키지? 천천히 다가온다.
엔젤 : "너 진짜 변했어."
고신 : "아... 또 시작이다, 너."
엔젤 : "몰라. 자꾸 화가 나는 걸 어떡하라고."
고신 : "내가 뭘 어쨌는데 자꾸 그래."
엔젤은 또 못 참고 다 뱉어버릴 그 말을 잠시나마 참아냈다.
고신 : "너 이럴 때마다 왜 그런지 몰라서 답답해."
엔젤 : "이거 봐. 이런 거 보면 너 변한 거 맞아. 옛날엔 안 그랬어."
입 밖으로 또 진짜 슬슬 고신이 싫어한느 말이 연이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돌린 등이 밉다. 맨날 봤던 그 뒷모습. 그 모난 등. 다시 엔젤을 바라보는 고신이 진짜 지쳤다는 듯 머리를 막 흔들었다. 별안간 니가 화내는 것을 정말 이해 못하겠다는 거다. 이렇게 지친 표정을 지어보일 때 마다 더 빡치는 건 알까.
너 진짜 변했다고. 콧소리 빼고 낮게 또박 또박 말하니 사태가 더 꼬여가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잠깐 그러다 아무 말도 안하는 건 엔젤이 곧 터져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엔젤.
이번엔 진지하게 불렀다.
내가 뭐 잘못했어? 말해줘. 잘못한 게 있으면.
생각해보면 고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혼자 기다리고 혼자 서운하다가 발작버튼 눌려버린 건데. 혼자 또 이런다고 생각하니 괜히 또 빡쳐서 엔젤은 제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는 고신의 손을 무안해질 정도로 확 뿌리쳤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결국 엔젤은 또 참지 않았다.
엔젤 : "너는 나 대체 뭐 때문에 만나. 사랑하지도 않잖아. 아니야? 너 그냥 내가 만만하니까 이러는 거지?"
고신 : ".....야..."
고신이 제일 극혐하는 말들. 솔직히 저 말들은 웃긴다고 생각했다. 여태 참았던 것만 봐도 그럴 리가 없는데. 슬슬 붉어지는 얼굴이 진짜 한 번만 더 나가면 나도 참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지독한 패던인 것이다. 그러나 엔젤은 계속 고신을 긁었다.
엔젤 : "그냥 너한테는 니 작품 영감 조금 받겠다고 덜렁 옆에 끼고 다니는 키링 하나 아니야, 내가? 어차피 사랑하지도 않는 거 눈에 뻔히 보이는데 내가 알게 뭐냐고."
고신 : "말 진짜 나쁘게 한다, 또."
엔젤 : "진짜 변했어."
고신이 빡치든 상처받든 엔젤은 그 순간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되는대로 말을 던지고 폭주하는 거다. 그렇게 별안간 엔젤이 성질을 내고 문을 열고 나서버렸다. 그 커다랗고 좋은 현관문이 이상하게 짜증이 났고 번쩍 번쩍 대리석 계단 또한 빡치게 만들었다.
갑작스런 고신의 신분상승이 고까워서 일까, 아니면 그냥 자신을 내버려둔 채 예술하고 있는 고신이 미워서일까. 답이 없다.
쫓아 나와 팔을 붙잡고 당기는 걸 계속 뿌리쳤다.
고신 : "너 진짜 이럴래?"
엔젤 : "내가 뭘 어쨌는데."
고신 : "아니다. 미안. 너 냅두고 또 그림 그려서."
고신은 일단 좀 참는 편이고 엔젤은 되는대로 말해버리고 마는 편이다. 엔젤은 자신이 지금 괜히 이런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진짜 에이전시만 차려 봐. 엔젤은 속으로 또 시작이다 싶었다. 입이 제멋대로 저주를 퍼붓듯 개소리를 나불대고 있다.
너 같은 그림쟁이 나부랭이 차버리고 이 바닥에서 매장시킨 다니까. 진짜 뭐 같은 별별 개소리. 그 개소리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구상하는 것도 좀 별로인데, 빌어먹게도 홍대병을 치유한다 한들 지랄병은 안 낫나보다.
그리고 엔젤은 하던 대로 아르테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아직 근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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