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우, 진짜 지긋지긋하다. 스트레스 받아."
아르테미스는 옆에 앉은 데빌의 손을 계속 주물럭대면서 신경질을 냈다. 그러면서 엔젤이 언제라도 그림 보러가자고 하면 툴툴 대면서도 따라 나설 것이다. 나중에 에이전시 하면 나 뭐 직함이라도 좀 주던가. 그렇게 말하는 아르테미스의 집도 나름 빵빵했다. 졸업 전에 취업 걱정하지 않고 저렇게 생각 없이 놀 수 있는 건 부모가 잘 살아서다. 부모가 중산층 이상은 되어야 개차반같이 막 살아도 허우대는 번듯하게 멀쩡한 건가보다.
남들한테 사귀냐고 오해 받을 정도로 죽도 못 살게 붙어 다녀서 정신 줄 놓고 노는 방식도 깃털 같이 가볍던 연애관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정착해버린 것도 다 비슷했었는데 다른 건 타고난 성격이었다. 아르테미스는 잔잔한 호수 같은 성격이다. 누가 돌을 던져도 잔잔하게 그걸 받아내지, 엔젤처럼 울컥 성질을 내지 앟는다. 까발리면 펑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겉 보기엔 잔잔했다.
가리지 않고 남들 엿 먹이면서 놀 때도, 이렇게 한 용에게 정착한 듯 살아도 극과 극인 상황에서 스트레스 하나도 안 받는다. 저렇게 평온한 성격이어야 길게 만나든 정착하든 막 살든 스트레스 안 받는 구나. 정작 옆에 있는 애는 애 타 죽는 거 같은데? 데빌은 계속 저게 뭔가 싶은 얼굴로 엔젤을 쳐다봤다. 뚱한 것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 정작 아르테미스를 쳐다 볼 땐 그런 눈치를 주진 않았다. 그걸 귀신같은 아르테미스가 모를 리 없다. 엔젤이나 아르테미스나 둘 다 눈치는 진짜 빨랐다.
데빌은 엔젤을 괜히 고깝게 보는 것 같고. 때문에 아르테미스야 속으로 귀여워 하고 끝이겠지만 엔젤은 불편했다. 아, 쟤 좀 떼고 오지.
아르테미스 : "데빌, 친구 부를까? 같이 놀래?"
역시나 그런 데빌이 귀엽다는 듯 이번엔 볼따구를 주물럭대며 말한다. 엔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데빌의 인스타는 이미 다 탐색하고 친구 목록까지 싹 다 훑었다. 엔젤의 스타일도 없고, 그게 아니라 솔직히 고신 만나고부터 눈에 차는 용이 없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나 막 만나고 다녔나 싶을 정도로.
엔젤 : "나 키 작은 애 싫은데."
데빌 : "야... 내 친구 다 키 안 작거든."
엔젤 : "고만고만 하겠지."
데빌 : "니 키 크다고 유세가."
아 뭐 대충 아무나 불러. 누가 뭐 여자친구 해준대? 그냥 놀아. 너 기분 더러울 땐 맨날 그렇게 놀잖아. 반응이 웃긴지 아르테미스가 말하면서 실실 웃는다. 데빌은 발끈해서 성질내고 있고. 엔젤은 통 유리창에 머리 처박고 밖만 응시했다. 전화는 한 열 번인가 연이어 오다가 받지 않아서 끊어져 버렸고 좀 전에 카톡 비행기 모드로 읽고 나서 1을 없애지도 않았다. 빡쳐서 커플 어플 삭제할까 하다가 일단 그건 뒀다.
고신이 크게 잘못한 건가. 다 핑계지 뭐. 내가 더 사랑하니까 기다리는 게 맞지. 짜증 나. 엔젤은 지친 목소리로 누구 좀 불러 봐, 하며 중얼거렸다. 니가 부르라고 하면 내 친구들 다 오는 줄 아나. 조곤조곤 성질내놓곤 옆에서 좀 불러서 같이 놀자 하는 아르테미스의 목소리에 금방 지 폰을 들어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 나 데빌즈? 걔네 정말 별로거든. 그 태그도 존나 싫어. 나도. 엔젤은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놀다 보면 아르테미스의 말처럼 일시적으로라도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 여태 고신과 싸우고 아르테미스를 불러서 막 놀 때 그런 척 했다. 어쩌면 오늘은 진짜 기분이 좋아질 지도 모르지.
잠깐 엔젤을 흘겨보던 데빌이 폰을 꾹 꾹 눌러 뭔가를 찾기 시작한다. 나름 그 부류에서 인싸라 여기저기 찔러볼 애들은 많은 모양이다. 내미는 사진마다 감흥 없이 엔젤은 족족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진짜 눈 드럽게 높네. 그냥 아무나 부른다? 어? 거기에 또 싫다고 했다간 쫓겨날 거 같고. 엔젤은 힘 없이 고개를 또 끄덕였다.
섞어 먹는 거 진짜 별로. 엔젤은 아르테미스가 거지같은 비율로 섞어준 폭탄주 먹고 서서히 골로 가기 시작했다. 데빌의 호출에 등장한 데빌의 친구들이랑 몇 마디 주고 받다가 흥미 잃고 옆 테이블에서 찾아와 괜히 기웃거리는 애한테 끼부리기 시작한 시점이 거기부터다.
눈이 한 세 번 마주쳤나. 바로 반응이 왔다. 별 말도 안 했는데 완전 홀랑 다 넘어와서는, 엔젤이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옆 테이블 애가 대뜸 말을 걸었다. 저기요, 하고. 엔젤이 꼬여가는 혀로 대충 대꾸 하는데도 잘만 넘어간다. 좀 취하고 화가 난 상태라 또 마음과 달리 말이 막 나간다. 엔젤의 겉가죽에 홀랑 홀려 넘어간 샐 수도 없는 그 불쌍한 용들은 고신 때문에 빡쳤을 때 더 잘 꼬셔졌다. 엔젤은 이미 감흥 다 떨어졌지만 오기로 그 테이블에 잠깐 합류했다.
스무 살? 헐.. 나 연하는 별로거든요. 넘어오는 반응은 연상, 무조건 연상. 아마 갓 스물이라도 엔젤을 보면 자기가 연상이라고, 낼 모레 서른이라고 개소리를 떨었을 것이다. 여긴 다 그러고 노는 데다. 그냥 흥청망청 술 마시고 아무한테나 끼부리고 플러팅 넣고 그러다가 마음 맞으면 연락처 주고받고.
무튼 옆 테이블에서 마시던 다른 종류 양주 몇 잔 더 받아먹다가 아르테미스의 손에 붙들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질질 끌려 왔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토할 거 같은데 아르테미스는 야, 작작해. 너 폰번호 수집 관리 공단에서 왔냐. 전번 왤케 따고 다녀, 미친. 엔젤은 또 실실 웃으며 옆에 앉은 데빌의 친구 중 한명의 어깨에 무작정 기댔다. 아, 키가 작아서 기대는 것도 힘들어. 우는 소리 하며.
엔젤은 센치하게 폰 집어 들었다가 괜히 테이블 건너 아르테미스가 있는 소파로 던졌다. 암튼 성깔은, 무슨 실연당한 여자 얼굴 하고 진상직 하고 있는데. 아르테미스가 맞은편에서 데빌의 손을 주물럭대다 말고는 인상 쓰고 엔젤의 뒤를, 정확히는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올려다 봤다. 표정이 심각해서 엔젤은 옆에 앉은 용의 어깨에서 머리를 뗐다.
아르테미스 : "아... 이런...."
아르테미스가 중얼거리며 데빌의 손을 놓고 어색하게 웃으며 흔들었다.
아르테미스 : "어.. 저기... 너 일단 좀 앉을래?"
아르테미스가 좀 많이 당황한 것 같고 엔젤은 천천히 고개만 돌렸다. 좀 열 받은 얼굴로 서 있는 고신의 얼굴에 물감이 묻어 있다. 그게 아이러니 하다. 그렇게 뛰쳐나갔는데, 연락도 안 되는데 그림 그릴 정신은 있었다고? 엔젤은 또 삐뚤어진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끌려갔다. 몇 번 중간 중간 놔, 놔! 하고 성질은 냈지만 술을 많이 먹어서 토 할 것 같았고 악 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 술집에서 진상 리스트에 들어서 블락 당하고 싶지 않다.
엔젤은 하는 수 없이 고신의 차 조수석에 연행 되듯 올라탔다. 여전히 차 뒷유리에 초보운전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지만, 그거 붙인 것 치곤 고신은 거칠다싶게 차를 몰았다. 방지턱에도 속력 안 줄이고 막 나가서 창문에 머리 기대고 있다가 괜히 콩 하고 찍혔다. 공기 답답해서 창문 열려는 것도 고신이 못하게 잠가놔서 버튼만 신경질적으로 꾹 꾹 눌러보다가 잠자코 머리 기댄 채로 괜히 눈만 감았다.
어차피 길은 훤했다. 굳이 그게 보기 싫어서 눈을 감은 거였는데 친절하게 도착 직전까지 시끄럽던 네비 때문에 다른 생각도 못했다. 내리라고 하기에 엔젤은 순순히 내렸다.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안 되는 건데 원래. 청담동 길바닥에서 진상짓 하다가 페북 같은 곳에 박제되고 싶진 않아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건 핑계고, 고신이 다른 때 보다 약간 더 격양 된 것 같아보여 그냥 한 번 꺾어 준 것 뿐이다. 이러다가 또 생각할 시간 갖자고 하면 불 같이 화낼 거지만.
팔과 어깨를 붙잡고 질질 끌고 가는데, 기분이 무슨 짐짝 된 것 같아 썩 좋지 않았고, 자꾸 취기가 올라서 그 성질 참아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 혀가 왜 이렇게 꼬이고 정신이 흐려지는 건지. 이래서 술 거지같이 안 섞어 마시는 건데. 딱 맞춰 알림음이 연이어 세 번 울리고. 현관문 열자마자 고신은 엔젤의 몸부터 작업실 안쪽으로 밀어 넣더니 갑자기 정색한다.
고신 : "누군데, 이 시간에."
궁금하긴 한가보네. 누구긴 누구야. 엔젤은 그런 고신 흘겨보며 아르테미스지, 하고 말끝을 흐렸다. 진짜 촉이 아르테미스가 아닌 거 같다. 폰 줘 봐. 엔젤의 촉은 항상 맞는 편이다. 이거 진짜 아르테미스 아니다. 엔젤이 싫다고 폰 꼭 쥐고 등 뒤로 감췄다. 아르테미스라니까.
근데 고신의 촉도 아르테미스의 연락이 아닌 모양이다. 물감 묻은 얼굴이 딱딱하다. 고신 저렇게 정색하면 무서운데.
고신 : "내가 한 번 볼게. 아르테미스씨 맞나, 아닌가."
왜 이래 오늘 따라. 엔젤은 꽤 당황스럽다. 이럴 땐 이상하게 성질도 안나. 엔젤은 취한 척 쪼르르 소파로 달려가 앉자마자 등받이에 머리 푹 기대고 신발도 안 벗고 소파 위에 다리 올렸다. 잠깐 현관 앞에 멈춰 있던 고신이 성큼성큼 엔젤이 앉은 소파 앞 테이블에 엉덩이 깔고 앉는다. 그리고 빚 받으러 온 조폭처럼 손만 내민다. 줘 보라고. 엔젤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폰 검사하고 이런 거 제일 싫어해. 그래놓고 엔젤은 틈만 나면 고신 폰 가져다가 이것저것 눌러봤었다.
가난한 미대생에서 탈출해서 어엿한 미술 작가가 된 고신의 쌓여가는 인맥. 그림 사겠다는 이들의 연락들, 에이전시 계정으로 오는 고신 그림 좋아하는 돈 많은 팬들의 다이렉트 메시지. 에이전시 직원, 사장. 따분하게 주고받은 대화 내용, 별 거 없는 거 알면서 눈알 빠져라 카톡 다 읽어 놓고 고신이 폰 가져가서 뭐하냐고 물으면 하지도 않는 게임 했다고 하거나 폰 기종이 다르니 기능도 뭐 다른 게 있는지 궁금해서 그랬다고 뻥을 쳤다.
근데 반대로 고신이 엔젤의 폰을 들고 가서 뒤져본 적은 없기에 엔젤은 이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다. 고신처럼 따분하게 주고받은 대화만 있는 건 아니라서 절대로 폰을 넘겨주면 안 되는 거였다. 가만 보자. 잠깐 헤어진 사이에 만났던 애들, 어떻게 정리 했더라. 취하니까 두뇌회전 속도가 막 떨어진 모양이다. 에라 모르겠다. 엔젤은 아예 드러누웠다. 배 째. 몰라.
고신 : "너 거기서 또 번호 주고 다녔지. 줘 봐. 한 번 보게."
고신은 좀 어설프다. 이런 면에서 특히 많이. 그렇게 뒤지고 싶으면 잘 때 몰래 가져가든가. 엔젤은 싫다고 더 뻐겼다. 좀 징징대고 그러다가 풀리면 애교도 좀 부리고, 엔젤의 감성은 아직도 그 홍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나보다. 여전히 구리고 좀 별로다. 이렇게 취해서 위태롭게 누워있는 걸 보면.
돈 받아 갈 드래곤 마냥 손을 내밀고 있더니 그 손을 얌전히 말아 쥐고는 허리를 숙여 누운 엔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조명 하나만 내려 놔도 그 번쩍거리는 대리석에 반사 돼서 괜히 물가에 무슨 등 비치는 것 마냥 분위기가 오묘해서, 뺏어갈까 싶어서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힘 줘 폰을 쥐어놓고 분위기에 취해 엔젤은 감상하듯 고신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생긴 게 제일 문제야. 그러니까 아직 이렇게 좋은 거지. 억울하다. 진짜 바본가. 근데 이렇게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성질댔나가 다시 풀렸다가. 마음이 공허하다. 손바닥만큼 작은 방들이 여러 개 가슴에 있는 줄 알았더니 태평양 같은 방 하나만 품고 있었나 보다. 욕심이 많아서 고신이 보여주는 사랑으로는 늘 부족하다. 그래서 자꾸 고신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고, 그러면서 사랑을 확인하는 이상한 짓 하나 보다.
가만히 있으니까 머리가 더 어지럽고 감정이 막 올라온다. 고신과의 연애에선 늘 약자가 되는 기분. 엔젤은 울컥해서 이번엔 또 가까이에 있는 고시의 어깨를 밀쳤다. 또 울고 싶고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고 성질내고 싶어진다. 벌써 조기 갱년기 찾아온 건가. 어쩌면 내일쯤 정신과 상담을 받아봐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엔젤은 상처 받은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유진을 그대로 앉혀놓고 등받이로 아예 돌아눕고 웅얼거렸다.
엔젤 : "너 너무 미워. 다 짜증나."
고신 :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맨날."
폰 달라고 정색할 땐 언제고. 엔젤이 돌아누운 방향 그대로 똑같이 고신이 따라 누우면서 엔젤의 등을 감싼다. 이거 뭔지 알거든. 엔젤은 또 울컥해서 괜히 소파에 얼굴 처박고 훌쩍거렸다. 딱 거기까지잖아, 너는. 나 같으면 폰 뺏어서 누구랑 연락하냐고 그년 머리끄댕이 잡을 듯이 지랄했을텐데. 너는 궁금하다가도 내가 안 주면 말잖아. 그만큼 궁금한 게 아니잖아. 내가 딴 애 만나도, 밖에서 그렇게 놀고 다녀도 미칠 것 같진 않잖아.
그걸 다 쏟아내진 않고 괜히 코로 몇 번 훌쩍거렸다. 엔젤은 슬쩍 눈가 닦아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진짜 폰 안줘도 된다고? 목 빼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는 고신의 등 뒤에 대고 소리 질렀다. 아르테미스, 그 애가 맞겠지. 뭐. 물통 꺼내면서 말하는 고신의 목소리에 또 성의가 없다 싶다. 아닌데. 아르테미스 아닌데. 엔젤은 꼭 쥔 폰 얼굴 인식 시키자마자 카톡부터 들어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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