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부터 그 동영상을 보는 게 아니었다. 구겨진 운동화 뒤축을 붙잡고 억지로 부은 발을 밀어 넣으며 고신은 생각했다. 발등에서부터 정강이까지 찌릿하게 타고 오르는 미미한 통증 탓에 구겨진 운동화 뒤축 만큼이나 고신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솔직히 이렇게 된 시발점은 다 그 동영상 때문이다. 그 5초 될까 말까 한 그 짧은 영상. 5초로 끝나지 않고 계속 플레이 되는 저주받은 영상이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에 마치 이상적인 행복을 찾은 여자의 전형적인 미소가 떨쳐지지 않는다. 며칠 전 그 날 굳어져가던 그 얼굴과 이상적인 행복을 찾아 웃는 그 얼굴을 반복적으로 떠올려 같은 용이라 매치시키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쪽팔리게도 기어이 발 한쪽을 다 밀어 넣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운동화 그렇게 구겨 신고 다니지 말아라. 넌 새운동화도 꼭 그렇게 구겨 신더라. 날라리라고 손가락질도 한다. 뒤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에 쥐고 있던 뒤축을 놓아버렸다. 거짓말처럼 온 몸에서 힘이 빠진다.
그래. 보지 말 걸 그랬다.
멍청하게 주저앉은 고신의 등 뒤로 기다렸다는 듯 다른 잔소리들이 덮쳐온다. 한국에 좀 들어왔으면 본가에 좀 있을 것이지 또 나가는 거냐. 술 먹고 돌아다니지 좀 마라.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무슨 집안에 누구자식이 술 먹고 뭔 짓하고 다니는지, 그 놈의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거 일도 아니더라. 고신아. 가뜩이나 허우대 멀쩡한 애 장가 안 보낸다고 얼마나 말들이 많은데. 빌딩 한 채 아파트 한 채 땅 몇만 평 넘기는 건 우습게 하더니 잔소리는 왜 이렇게 촌스러운지.
고신이 몸서리를 치듯이 휘청거리며 일어서자 현관 앞에 놓여있던 짐들이 기어이 그런 고신의 손에 쥐어진다. 원래라면 늘 그런 잔소리 같은 건 그냥 넘겼을 고신이었지만 심기가 굳어진 탓에 슬쩍 돌아보며 늘 그랬듯 웃어주는 게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눈가가 붉어진 걸 눈치 빠른 엄마가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손만 힘 없이 들어보이자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진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눈치인지 그런 고신의 몸을 억지로 돌려 꼭 끌어안는 것까지. 고신이 얼굴을 푹 하고 포근한 그 어깨에 묻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노심초사 막내 아들 걱정 뿐인 엄마에게 그런 쉬어빠진 얼굴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
행동이 조금은 달랐단 것이 느껴진 탓인지 엄마는 어휴 참, 그 습관대로 다신 잔소리 하지 않겠다, 또 그렇게 전전긍긍이다. 늦둥이 막내아들이 뭔지. 서른하나의 아들이 아직도 철부지 어린 애처럼 보이는 것인지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앞선 잔소리와는 상반된 한껏 다정함이 묻어난다.
알겠어. 반찬이나 잘 가져가고. 모자라면 전화 해. 그런 탓인가. 이렇게 제멋대로 자라버린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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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재수를 해가면서 까지 그 대학의 경영학을 전공할 이유는 없었다. 고신이 그런 선택을 한 건 단순히 쪽팔리기 싫어서였다. 누나들 전부다 줄줄이 내로라하는 명문대를 졸업한 것도 모자라 경영승계가 무엇인지 외국으로 기업 경영에 대한 수업을 받으러 다니는 판국에 적어도 그들과 똑같은 급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대학엔 진학하고 싶었다.
물론 애당초 그런 고신의 성정을 파악한 탓에 사업 같은 건 물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인생은 어찌 될 지 모른다는 아버지의 판단도 그 선택에 한 몫을 한 건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들로 입학한 대학입학 과정의 스타트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입학 기념으로 받은 아우디를 타고 다닐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엔젤을 처음 본 것은 학교 정문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정문 주차장을 이용하려 천천히 차를 끌고 입구로 들어서던 그 길. 그 길 건널목에서 엔젤이 고신의 차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고신도 그런 엔젤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자신의 차를 왜 그렇게 골몰히 쳐다볼까. 은행나무 이파리 틈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성가신 듯 저렇게 눈을 찌푸린 채로 말이다.
이상하게도 짙은 선팅 때문에 안이 보일 리 만무했지만 왠지 모르게 고신은 똑바로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행나무 가지처럼 길쭉하지만 가냘픈 몸을 가진 엔젤이 천천히 보도블록 끝까지 다가서자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그에 고신은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선뜻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어내지 못했다. 뒤에서 누군가 클랙슨을 울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참동안이나 거기 멈춰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엔젤의 눈동자가 자신의 차를 바라보는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의 황당함보다 먼저 신선하게 머리에 부딪혀 온 충격은 고신 자신이 처음 본 누군가에게 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수차례 진부하게 열거된 방식 그대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에게 난 데 없이 뒤통수를 맞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정문 주차장에 방문객으로 접수를 하고 들어서는데 머리가 온통 멍했다. 빈 칸을 찾아 뱅글뱅글 도는 내내 고신의 머릿속에서 손차양을 하며 얼굴을 구긴 채로 차 건너편 어딘가를 쳐다보는 그 동그랗고 말간 그 얼굴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화단 근처로 난 주차장이 경차 전용 구역이라는 것 쯤은 고신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성격이 급한 고신이 그대로 후진을 하며 무리하게 엑셀레이터를 밟아대자 PRM이 과도하게 올랐고 차에선 난 적 없는 요란한 엔진소리가 터졌다. 삽시간에 시선이 그쪽으로 몰리는 건 뭐 당연한 일이었다. 고신의 귀에 퍽 하고 삐비빅 하는 후방감지 센서경고음과 함께 차와 차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사이드 브레이크가 채워지지 않은 건지 노란색 모닝이 힘없이 밀려가며 화단으로 처박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고로 고신이 신입생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신, 그 때 도대체 왜 웃은 거야?
시간을 끌고 싶어 고신의 걸음이 연못까지 왔을 때 쯤 멈췄다. 어차피 계산은 당연히 고신이 하는 거였지만 술을 사러 간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엔젤이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타엘이 덩달아 나서겠다고 하는 걸 겨우 말리고 단 둘만 술을 사러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 연못 앞에서 아주 어릴 때 언뜻 봤던 만화에나 나올 법한 신이 지구본을 휘감은 형상의 동상을 힐긋 쳐다보며 엔젤이 물었다. 고신은 맥주와 오징어 과자가 가득 담긴 봉투를 살짝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고신 : "어이가 없어서 웃었을 걸?"
엔젤 : "대단하다, 그 상황에서 웃을 수도 있고."
고신 : "얼머나 어이가 없었는데. 그 상황이 안 돼보면 몰라."
어이가 없긴 했지. 근데 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날 줄이야.
학과 모임 오리엔테이션 현장에서 다시 엔젤을 마주쳤을 때 고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신입생 특유의 설렘과 긴장으로 상기된 얼굴을 한 엔젤의 두 눈동자와 딱 마주쳤을 때 고신은 사고 처리로 인한 피곤했던 그 시간이 싹 달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말 그대로 어이가 없었다.
고신은 그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웃음이 나는 것을 꾺 참았다. 그 짜릿한 기분은, 고등학교 내내 그렇게 고신 자신을 그리 시시하게 뒀던 건 이런 드라마틱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한 신의 큰 그림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첫눈에 반하는 것에서 더 연장될 수 있는 감정이 있는지 고신은 생각해봤다. 거기서부터 뭔가 8차선 비단길에 무언가 끼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할 수 있는 건 좋아하는 감정 하나 뿐이었다.
엔젤 어깨너머 보이는 중앙 잔디 구장 주변으로 조명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산한 나무들 사이로 주황색 조명들이 언뜻언뜻 들어오자 선배들이 말했던 대로 술 먹을 분위기가 싹 연출되는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차가운 맨바닥에서 캔 맥주를 까는 것은 고신의 경험엔 없는 일이었고 해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어린 주제에 겉멋이 들어 비싼 양주와 와인만 즐겼고 그런 걸 부담 없이 즐길 비슷한 수준의 용들과 교류하던 터라 입학 후 경험하게 된 이런 술자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그걸 하게 만든 게 엔젤이었다. 한 살 어린 동기들과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다 그 때문이다. 엔젤과 친해지기 위해서 고신이 어떤 무리수를 뒀는지 엔젤은 몰랐다.
해가 지고 공기가 스산해지자 엔젤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얇은 남방 하나에 감춰진 어깨가 너무나 가냘팠다.
먹는 건 잘 먹으면서 왜 그렇게 말랐냐? 말라서 괜히 추워 보이잖아. 추운 날씨도 아닌데.
고신이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벗자 엔젤이 주춤거리는 것이 보였다. 약간은 뻣뻣해진 엔젤의 어깨에 고신이 가디건을 걸쳤다. 심장이 저릿한 느낌에 고신이 헛기침을 하며 괜히 그런 엔젤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리며 웃었다. 그 순간 엔젤의 눈이 약간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낯간지러운 호의를 해준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터라 고신도 덩달아 민망했다.
그게 이상하지 않게 하는 건 다 고신의 몫이었다. 늘 그랬듯이 그런 호의를 베풀고 나면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 고신은 여유로운 척 웃었다. 마치 옷 같은 건 아무에게나 척척 잘 주는 부잣집 아들내미의 얼굴을 하며.
야. 입고 있다가 찢어져도 물어 달라 그런 소리 안 할 테니까 좀 그러지 마. 너네는 꼭 그러더라. 아니다. 아예 너 가져. 나 어차피 그 가디건 잘 안 입었다.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엔젤이 웃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웃어서 마음을 붕 뜨게 할 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고신은 알지 못했다. 공기로 가득 차야 할 가슴에 훅 하고 스민 설렘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해소 시켜야 되는지 난감했다. 도대체 짝사랑이란 뭘까, 이렇게 앞에 두고도 온 몸 부서지게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그 감정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고신이 내려놓은 봉투를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뭔가 작심한 듯 고신이 엔젤을 쳐다봤다.
이거 애들 주고 우리 딴 데 갈래?
엔젤은 차가운 듯 따뜻했고 어린 듯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신과는 다르게 엔젤은 약간은 정제된 분위기를 풍길 때 고신은 마치 자신이 그런 엔젤보다 한참이나 더 어리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고신을 따라 비닐봉투를 집어 든 엔젤이 마치 몇살이나 더 넘게 먹은 어른의 얼굴을 하고 웃었다. 심장이 거짓말처럼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닿을 수도 없으면 어쩌란 말인지. 당장이라도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리고 끌어 안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고신이 미간을 찡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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