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주일 전이었나, 엔젤은 시타엘의 채근에 못 이겨 SNS 계정에 영상 하나를 업로드 했다. 프로포즈 영상이었다. 시타엘이 준비한 프로포즈 반지와 꽃다발이 담긴. 다른 커플이 그러하듯, 프로포즈 역시나 결혼 준비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정말 엔젤에게 그것은 본질이 훼손되어버린 결혼으로 향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무방할, 그러나 형식적인 것이라도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쪽은 오히려 시타엘 쪽이었다.
보통의 신부들이 그러하듯이 엔젤이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해주길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상은 5초 정도로 카페 내부에서 찍은 그것이 다였다. 반지를 낀 채 꽃다발을 안고 웃고 있는 그 모습. 그 배경에 어떤 음악이 흐르고 있는지 따윈 엔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페에는 멜론 탑 100내 포진 된 팝송 중 하나가 적당히 흐르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때 흐른 음악이 멜론 탑 100 팝송의 목록 중 교묘히 섞인 카페 사장의 취향이 반영된 가스펠송이라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그 흔치 않은 노래를 알아챈 건 엔젤이 아는 용 중 단 한 명 뿐이었다. 그 배경음악에 관심을 가질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건 그 동영상을 올린 엔젤도, 그 동영상을 촬영한 시타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5초짜리 동영상 배경에 깔린 음악이 지금 고신의 콧노래로 흘러나온다는 것은 정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종교와 SNS 계정 둘 중 하나도 가지지 않은 고신이 그 노래를, 딱 그 부분만 흥얼거렸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우연의 일치니까.
고신 : "무슨 노래?"
엔젤 : "니가 방금 흥얼거렸잖아. 가스펠송 말이야."
고신 : "내가 방금 전에 가스펠송을 흥얼거렸나?"
장난이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엠블럼을 쳐다봤을 땐 그 겹쳐진 동그라미는 정확히 네 개가 맞았다. 넷, 하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속으로 중얼거렸을 때 고신이 말했다. 장난이야, 장난이야, 장난이야. 그 말이 엔젤의 달팽이관을 통해 무한히 확장을 하며 반복되는 동안 고신이 펜더 쪽에서 엉덩이를 떼며 웃었다. 그 앞에서 굳어 있던 엔젤의 마음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고신은 무참히 장난이라는 말을 읊조리더니 우스워 죽겠다는 듯 허리를 젖혀 웃어댔다.
엔젤은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몰랐다. 고신과 같이 웃어야 하는지, 화를 내야 되는지, 적잖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곧 알았다. 엔젤은 웃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다는 것을. 웃음 끝에 고신이 엔젤에게 다가와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엔젤은 작게 인상을 썼다.
지금 뭐해? 제가 생각해도 전에 없이 낮은 어조로 반문하는데 고신의 그 툭유 여유롭게 웃는 얼굴은 낯을 바꾸지 않았다. 벤치에 앉은 제 시선에 맞추려 허리를 굽힌 채 다가선 그 얼굴이, 그 눈길이 견딜 수 없다고 느껴지는 만큼 엔젤의 얼굴은 더 굳어졌다.
고신의 손가락이 그런 엔젤의 미간을 훑어 내렸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막 마친 이도 이 정도로 심장이 뛰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흰색 아우디 a6를 등지고 선 고신의 모든 것이 엔젤의 눈에는 비상식적으로 근사하게 맺혔다.
야. 엔젤. 표정 풀어. 이게 그렇게까지 인상 쓸 일이야?
호프집으로 돌아갔을 때 몇 몇은 얼굴이 벌개진 상태로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 있었고 고신은 언제 자리를 비웠냐는 듯 앞에 놓은 오징어다리인지 오징어채인지 모를 마른 안주를 집어 씹으며 동기들 틈에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고신과 대각선으로 한 세 칸쯤 떨어져 앉은 엔젤의 심장은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심장이 뛸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엔젤은 자신도 모르게 시타엘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고신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거짓말처럼 다른 이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고신만 보이고 고신만 들렸다. 사랑에 빠진 순간을 정의하려면 엔젤은 그 순간이라 자신있게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고 계속 확장되던 그 목소리가 귓속을 울려대서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필 그 때 엔젤의 테이블엔 게임이 한창이었다.
흑장미를 자처한 엔젤은 상대가 누구인지 상관도 하지 않고 걸리는 족족 자신이 대신해서 앞에 놓인 소주잔을 연신 들이켰다. 옆쪽만 쳐다보며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는 고신의 시선이 연거푸 다섯 잔 쯤 소주를 내리 삼켜냈을 때 쯤에 엔젤에게 닿았다. 그 시선을 느낀 엔젤은 누가 벌칙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제 앞에 놓인 잔을 확 하고 들이켰다. 마지막 잔은 왠지 모르게 엔젤에게 더 쓰게 느껴졌다.
"오늘 너 무리한다?"
어느새 제 옆자리로 옮겨온 고신은 속도 모르고 웃었다. 엔젤은 테이블 밑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자꾸 풀리는 눈에 힘을 줬다. 아무리 해도 고신처럼 웃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어, 그런 말을 해놓고. 엔젤은 생각할 수록 억울했다. 이런 식으로 호감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훅 하고 뛰어버릴 거라는 예상은 한 적도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고신 : "그만 마셔. 너 집에 기어갈래?"
엔젤 : "기어가도 내가 기어가. 너는 신경 꺼."
엔젤이 다시 잔을 채우려 소주를 집어 들었을 때 고신의 손이 엔젤의 잔을 막았다. 덕분에 고신의 까르띠에 시계 위로 무참히도 소주가 콸콸 하고 쏟아졌다. 놀란 엔젤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테이블 아래로 미끄러지며 그나마 남아있던 소주가 바닥에 초록색 병조각과 함께 흩어졌다.
누군가 엔젤에게 해준 말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랐다. 테이블 밑으로 뭔가를 쏟기 시작하면 취한 거라고. 미안한 마음보다 당혹스러운 마음보다도 억울한 마음이 더 많은 엔젤은 점점 취기가 올라 자신이 상식적인 행동과 점점 멀어져 가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쯤 멈추고 싶었다.
까르띠에에 소주가 묻든 말든 고신은 하던 대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로 깨진 병 조각을 주워 올리는 엔젤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야, 다친다고. 고신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삼켰던 소주 한잔 보다 더 쓰게 들려왔다. 그런 목소리로 사귀자고? 아니 장난이라고? 점점 더 엔젤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취기는 단박에 오른다. 엔젤은 고개를 저으며 늘어지는 목소리로 나도 할 수 있어. 하고 말했다.
고신과 나머지 동기들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말 끝에 곧바로 달라붙었다. 마치 동물원에서 묘기를 부리는 귀여운 돌고래를 쳐다보듯한 눈길들이 말 뒤에 또 달라 붙었다.
엔젤은 옆에서 하얀 이빨을 모조리 다 드러내며 웃는 고신이 밉게만 보였다. 젖은 까르띠에 기계가 감긴 팔이 더 밉게 엔젤의 어깨를 감쌌을 때 엔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심장이 비상식적으로 뛰어대는 걸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적잖게 당황스러운 탓인지 엔젤의 눈에는 고신의 웃음이 약간은 옅어져 보였다. 덧없이 휘어져 있던 눈매가 동그랗게 떠진 걸 보니 확실히 그랬다.
엔젤은 그 길로 호프집을 뛰쳐나왔다. 뒤따라 누군가 쫓아왔지만 그 용들 틈에서 고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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