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신 : "가자. 너 드라이브 좋아한다고 했잖아."
엔젤 : "근데 너 운전 못하잖아."
고신 : "나? 잘하는지 못하는지 니가 봐. 그 때 그 사고가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너도 알 거야."
동기들은 이미 삼삼오오 나무 밑 계단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용들도 잔디밭 앞이나 계단 쪽에 모여 술을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신이 슬며시 동기들 앞에 서서 봉투를 내려놨다. 우르르 봉투를 찢어버릴 듯 공격적으로 내용물을 꺼내는 것을 내려다 보다가 자신이 걸쳐준 가디건 소매를 꼭 쥐고 난처한 듯 눈을 굴리는 엔젤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살짝 감쌌다가 얼른 팔을 내려놓았다. 확 하고 숨을 너무 빠르게 들이마신 탓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뭐해? 하고 묻는 시타엘의 말에 고신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넋을 놓고 쳐다볼 뻔 했다.
뭐 다른 안주 필요할 거 같아서 내가 시켜놔서 가지러 가려고.
거짓말엔 워낙 도가 텄던 탓에 그런 거짓말은 고신의 입장에선 껌이었는데 엔젤은 좀 긴장이 된 듯 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텐데 소매로 얼굴을, 코와 입을 가리며 눈만 동그랗게 든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신이 하는 말이라 다들 믿는 분위기였다.
자연스럽게 고신이 엔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엔젤이 느릿하게 그런 고신의 뒤를 따르는 것이 그림자로 보였다. 아직도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무슨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것 같네. 고신이 돌아보자 엔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고신이 쥐고 있는 소매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조금 마음에 걸려 고신이 그 손을 내려놓았다.
한 번씩 의도치 않게 엔젤에게 닿을 때 보이던 눈길이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엔젤은 말이 없었다. 때문에 도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자아와 그냥 엔젤과 둘이서만 있고 싶다는 자아가 고신의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엔젤을 차에 태운 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단 둘이 차에 타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운전 경험 부족으로 도로 지리가 빠삭하지 않아 대부분 차량 옵션으로 박힌 네비게이터에 의존하는데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 무던한 드라이브 코스를 쥐어짜려니 머리가 꽤 아팠다. 그러면서 겉으론 그런 티를 내지 않아야 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용들도 짝사랑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가. 스타트 버튼을 누르며 고신이 안전벨트를 매는 엔젤을 힐긋거리며 생각했다. 그런 고신과는 상반되게 너무나 쉽게 관심을 표하던 다른 남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고신이 얼굴을 구겼다.
말랑해 보이는 인상을 주는 엔젤에게는 용들이 쉽게 찝쩍댔다. 가까이 지내게 된 동기들이야 이제 그런 시선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교내를 거닐 때 달라붙은 그 추파들을 모르긴 쉽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엔젤을 마음에 둔 용 중에 자신만큼 속앓이 하는 용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엔젤이 불안하지 않게 규정 속도를 딱 딱 지켜가며 흑석로를 타고 한강공원 주변을 돌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신의 생각과는 달리 봄을 잃은 벚나무는 앙상했고 퇴근 시간이 맞물린 탓에 여기저기 쏟아져 나온 차들로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통에 굳이 규정 속도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창 밖을 쳐다보는 엔젤의 눈이 부산히 성급하게 끼어드는 차들을 훑었다. 사고가 날 것 같아 불안한 건지 어디선가 경적소리가 들려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신을 쳐다봤다. 이럴 땐 이렇게 어린 애 같다. 과제를 할 땐 진짜 호랑이 같더만.
고신이 또 의도치 않게 손을 뻗어 엔젤의 뺨을 건드렸다. 엔젤이 움찔하며 놀라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고신도 당황스러웠지만 차문을 살짝 열면서 부러 아닌 척 웃었다.
고신 : "엔젤."
엔젤 : "응."
고신 : "너 입학실 날 학교 앞에서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어?"
엔젤의 몸이 고신 쪽으로 훽 하고 돌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신이 그런 엔젤을 쳐다보며 볼륨을 약간 줄이자 엔젤이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려 앉았다.
엔젤 : "무슨 소리야?"
고신 : "너 그 때 뭐 보고 있었잖아. 스타벅스 쪽이었나? 인도로 바짝 붙어서 쳐다보고 있었잖아. 나 너 봤는데?"
엔젤 : "나를?"
고신 : "기억 못하는 모양이네."
하긴, 그게 언젠데. 원래 무슨 이유였건 간에 갑자기 별안간 후드려 맞은 놈만 기억하고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 찰나의 순간 용을 멍하게 만든 장본인은 고신의 인생일대 최대의 이벤트였던 그 날을 존재하게 한 이유조차 모르고 있다.
별 것 아니었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묻고 나니 괜히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신이 다시 볼륨을 올리며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했지만 핸들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 까진 어쩌지 못했다.
창에 비춰진 엔젤의 눈동자는 분주히 밖을 오가는 불빛들을 쫓았다. 그 날을 떠올리는 건가. 되물으면 이상할 테니까 고신은 궁금했지만 꾹 참기로 했다. 그것 또한 늘 그랬듯이 말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땐 모두가 알딸딸하게 술에 취해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톤이 높아진 동기들이 고신과 엔젤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다. 고신이 얼른 엔젤이 앉을 자리를 터주고 시타엘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어느새 미지근해진 캔 맥주를 만지작거리며 고신이 계단 턱에 살짝 기댔다. 추운 듯 움츠러든 엔젤이 천천히 누군가 먼저 개봉해놓은 맥주를 홀짝이는 것이 보였다. 미지근한 술에 쥐약인 엔젤이 취할까, 온신경이 다 그쪽으로 향했지만 애써 시선을 거둬 고신 역시나 입 안으로 미지근한 맥주를 흘려보냈다.
공기는 찼지만 마음은 그 전보다 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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