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젤은 타인을 좀 빡치게 하는 편이었고, 아르테미스는 타인을 좀 어이없게 하는 편이었다. 또 두 드래곤에게 공통적으로 추가된 사항이 있다면 그건 타인을 잘 울린다는 것이었다. 엔젤은 예술병 걸린 애들이 자기 때문에 우는 걸 많이 봤다. 뭐 뮤즈 그런 거 원하지도 않았는데 엔젤을 뮤즈 삼고 지들 예술 안에 엔젤을 밀어 넣고 결과물을 막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인스타에서 시팔이 하던 애는 하루에 수십개씩 이별에 관한 시를 업데이트 하며 누가 봐도 차인 용이라느 티를 팍 팍 내곤 했다. 암튼 뭐 그런 거.
엔젤은 그런 게 익숙했다. 어쩌면 즐겼을 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차지도 않고 어쩌면 아예 마음에 들지도 않는 용 만나면서 사랑 받고 그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뭔가가 된 뒤에 상처 주고 떠나버리는 거. 그런 가벼운 연애에서 엔젤만 상처 받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애초에 마음 같은 거 준 적 없기 때문에.
그래서 고신도 그렇게 되길 바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심오한 예술 세계에 엔젤을 가두고 지독하게 앓기를. 어디 뮤비에서 봤던 것처럼 그림 잘 그리고 있다가 미친년처럼 울면서 캔버스에 물감 막 집어 던지고 붓 집어 던지고 이젤 엎어 버리고 엉엉 우는 그런 거.
근데 그런 일 같은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걸 아니까, 엔젤 혼자서 증오심에 불타서 싫어하는 막말 던져놓고 되려 자기가 더 상처받아서 밖에 나가서 고신이 싫어하는 짓만 또 골라서 하는 거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게 이렇게 괴롭고 빡치는 기분인지 몰랐다. 그렇게 고신은 별 거 없이 엔젤을 꽤 많이 빡치게 했고, 울렸다. 정말 별 거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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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드문드문 토막이 나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중간 중간 끊어진 기억 속 흑역사가 엔젤을 덮쳐 온다. 고신에게 얌전히 안겨 있던 엔젤이 또 급작스럽게 성질이 나서 고신에게 맥주를 사오라고 징징 댔다. 술 종류 잘 모르는 고신이 대충 사온 수입 맥주 네 캔 깡으로 연이어 들이 킨 다음에 정신 놓고 뻗었다. 딱 거기까지 끊어져 버린 기억이 다시 이어진 건 질질 짜면서 고신의 어깨를 붙잡고 짤짤 댔던 장면이다.
너 나 사랑해? 너 진짜 나 사랑하는 거 맞아?
고신에게 히스테리 부리면서 울었다. 사랑한다고 너만 사랑한다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도 마음에 안 들어서 어깨 더 세차게 흔들다가 성에 안 차서 주먹으로 어깨를 내리치기까지 했다. 고신이 그런 엔젤을 달래려 몸을 움직이려고 했을 때 못 움직이게 압박하다가 품에 안겼다. 그러다가 또 뚝 끊긴 기억은 이불 붙들고 엉엉 서럽게 우는 장면이었다.
퉁퉁 부어버린 눈은 이젠 덜 쪽팔린데 그런 진상짓하는 건 좀 쪽팔려. 정신 차리기를 포기한 채로 이불로 몸을 돌돌 감은 채 일어섰다. 어느새 또 이젤 앞에 앉아있는 고신이 인기척 느끼고 홱 고개를 돌린다.
엔젤 : "그림 다 끝이라며."
쪽팔렸지만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로봇청소기도 아니고 다른 거 안하면 맨날 거기 이젤 앞에 가서 꽂혀 있는지. 진짜 거기 고신 충전기라도 있는 거야? 고신은 이불 둘둘 말고 질질 끌고 온 엔젤을 위아래로 잠시 쳐다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엔젤을 도로 침대로 앉혔다.
엔젤 : "그냥 여기 있을래. 니가 앉힐 때 마다 어차피 그냥 일어날 거야."
고신 : "곧 사장님 오신대. 그림 보러. 아마 다른 직원들도 올 거야."
엔젤 : "아........ 그 놈의 에이전시."
짬뽕으로 해장할지 피자로 해장할지 고민했는데, 둘 다 안 되겠다. 엔젤은 괜히 틱틱대고 싶은 거 꾹 참고 소파에 앉긴 했다. 일 끝나면 우리 아침밥 먹으러 가자. 이 근처에 브런치 전문점 생겼대.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시계를 보니 아침도 점심도 좀 애매한 시간이긴 하다. 엔젤은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이곤 무릎 감싸 안고 현관문 쳐다보다가 고신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고신은 자신이 그려둔 그림들을 차곡차곡 이젤 위에 얹기 시작했다. 살짝 봐도 뭔가 난해하다. 도대체 뭘 그린 거래. 고신이 돌아보기 전에 얼른 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 11퍼 남은 폰 화면 쳐다보는 척 했다. 봐도 모르겠는 그림 해맑게 이건 뭐 그린 거야? 하는 짓거리는 이미 연애 초반에 다 뗐다.
핸드폰 카메라로 얼굴 꼴을 보니 가관이긴 했다. 누가 봐도 오열하다 잠든 거 같은데. 건조한 눈에 또 괜히 힘만 주니 눈만 더 빨갛게 된다. 다 포기하고 엔젤은 스르륵 팔걸이에 기대 누웠다.
그림 다 전시한 고신이 캡슐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엔젤은 어느새 8퍼센트로 떨어진 폰 쳐다보며 읽지 않은 알림들을 다 지워냈다. 고신은 어제 일에 대해선 그냥 묻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 적 한 두번인 게 아니라 그냥 넘어가는 거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엔젤을 괜히 서운하게 한다.
화가 나지도 않나. 아니, 궁금하지도 않나. 엔젤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고신에게 다가섰다. 넥 시보리 확 잡아당기니 고신이 깜짝 놀라며 돌아본다. 그러다가 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신은 태연하게 다 내린 커피를 들고 작업 테이블로 옮겨갔다. 엔젤은 자리를 옮기는 고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소파에 또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또 뚱한 얼굴로 작업실을 막 돌아다니는 고신을 괜히 흘겼다. 점점 가라앉는 기분. 어느새 에이전시 사장이란 만날 준비가 다 된 건지 그런 기류를 감지한 건지 몰라도 고신이 슬그머니 옆에 앉아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눈 엄청 부었네? 이럴 땐 정말 얄미워서 코라도 꺠물고 싶다. 이제 봤냐? 나 어제 울었잖아. 라고 생각했으면서 그런가, 엔젤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곤 눈을 문질렀다.
계속 그렇게 문지르면 더 부어. 엔젤은 또 그런가, 하면서 고신이 저지하는 대로 팔을 내렸다. 손을 둘 곳이 없어 괜히 인스타 들어갔다가 디엠 와있는 거 걸릴까 봐 엔젤은 그냥 사파리 들어가서 쇼핑하던 창을 켰다. 고신은 잠시 그렇게 엔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또 휑하니 일어나서 뭔가를 바쁘게 준비하고 엔젤은 또 천천히 기분이 상해가는 중이다.
엔젤은 또 마음이 공허하다. 마음이 커질 수록 속은 점점 좁아지나 보다. 그 엿같은 반비례의 작용 속 아트페어니 뭐니 출품할 작품 선별하는 고신의 기분이 조금 들떠갈 수록 엔젤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또 뜬금없이 화내고 싶다면 미친년이겠지. 엔젤은 스스로 막 달랬다.
심장이 막 조여드는 것 같고 기분이 자꾸 애매해진다. 밑도 끝도 없이 서운한 감정이 살살 엔젤의 기분을 긁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고신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 이렇게 선명한데. 그냥 다 가짜같고. 너한테 나는 그냥 마냥 있으나 없으나 대충 옆에 끼고 사는 여자인 것 같고. 난 그 세계에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고.
엔젤이 별안간 또 상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띠리릭. 도어락의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대로 고신의 집 비번을 누르고 들어올 수 있는 이들. 고신의 세계를 공감하고 실질적으로 고신이 필요한 이들. 에이전시 사장과 그 직원들. 고신을 등지고 소파에 앉아서 폰을 만지고 있는 엔젤이 이젠 딱히 신기하지 않다는 듯 가벼운 목례와 함께 스쳐지나간다.
고작가, 그림 죽인다. 이거 평단 애들한테 따로 부탁 안 해도 호평 받겠는데? 대표의 칭찬에 어리숙하게 웃는 고신의 웃음소리와 가벼운 스몰톡이 오간다. 그림 여기서 일단 다섯 점 사무실로 보낸 다음에 회의하자. 사모님들 고작가 그림 가격 자꾸 뛴다고 다이렉트로 구매하고 싶다고 연락 많이 와.
이제 더 이상 가난한 미대생, 그 반지하에서 눅눅한 코튼크림 향 풍기면서 엔젤을 기다리던 고신은 진짜 없나보다. 언젠가 또 열리게 될 지 모르는 개인전. 그렇게 또 오를 고신의 몸값.
지나치다 싶게 엔젤은 생각의 굴곡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냥 대학생. 아무것도 고신에게 해줄 수도, 고신을 이해할 수도 없는 딱 홍대병 걸렸던 그 감성이 멈춰있는 어린 애. 뮤즈는 커녕 고작 남길 수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존재. 엔젤은 끝도 없이 점점 더 깊은 곳 생각의 굴로 파고 들었다. 점점 걷잡을 수 없다. 진짜 정신과 상담 예약 해야 되나봐. 엔젤이 시큰거리는 눈가를 치켜뜨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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