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신 : "갑자기 뭔 결혼이냐?"
시타엘 : "갑자기라니요. 형."
시타엘이 웃으며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는 것을 남 일처럼 쳐다봤다. 고신이 마치 어미새에게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의 표정을 하고선 그것을 잡아채는 것도 역시 그런 눈길로 쳐다봤다. 그러는 동안 고신의 시선이 아주 찰나같이 짧게 엔젤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청첩장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파란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신부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쇄된 엔젤이라는 글자를 보는 고신의 눈동자가 딱 그 위치에 멈췄다.
탁, 청첩장을 내려놓으며 고신이 엔젤을 향해 눈으로 웃었다. 갑자기 그 웃음을 마주하는데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분명 체한 것은 아니었다. 테이블 밑으로 해묵은 습관대로 손을 꼼질거리던 것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욱, 하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엔젤에게 박혔다. 엔젤은 입을 틀어막은 채로 일어나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시타엘이 이어 쫓아오는 것 같았지만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여자화장실 푯말을 쳐다보고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 퉤 하고 변기에 뭔가를 뱉어냈지만 아무것도 게워내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속은 불편하고, 그럼에도 게워내지지 않는다. 엔젤은 청첩장을 들고선 눈웃음을 치며 자신을 쳐다보던 고신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다시 퉤 하고 변기 커버를 열어 침을 뱉었다.
3년 만인가, 4년 만인가, 엔젤은 고신이 언제부터 동기모임에 빠지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정확히 얼마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면서도 엔젤은 마치 저번 달에 만난 용처럼 낯설지 않은 고신의 얼굴이 당혹스러웠다. 설령 저번 달에 봤다고 해도 이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신의 오른손이 침이나 뱉고 나와 화장실 앞에 거의 주저앉듯 있는 엔젤의 왼쪽 팔을 잡아 끌었다. 그에 딸려 나가듯 순간적으로 일으켜진 탓에 취한 건 아닌데도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엔젤이 고신의 팔을 뿌리치고 날카롭게 노려보는 동안 고신은 화장실 문에 머리를 기대고 엔젤을 쳐다봤다.
어쩜 하나도 달라지 게 없을까, 여유로우면서도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이 묻어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윤곽을 드러내던 불편함에 통증마저 짙어지는 기분이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고신이 반대편으로 난 쪽문을 향해 턱짓을 했다.
고신 : "바나나 우유 먹으러 나가자. 나 그거 먹고 싶다. 엔젤."
엔젤 : "너 진짜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고신 : "용은 원래 쉽게 안 변하잖아."
장난스런 어조로 말하는 고신의 눈은 늘 그랬듯 웃는 채였다. 엔젤은 멀뚱히 그것을 보고 있다가 고신의 턱이 가리킨 쪽으로 난 쪽문을 향해 몸을 완전히 돌렸다.
밖은 쌀쌀한 온도 그대로, 사위는 처음 호프집에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전신주의에서 비롯된 노란 불빛이 닿은 고신의 뒤통수는 여전히 반질반질 빛이 났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고신이 두 걸음마다 엔젤을 돌아보았다. 그 때마다 엔젤은 자신이 고신의 그 반질반질한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딱히 눈을 둘 곳이 없어서 그걸 쳐다본 건 아니었다. 고신의 뒷모습은 엔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장면 중 하나였으니까.
바로 코 앞에 앉아서 고신은 어떠한 간격마다 얼굴이 무너져라 눈웃음을 치며 엔젤을 돌아봤었다. 엔젤, 우리 사귈래? 그 말은 엔젤의 일상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려버렸다.
고신이 그렇게 웃을 때마다 엔젤은 그 말을 하는 고신의 얼굴을 떠올려야 했다. 비겁하게도 엔젤은 가슴 안에서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과는 전혀 무관한 용의 얼굴을 하고 앞에 앉아 돌아보는 고신을 쌀쌀맞게 쳐다봤다.
너는 돈 주고 학교 다니는 거 아깝지 않아? 아 맞다. 넌 돈 많지? 아무렇지 않은 척 속삭이며. 그리고 다시 고신이 고개를 돌리면 엔젤은 그 반질반질 윤이 나는 뒤통수를 응시했다.
고신 : "니가 시타엘이랑 결혼 할 줄은 몰랐지. 왜 하필 걔냐? 너 주변에 남자 그렇게 없어?"
엔젤 : "그럼 누구랑 할 줄 알았는데."
고신 : "여기 있다."
말하며 고신이 진열대에서 바나나 우유 두 개를 꺼내들었다. 너도 마실 거지? 물음에 고개를 저었건만 고신은 진열대로 나머지 하나를 도로 가져다 놓지 않고 두 개를 계산하더니 프라다 코트 주머니에 어울리지 않게 노란 바나나 우유를 하나 집어넣었다. 빨대를 쭉쭉 빠는 고신의 얼굴은 놀랍도록 10년 전과 똑같았다.
고신 : "너가 누구랑 결혼 하는지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나는."
바닥을 다 드러낸 우유에서 요란한 소리가 날 때 쯤 고신이 빨대에서 입술을 떼어낸 채 중얼거렸다. 엔젤은 다시 어지러움이 느껴져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엔젤 : "사실 오늘 너 안 올 줄 알았어."
고신 : "나도 내가 여기 올 거라고 생각 못했어."
엔젤 : "그래... 와줘서 고마워. 고맙다고 말해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비슷한 말이 생각이 안 나. 그냥 고마워. 청첩장 직접 못 줬으면 시타엘이 좀 속상해 했을 거야. 걔 알잖아, 소심한 거."
고신 : "그래, 맞아. 그걸 니가 고맙다고 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긴 하다. 엔젤."
쥐고 있던 비어버린 우유팩을 플라스틱 수거함에 넣고 몸을 돌린 고신의 턱짓이 다시 호프집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엔젤은 사실 좀 추웠던 참이었다. 만일 밖에서 무슨 이야기라도 길어지게 된다면 곧장 춥다는 핑계를 대며 시타엘과 동기들이 있는 호프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핑계를 댈 이유가 사라지고 나서야 처음 편의점을 왔을 때와는 다르게 고신과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전신주를 등진 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있다. 이렇게 딱 둘만 있었던 것은 3, 4년 보다 더 오래된 것 같다. 고맙다고 말하는 건 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엔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고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고맙다, 에 가까운 말이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왜 고맙다고 했을까, 그건 시타엘이 했어야 될 말인데. 엔젤은 아무리 시간을 많이 줘도 그 엇비슷한 표현에 제 감정을 전달할, 단 한마디로 표현할 간결한 문장이 영영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엔젤의 귀로 고신의 콧노래가 들려왔다. 엔젤의 눈에 바닥에 늘어진 제 그림자가 고신의 것보다 짧아진 것이 보였다. 짧아진 게 아니라 엔젤이 느려진 것이다. 천천히 느려지던 걸음이 완전히 멈춰버린 걸 고신이 뒤늦게 알아채고 느릿하게 선 엔젤을 쳐다봤다.
엔젤 : "그 노래. 어디서 들었어?"
고신 : "노래?"
엔젤 : "니가 방금 흥얼거린 노래."
고신의 콧노래도, 고신의 걸음도 엔젤의 그 말에 멈췄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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