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 하편 두편으로 나뉩니다.
한편당 분량이 꽤 기니 시간 여유가 충분히 있으실 때 읽는 걸 추천드립니다.
너무 익어버린 감정은 손쉽게 짓물러지기 마련이기에 뜨겁게 달궈지는 마음 또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가끔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려 해도 자꾸만 곁에 머무르려는 것들과 멀어질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8년째 연애 중인 스물셋 솔라의 지론이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떨어져 앉아 줄래요, 제피로스 선배?"
솔라는 반절도 채 못 비운 맥주잔을 내려두고서 의자를 살짝 끌었다. 알딸딸 취기가 올라도 이런 상황엔 영 내성이 안 생겨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측근으로 파고들어 이것저것 해주려 드는 상대의 노력에도 솔라는 그저 시큰둥한 낯으로 테이블에 놓인 웨지감자를 질겅 씹기 바빴다.
은은하게 벌게진 솔라의 옆태를 지그시 바라보던 상대는 물러나려는 듯 몸을 뒤로 뺐으나, 이내 텅 빈 컵에 찬물을 따라주며 다시금 솔라의 눈빛과 귓바퀴를 녹녹한 시선으로 끈질기게 훑었다.
채도 낮은 노란 조명을 받지 못해 음영이 진 반쪽 얼굴엔 반듯하게 각진 턱선만 도드라졌을 뿐, 질 낮은 저의 같은 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상대는 그저 솔라가 궁금했을 뿐이다. 아무리 어색하다 해도 명색이 첫 만남인데, 한 시간 전엔 정적 없이 웃으며 잘만 떠들어 놓고선, 무려 이 자리도 솔라가 만들었으면서 정작 지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그녀의 심정을 알다가도 모를 수 밖에 없었을 테다.
"제피로스 선배, 혹시 저 좋아해요?"
"아하하, 저 말씀하시는 거예요? 당황스럽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아니 뭐 그냥, 저희 아직 말도 못 놓았는데 여기서 살짝만 삐끗하면 닿을 것 같잖아요, 지금."
비스듬히 턱을 괴곤 가만히 듣던 상대는 잇새로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어내더니 그제야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그러곤 검지로 테이블을 잘게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사실 괜찮냐고 제가 여러 번 여쭤봤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길래 이어폰이라도 끼고 계신 건가 궁금했거든요.
순식간에 홧홧한 얼굴이 두 뺨에 오르는 게 민망함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진 몰라도 솔라는 일단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내저어 보였지만, 실은 웅웅 들려오던 내부 소음부터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풍기던 달콤한 향수 내음까지 연타로 골을 때리니 눈앞이 핑핑 도는 듯 했다.
한입에 털어 마신 도수 없는 맹물에도 탄성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끝 없는 안드로메다를 맨몸으로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수십 년을 텅 빈 우주에서 헤맨 것만 같았는데 지구에선 고작 십 분이 흘러있었다.
"솔라씨 생각보다 많이 취하셨나 보다."
"그래 보여요?"
"네. 제 이름 자꾸 틀리시길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 이름은 제트거든요, 제피로스가 아니라.
제트의 입은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오히려 묘하게 표정이 굳은 쪽은 솔라였다.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정신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취해버릴 줄 알았어. 차라리 나오지 말 걸. 나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정제되지 않은 날것들이 자꾸만 속에서 날뛰었다. 정제된 술을 홀짝일수록 흐물해지기는 커녕 힘 들어간 쌍꺼풀만 겹겹이 쌓였다.
균형 감각 잃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일보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감정들의 역류를 막는 일이 더 급했던 탓이다. 그 감정들이 은연중에 다크에게까지 티가 난 모양이었다. 이름까지 여태 오인하고 있었으니 명백한 무례임이 틀림 없었다. 어색함에 다급히 핸드폰 액정을 두들겼을 땐 어느덧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나갔던 정신이 되돌아오니 그제야 더는 이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말 죄송한데 저희 다음에, 나중에 다시 얘기해도 돼요? 제가 집에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갑자기요? 저 별로라서 도망가는 건가."
"그랬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럼 정말 급한 일인가 보네."
무례에 무례를 겹겹이 쌓았다. 제트를 납득시키려는 일말의 변명조차 없었고 이에 제트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너무 언망진창이라 미안해지려고 하네. 한겨울의 찬 공기를 들이키자 벌게지던 코 끝이 솔라의 궁시렁에 진정성을 더해주었다.
건물을 빠져나오며 땅에 처박혔던 제트의 고개가 훌쩍임이 첨가된 솔라의 말을 은근히 기다렸다는 듯 높이 치솟았다. 진짜 미안하면 다음엔 솔라 씨가 밥 한 번 사요.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그대로 기류를 타고 내려온 제트의 팔이 솔라의 손목에 걸렸다. 취했으니 조심해야 된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다길래 분위기 파투 낸 죗값이라도 치르자 싶은 심정으로 택시가 올 때 까지 수갑 찬 듯 묵묵히 붙들려 있었다.
연석 끄트머리에 발을 반절만 걸친 채로 오래 버티기 게임이라도 하듯 아슬아슬 서 있던 일분 일초가 억겁처럼 흘렀다. 괜히 머쓱한 심정에 신고 있던 블랙 롱부츠 앞코로 얼어버린 길바닥만 툭툭 걷어찼다.
"가만 보면 솔라 씨는 남 신경 쓰이게 만드는 데 제주 있는 것 같아요."
"왜요?"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몰라서 눈을 못 떼겠거든요, 지금도."
"저 뭐 또 잘못했구나."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신경 쓰인다구요. 다리든 머리든 속이든 온갖 곳이 울렁거렸다. 넘어지지 말라고 힘주어 옥죄어오던 제트의 팔짱에 정말 죄라도 지은 것만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때 마침 도착한 택시에 번잡하게 몸을 실으며 식사든 대화든 예절부터 다시 배우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사과를 마지막으로 차 문이 닫혔다.
솔라는 조아리던 제 머리를 그대로 창문에 가져다 찧었다. 아, 뭘 해도 바보 같냐. 정신 나갔나 봐 진짜. 가신 줄 알았던 어지러움이 차량의 떨림에 의해 물큰하게 다시 올라왔다. 무거운 눈꺼풀에 더는 저항하지 않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환상
w.익명의 독자
따갑던 햇살에 두어 번 눈동자를 굴리고 떴을 땐 침대 머리맡에 쪼그린 채 앉아 있는 제피로스가 있었다.
"깜짝이야,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요?"
"네가 잠꼬대로 나 찾을 때부터."
내리쬐는 가시광선에 모습을 드러낸 허연 먼지가 방 안을 퐁퐁 유영한다. 현관부터 방까지 쭉 널브러진 솔라의 롱부츠와 가방, 그리고 코트. 보일러를 켜지 않아 냉골이 된 방바닥. 햇빛에 의존하여 간신히 밝음 농도를 유지 중인 방. 그 엉망진창 속에서도 제피로스는 묵묵히 솔라의 곁에 있었다.
"...진짜 많이 보고 싶었나 보다, 자면서도 별 얘길 다 하는 거 보면."
"그런 것 같길래 잠깐 왔어."
음주의 여파가 아직도 남았는지 멍하니 천장만 응시하는 솔라의 콧잔등을 살살 긁으며 제피로스가 물었다. 소개팅은, 잘 했고? 솔라는 저절로 튀어나오던 재채기의 반동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개팅 아니라니까요. 못 견디겠어서 도중에 나왔어요."
눈을 질끈 감고선 이마를 짚는 제피로스에게서 응어리진 답답함 같은 복잡한 심경이 물씬 스쳤다. 솔라는 그 눈길의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어서 어둑한 거실로 쫓기듯 피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뒤늦게 둘러본 집안은 고요한 침묵이 만든 적막함과 정돈되지 않은 온갖 짐들의 요란함이 잔뜩 뒤섞여 그야말로 초토화된 상태를 형성하고 있었다.
집안 꼴을 보아하니 개처럼 기어들어 왔겠구나. 새벽 내 솔라의 꼬장을 묵묵히 지캬보았을 제피로스를 상상하니 저절로 두 뺨이 화끈거렸다. 아무리 수년을 함께 살았대도 나사 풀리는 것만큼은 절대 보여주기 싫은 꼬라지였다. 마시기 위해 냉장고에서 꺼내든 냉수는 어느새 뺨에 굴려 열을 시키는 용도로 전락해 있었다.
"너 침대까지 네발로 기어갔던 거 기억 안 나지."
손에 쥐었던 냉수가 미지근한 맹물이 될 때쯤에야 슬그머니 거실 귀퉁이 벽에 기대어 선 제피로스의 안광이 형형히 빛났다. 놀려먹기 딱 좋은 사냥감을 포착한 듯한 눈빛을 띠고서 네발로 기어 오는 기행을 굳이 재현해 보였다.
"아, 진짜로 오바하는 습관 그거 버려야 돼요."
그러나 지간 시간을 곱씹어 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더는 바락대지 못한 채 일단락되고 만다. 오래 끌고 가봤자 제게 불리한 싸움이라는 걸 솔라도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제피로스는 여전히 버석하게 웃으며 톡톡 잔발을 구르더니 이내 입을 뗐다.
"그래서, 어젠 왜 그렇게 헐레벌떡 들어왔대? 너 숨넘어가는 줄 알고 내가 더 놀랐잖아."
"왜겠어요. 그것도 다 알면서 괜히 물어보는 거죠?"
"그동안 숨겨왔던 네 정체가 신데렐라 공주일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야."
숙취에 거하게 꼴아있는 공주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만은 제피로스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어 괜스레 입꼬리만 삐쭉 말아올리는 솔라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놓여있던 신년 달력만 만지작대며 어물쩍대던 솔라의 입에선 미안하다는 말이 혀끝에서만 맴돌다 끝끝내 도로 삼켜지고야 만다.
제피로스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솔라를 마주 보고 앉아선 느릿이 턱을 괴었다.
"네가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부탁해서 만든 자리였다며. 난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는데 왜 그랬어. 내가 자주 못 오니까 네 곁에 나 말고 좋은 용이 또 있어주길 내심 바랐거든. 근데 넌 내가 신경 쓰여서, 결국엔 나 때문에 잔뜩 취한 채로 도망치듯 집에 오더라. 난 정말 다 괜찮은데."
또 저 소리, 환멸 나네.
사실 제피로스는 말버릇처럼 괜찮아를 입에 달고 살아왔다. 솔라가 열네 살일 때부터 봐왔던 제피로스는 평생 손해 보고 살아도 그저 굼벵이처럼, 그게 천성인 건지 배려인 건진 모르겠지만, 도리어 솔라가 더 불같이 화를 내도 늘 괜찮다고만 했다. 종국엔 솔라의 분노 포인트가 제피로스에게 꽂히도록 만들었다.
제피로스, 제발 싫으면 싫다고 말 좀 해요.
난 진짜 괜찮은데 솔라, 너 있으니까 나는 다 괜찮은 건데.
"내가 안 괜찮다구요, 내가."
제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진 생각도 안 하죠? 매번 이런 식이야. 맨날 나보고 미안해하지 말래. 본인은 맨날 다 괜찮대. 혼자 두고 홧김에 다른 용 만나러 가는 게 괜찮아? 우리 아직 안 헤어졌는데 환승연애 찍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게 괜찮을 수가 있어. 나는 진즉부터 미안해서 고개도 못 들겠는데 그런 말 들으면 진짜 불편한 거 알아요?
한 마디 마다 힘이 들어가던 솔라의 주먹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 안엔 제피로스로부터 비롯된 죄책감이 잔뜩 쥐여져 있을 것이다. 바보 천치처럼 본인 마음 하나조차 일찍이 자각하지 못해 솔라에게 고백하는 데에만 자그마치 일 년을 쏟았던 이의 입에서 괜찮다는 감정의 표현이 그렇게 빨리 튀어나올 수가 없다.
제피로스의 괜찮다는 말은 결국 죄다 솔라를 위한 위로라는 것이었다. 제피로스는 제 감정을 표출해 내는 힘마저 솔라를 다독이는 일에 썼다. 그럴 수록 솔라의 가슴 속엔 부채감만 켜켜이 쌓여간다는 사실을 제피로스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알겠어. 솔라, 미안. 내가 잘못했네."
"대체 뭘 잘못했는데요."
"네 속마음까진 생각 못 한 거."
"틀렸거든요? 그리고 사과 들으려고 한 소리 아니니까 자꾸 나쁘게 만들지 마요, 짜증 나 진짜."
처음 본 사이에선 미안하다는 말이 과대포장되어 술술 나왔으면서 무려 구 년을 봐온 제피로스에겐 유독 말이 입 밖으로만 나가면 투정이 됐다. 출력값 오류나 버린 깡통 로봇이 된 기분이었다.
제피로스를 껴안고 싶어 뻗었던 손은 닿지 못해 허공만 맴돌다 바지 무릎에 일어난 보풀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울분을 그렇게 꾹꾹 참아내야만 했다. 미안함에 무너져 내리지 않는 일. 그건 제피로스를 위로하는 솔라만의 방식이었다.
이 특이한 방식은 7주년을 기점으로 채택되었다. 당시 스물둘에서 셋으로 넘어가던 제피로스에게 찾아온 프랑스 유학의 기회를 두고 사상 초유의 커다란 다툼이 발발했다. 단순히 재능 덕이 아니라 아트를 사랑하여 미대생이 되었던 제피로스.
잡다한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을 괴롭힐 때 마다 붓질로 덮어버리면 금방 잊혀지거든. 겹겹이 쌓여가는 색만큼 커가는 거지. 그 성장이 밑바탕이 되어 결국 그림을 완성하고야 말 테니까. 솔라, 내가 무슨 색일지 궁금하지 않아? 너를 너무 좋아해서 꽁무니 졸졸 쫓던 중학생이 어떻게 컸는지 궁금하지 않냐구.
자신의 세계를 캔버스에 개척해 가던 그에게 유학이란 어쩌면 제피로스라는 새로운 색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기회였다. 청량이란 청량은 죄다 끌어모아 만들어질 것만 같은 유일무이한 색에 제피로스라는 이름을 새겨주고 싶었다.
그저 제피로스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개인전 여는 게 로망이라며. 그래서 저는 꼭 프랑스에 갔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기회인 줄도 몰라서 잡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인데 이 얼마나 좋은 타이밍이야?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과연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었다. 괜한 걸림돌이 되기 싫었기에 당사자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애쓰던 솔라였다.
며칠을 고뇌하던 제피로스의 대답은 '싫어' 였다. 학창 시절 대대 프랑스를 동경해 온 제피로스가 돌연 포기를 해버린 것이다. 그냥 한국에서 대학 다니면 돼. 프랑스 가면 최소 일 년 이상이야. 너랑 내가 억지로 떨어져 지내야 할 시간이 수년이라고. 너 그거 온전히 감당할 수 있어? 난 자신 없어. 네가 곁에 없으면 나는 어떻게 행복해야 하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모든 감정의 근원지가 솔라였기에 홀로 설 줄 몰랐던 제피로스였다.
서로를 이해하려던 마음이 되려 독이 됐다. 솔라는 제피로스의 꿈이 아까웠고 제피로스는 솔라와의 공백이 아까웠다. 무엇이 더 우위인진 저울로도 판단할 수가 없어서 몇 날 며칠 같은 말만 오갔다. 물러나는 이는 없고 몰아붙이는 이만 있으니 균열이 제법 크게 났다.
솔라는 이제 와 유학을 가지 말라고 붙잡는다면 끝내 제피로스의 꿈을 모조리 잡아먹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수일의 냉전 끝에 솔라가 승리를 거머쥐며 종전되고야 말았다.
그러나 미처 몰랐다. 공항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제피로스를 보내면서도 몰랐다. 제피로스에겐 한평생 솔라가 일 순위였다는 걸. 제피로스의 행복은 솔라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억지로 홀로 서야 했던 그 때가 얼마나 버거웠을지. 제피로스를 위해 부단히 애쓴 줄 알았는데 그저 떼쓴 것에 불과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를 기점으로 솔라가 제피로스에게 유독 가책을 느끼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었다. 그치만 등 떠밀어놓고 먼저 무너져버리는 건 제피로스에게 차마 못 할 짓이었다.
"바지 보풀 그만 뜯고 일단 문자부터 읽어보지?"
솔라의 발끝에 채였는지 어느새 가방에서 튀어나와 방바닥을 구르던 핸드폰이 온몸으로 진동을 울려대고 있었다. 보나 마나 제트일 것이다. 제피로스는 턱을 받치고 있던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두들기며 눈짓했다.
"제트 씨 좋은 용 같아. 왜냐니, 상 차린 사람이 상 엎어버렸는데 되려 괜찮냐고 연락 주는 거 ㅗ바. 만약에 내가 너한테 첫 데이트 신청해 놓고 중간에 튀면 어떨 거 같은데?"
"그랬으면 바로 아웃이죠."
"그래서, 답장을 보내라구요?"
제피로스는 턱을 긁적였다.
"솔라, 넌 지금 답장을 할지 말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해야 돼."
"또 볼 사이는 아닐 거 같은데도요?"
"자꾸 그렇게 방어적으로 굴지 마. 너 평생 나만 옆에 끼고 살 거 아니잖아. 아주 세상 척지고 사시게?"
그러니까 솔라는 제피로스의 이런 태도가 영 고까웠다. 제 세상의 채도를 잔뜩 높여주던 장본인이 제피로스인데. 제피로스 한 명이면 옆에 뭘 갖다 붙여도 덜 아름다워 보이는 세상인데. 미술 한다는 용이 그런 것도 몰라요? 나는 제피로스 하나만 평생 끼고 살 거라고. 제피로스 없으면 내 세상 죄다 흑백이라구요.
뜬금포로 쏟아낸 미대생 맞춤형 고백을 촉촉하게 입가에 머금고선 식탁 위로 팔을 베며 천천히 엎드렸다. 그럼에도 제피로스는 꽤나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간 앞으론 제트씨 끼고 살래? 그냥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유지하라는 거지. 너 괜히 나 때문에 온간 관계 단절하고 다니면 나 진짜 속 터져, 알지?"
엎드려 있는 솔라의 머리를 살살 쓰다 듬었다. 맞닿은 두 시선이 애틋하게 묶였다.
"너 아직 술 더 깼나보다. 눈에 힘이 없네, 조금 더 자는 게 좋겠는데."
"그럼 나랑 같이 자요. 어디 가지 말구."
응? 가지 마요. 속이 부대끼는 게 왠지 꿈자리가 안 좋을 것 같단 말이야.
솔라를 도로 침대로 데려가선 싱겁게 웃으며 줄창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제피로스의 부드러운 손길에 취해 결국 대답을 듣기도 전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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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이 되어서야 간신히 찌뿌둥한 몸을 비틀어 일어날 수 있었다. 어디 가지 말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건지, 제피로스는 곁에 없었다. 하여튼 소리 소문도 없이 나가버리는 거 습관 다 됐지. 생이별을 하게 된 7주년 이후로 제피로스에게 물들어버린 나쁜 습관이었다. 채향만 남겨두고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예고도 없이 다시 들이닥쳐선 집 안의 적요한 침묵을 와장창 깨뜨렸다.
그딴 요상한 습성은 어디서 배워온 건지, 그 덕에 솔라는 자연스레 제피로스 생각을 종일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상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메시지를 폭탄으로 날려두곤 잠을 이겨내려다 그대로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버린 날이 허다했다. 새벽을 지새우려 틀어뒀던 영화인 '미드나잇 인 파리' 의 명대사를 이젠 몽땅 외워낼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날들이었다.
등 떠밀어 보낸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인 걸까? 애닳아하는 솔라를 절단낼 작정으로 굴어도 이 생각 하나면 제피로스의 행동을 애써 이해할 수 있었다.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본 핸드폰 화면엔 역시나 아직 답장 못 한 제트의 문자만이 둥둥 떠다녔다. 속은 괜찮냐, 밥은 잘 챙겼냐, 어디 아픈 거냐, 시시콜콜해도 진심 어린 안위를 물어오는 문장들이 꽤나 오랜 시간 텀을 두고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오묘한 기시감이 들어 폐부에 고여있던 헛헛함을 한숨 모아 크게 내뱉은 솔라가 누른 건 제트와의 메시지가 아니라 제피로스와의 대화창이었다.
색만 바뀐 말풍선이 화면 오른편에 잔뜩 쌓여있었다. 아직도 화가 잔뜩 난 건지, 제피로스가 읽지 않아 사라지지 않은 숫자 1을 매단 채로.
예고 없이 제피로스를 강타한 헤어짐이라는 거센 파도가 세월을 지나오며 둘의 관계까지 야금야금 깎아버린 걸까. 실은 제피로스가 프랑스로 떠난 후로부터 연락에 점점 뜸이 생기더니 반 년쯤 지났을까, 그 때 부터 더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솔라가 졸음을 버텨가며 두 눈을 부릅뜨고 새벽을 지새워도 매한가지였다.
시간을 가지다던가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도 없이 제멋대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이별을 하고 잇었다. 롱디의 흔한 결말이라고들 하지만 이번엔 솔라가 놓아줄 준비가 되지 않아서 꾸역꾸역 붙잡고 있던 인연 줄로 사랑을 촘촘히 뜨개질 하기 시작했다.
저 오늘 휴학했어요. 오늘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갔어요. 많이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사사로운 혼잣말부터 마주 보고는 못 내뱉을 간지러운 고백까지, 제피로스가 되돌아올 때 까지 솔라는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홀로 외치고 있었다. 텍스트 입력 칸 위 커서가 깜빡인 횟수만큼 제피로스를 생각한 셈이다.
더 이상 괘념치 말라는 듯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려댔다. 벨 소리부터 요란스러운 전화의 발신지는 포폰. 그러니까, 솔라의 부탁을 받고 제트를 소개해준 대학 동기였다. 전화를 받은 솔라가 입을 채 떼기도 전부터 바락댔다.
-기껏 자리 만들어줬더니 냅다 혼자 먼저 일어나버리셨다며? 이럴 거면 왜 소개해 달라고 한 거냐? 웬일로 네가 먼저 부탁하길래 제트 선배한테 제발 시간 좀 내달라고 싹싹 빌었건만 이게 엿을 쌍으로 맥여버리네.
"미안. 뒤늦게야 신경 쓰였어, 제피로스."
-.......... 돌겠네 진짜. 네 심정 이해되긴 하는데 언제까지고 그렇게 발 묶인 채로만 살 순 없는 거잖아.
포폰의 열불에 뜨겁게 달궈지던 핸드폰을 머리맡에 올려두고 스피커폰으로 새어 나오는 분노를 흘려들었다. 드러누운 머리맡 위 천장에 박혀있던 전등은 전력이 약해진 건지, 자꾸만 깜박거리며 솔라의 눈을 괴롭혔다. 주먹 쥔 팔뚝을 눈자위에 얹자 찾아온 암흑이 서글프게도 익숙했다.
나 아직 제피로스랑 안 헤어졌거든.
제피로스를 프랑스로 떠나보낸 후에야 물밀듯 몰려왔던 공허함이 솔라의 모든 인간관계를 휩쓸어 가버리고 말았다. 학기 도중 휴학을 해버릴 만큼 강한 후폭풍이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니. 종일 방에 눌러앉아선 제피로스의 향만 남은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고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게 최선이자 전부였다.
오랜 기간 동안 둘이 함께 지냈던 널찍한 방 안에 남은 거라곤 주인 잃은 물건들과 고독을 품은 사색 뿐이었다. 온전히 솔라가 홀로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다. 반쪽만 남아버린 몸으로 견뎌야 했던 남은 생. 그 무게가 천문학적으로 무거워 도무지 걸음을 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공백이 주는 허기는 일 년이 훌쩍 지나도 꺼지지 않았다. 제피로스를 다시 보게 되고 복학을 한 이후에도 이상하게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자꾸만 솔라를 괴롭혔다. 결국 동태 눈깔 장착하고서 홧김에 제트를 소개받게 된 건 무가치한 자기 위안일 뿐이었다. 공백이 가득한 반쪽짜리로는 살 수가 없어서 뭐라도 채워 넣고팠던 욕심이었다.
어쩌면 황량한 제피로스와의 문자 메시지 창이 주는 헛헉함일지도 모른다. 솔라의 말풍선만 둥둥 떠다니던 화면은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반쪽짜리였으니까. 제피로스는 더 이상 예전처럼 매일같이 솔라의 집에 늘러붙지 않았고 솔라의 친구들과 함께 자리하지도 않았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했지만 더 이상 포장할 수 없는 관계의 소홀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정한 손길로도 감출 수 없는 권태였을 테다. 마치 다른 용이 된 것 같아, 아무래도 제피로스가 나한테 아직도 잔뜩 삐져있는 것 같지? 그 때 포폰은 이제 그만 제피로스를 놓아주는 게 어떻냐고 했다.
"붙잡고 있을 수록 너만 힘들어져. 너도 알잖아."
그럼에도 솔라는 이만하면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용이 변한 거지 사랑이 변한 건 아니니까. 원래 장기 연애하면 다들 그래. 질린 겡 아니라 익숙해진 것 뿐이거든. 솔직히 내가 잘못한 거니까 제피로스가 삐지든 화를 내든 다 이해해 줄 수 있지. 그래서 아무일도 없는 척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다.
어지른 채 방치했던 방을 청소했고, 입꼬리는 억지로 더 끌어올렸다. 잘 지내냐는 친구들의 물음엔 언제나 잘 지낸다고 답했다. 이렇게 웃고 있으면 제피로스가 다시 돌아오겠지. 제피로스는 내 미소를 좋아했으니까.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건 습관적으로 채워둔 두 명분의 음식들이 동나지 않고 그대로 썩어들어가던 때. 포폰과의 전화를 끊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나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질끈 묶던 솔라는 경련이 일 듯한 입꼬리를 잔뜩 내리고선 입을 잘근 씹었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었던 걸까. 얼마나 괜찮아진 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져 바라본 거울 속엔 남루한 얼굴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진짜 못됐어. 내가 제피로스랑 멀어질 용기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제피로스를 다시 마주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난 후였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새로 주문했던 트리가 배송 완료되었다는 문자에 현관문을 벌컥 열었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박스와 나란히 서 있는 제피로스를 목도한 솔라는 질겁하며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잘 지냈냐 물어오는 말투가 너무나도 잔혹해서 당장 제피로스의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는 미안해하지 말라고 이러는 거면 이미 성공했어요. 나 이제 제피로스한테 안 미안해요. 이렇게 멀쩡할 줄 알았으면 그냥 제트 선배한테 답장할 걸 그랬네. 내가 그렇게 미우면 차라리 영영 찾아오질 말던가, 연락은 여전히 읽지도 않으면서 자꾸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나보고 대체 어떡하라구요."
"나 너 안 미워해. 어떻게 내가 널 미워하겠어. 그치만 솔라, 너도 알잖아. 지금 내 상황이.........."
헛헛했던 마음이 홧홧해져 솔라의 속을 짓무르기 시작한 건 순식간이었다. 속내에 진심 꾹꾹 눌러 담느라 솔라의 속을 터지게 한 적은 많았어도 제피로스가 이렇게까지 제게 가혹하게 군 적은 없었으니까. 벌이라도 주고 싶어서 자꾸 이렇게 애타게 만드는 거냐 의중을 묻기도 전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굴비처럼 줄줄 엮어 뱉어내던 제피로스 때문에 잘 지내다가도 하릴없이 무너지는 쪽은 또 다시 솔라였다.
"오늘 지나면 또 언제 올 건데요? 달력 넘어가야 올 건가? 한 달 후면 우리 9주년인 건 알고 이러는 거예요? 알았다 해도 최악이고 몰랐다 해도 최악이야. 진짜 짜증 나."
"미안해."
솔라는 그 말이 가장 아팠다. 흠씬 두들겨 맞는 편이 차라리 덜 아플 것 같았다. 자동 응답기가 되어버린 듯한 제피로스의 입이 야속했다. 듣고 싶다 바란 적도 없는 말을 대체 누가 입력해 둔 건지, 난도질이라도 해서 제피로스의 속내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미안해 그만하고 나랑 약속해요. 이제 헤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 곁에 평생 있겠다고 말해요. 미안해 빼고 아무 말이라도 좀 해보라고!"
"..... 너 그러다 감기 걸려, 일단 들어가자."
제피로스는 눈가와 콧잔등이 잔뜩 벌게진 솔라와 제 키를 웃도는 트리 박스를 동시에 집 안으로 들였다. 소파에 쪼그려 앉아선 솔라가 기대기 편하도록 묵묵히 어깨를 내어주기만 했다. 얄쌍한 솔라의 새끼손가락은 제피로스와 스치기만 했을 뿐, 더는 얽히지 못한 채 맥 없이 허공만 맴돌았다.
발광하는 빛이라돈 LED 전자시계가 전부인 방 안에서 솔라는 날짜가 25일로 넘어갈 때 까지 새벽 내내 소원을 빌었다.
나 이제 제피로스를 그만 잃고 싶어요.
.
"저희가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제트와의 대화창은 순식간에 균형이 맞춰졌다. 솔라는 눈 뜨자마자 오래 묵혀둔 탓에 바람 빠져 가라 앉은 제트의 말풍선을 최상단으로 끌어올렸다. 컨디션이 안좋아서 그간 연락을 못 드렸다고. 눈을 뜨면 제피로스가 제 곁에 있을 거라는 기대도, 이제야 보낸 답장에 제트가 반응을 보일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제피로스는 여전했고 제트는 의외였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오늘 시간 괜찮냐는 문자가 날아왔다.
"저번엔 제가 정말 죄송했어요 제트 선배."
"난 괜찮아요, 정말로. 연락 줘서 고맙지 오히려."
"괜찮다구요?"
"네. 보고 싶었으니까."
제트와 마주 보고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건 연체된 감정의 빚을 갚기 위함인 걸까 아님 그저 제피로스가 괘씸해서일까. 어느 쪽이든 비겁한 건 매한가지다. 눈치 주는 이도 없는데 괜한 눈칫밥을 먹은 탓에 미처 토막 내지 못한 고깃덩어리가 솔라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얼굴을 파묻고 켁켁대던 솔라를 다독이고, 물잔을 건네고, 휴지를 뽑아주고, 혹여 체하기라도 할까 등을 쓸어주고, 터져 나오는 기침과 한탄을 들어주는 건 모조리 제트의 몫이 됐다.
제피로스와 보내왔던 거진 십 년이라는 긴 세월 사이에 생긴 공백은 눈곱만치 작았지만 엄연히 솔라의 마음에 난 자리로 남아있었다. 부단한 노력으로 흐드러짐 없이 완벽한 인상을 지어가던 솔라의 다부진 성격은 동시에 작은 구멍 하나에도 휘청일 수 밖에 없는 뼈대를 구척하고 있었다.
난 자리 틈새로 십이월의 칼바람이 불어닥칠 때, 하필 그 때 잠깐 들어앉아 버린 제트 덕에 솔라는 더 이상 아프지도, 춥지도 않았다. 늘상 내면의 건강을 가장 중요시 여겼던 솔라에게 제트가 최고의 처방을 내려준 셈이다.
그러니 솔라가 고작 두 번 만난 제트를 덥석 제 집으로 들였다는 건 단순 우발적인 해프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솔라는 함께 포장해 온 조각 케이크와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손에 들고서 굳게 잠신 현관문을 망설임 없이 열었다. 더듬거리며 거실 문을 켰을 땐 아직 뜯지 않은 택배 박스가 장승 행세를 하며 우뚝 선 채로 둘을 반겼다.
"저거 혹시 크리스마스 트리예요?"
"아, 네..... 전에 있던 게 좀 오래된 거라 새로 샀거든요. 정신이 없었어서 의도치 않게 방치 중이네요."
"그럼 저랑 같이 만들래요? 지금?"
제피로스 없이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연례행사와 다를 바 없던 일이었기에 당연히 제피로스가 오는 날 꺼내볼 생각이었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솔라가 겉옷을 벗어 던지고선 거침없이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무언의 약속처럼 해왔던 일이라곤 하지만 그 약속 먼저 어긴 쪽은 제피로스 아닌가. 포폰의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과거에 발 묶여 살 수만은 없는 것이니.
비닐을 풀어헤치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솔라의 합리화가 무거웠던 감정의 짐을 덜어준 덕분이었다. 초록 빛깔의 플라스틱 가지를 일일이 펼쳐 모양을 잡아두고선 리본부터 유리 볼까지 온갖 오너먼트를 손 가는 대로 매달았다. 주어진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치우려는 용마냥 행동거지에 망설임이 없다. 솔라가 빼먹은 지네 전구를 트리에 두르고 우수수 떨어지던 잎들을 모아 치우던 제트가 되려 안절부절 못했다.
"조금 쉬었다 할까요?"
그제야 솔라의 행동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더 걸어둘 곳도 없는 앙상한 가지에 꾸역꾸역 집어넣으려던 솔방을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제가 또 혼자 멋대로 굴었죠, 죄송해요."
제트는 마른 세수 하던 솔라를 소파에 앉혀두곤 식탁에 던져놓듯 올려두었던 조각 케이크를 눈 앞에 들이밀었다.
"실은 저도 케이크에 집중하느라 전구 다 엉켰거든요. 우리 지금 당 떨어져서 이러는 거예요."
우스갯소리로 정적을 깨부수려 들던 제트의 갖은 노력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던 솔라가 고개를 들며 파안대소 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더 놀란 쪽은 되려 솔라였다. 의식하지 않고 웃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애써 유예시켰던 행복이 물밀듯 들이닥치니 이젠 도리어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란히 바닥으로 내려와 소파에 등 기대어 앉아서는 그 작은 케이크 한 조각을 나눠 먹으며 싱거운 말들을 주고 받았다.
배부르다. 집이 아직 으슬으슬 하네. 쓰잘데기 없어 보여도 혼잣말은 아니라서 좋았던 말들을. 조각 케이크의 몸집이 작아질 수록 말은 짧아졌고 커피잔 바닥이 드러날 즈음엔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트리를 다 꾸미고 나서야 거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는 걸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에 널브러진 상자들을 뒤지고, 어디에 장식을 달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둘이 계속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마지막 별 장식을 올리고 나자 할 일이 한꺼번에 사라진 느낌이었다. 트리 아래에는 포장지도 뜯지 않은 장식 몇 개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굳이 더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싶었다.
전구가 느리게 깜빡였다. 그 빛이 거실 벽에 닿았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솔라가 몸을 기대앉은 채 트리를 한 번 바라보다가 제트를 따라 제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벽에 걸린 그림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그 그림은 평소에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물건에 가까웠다.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봐온 탓에 이제는 벽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쪽이 더 맞았다. 누가 집에 놀러 와서 그걸 가리키며 물어보기 전까지는 굳이 다시 바라볼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제트의 시선이 먼저 그쪽에 멈춰 있었기에 솔라도 자연스레 그림을 다시 보게 됐다.
캔버스 위에는 색이 여러 겹으로 번져 있었다. 어둡게 깔린 색 위에 조금 밝은 색들이 겹쳐 올라가 있었고, 가까이서 보면 물감이 두껍게 굳어있는 부분도 보였다. 처음 보는 이는 이국적인 풍경 같다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무인도 같다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솔라는 저게 프랑스에서 되게 유명한 곳이라더라, 하는 설명을 꾹꾹 덧붙여줬다.
그래봤자 그림의 기법은 커녕 그 장소의 정확한 이름조차도 모르면서 '프랑스' 하나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야만 속이 풀렸더랬다.
제트는 한동안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인 채였는데 마치 무언가를 정확히 알아보려고 하는 이처럼 보였다. 트리 전구 빛이 액자 유리 표면에 반사되면서 그림 색이 미묘하게 흔들렸고, 그 빛이 제트의 얼굴에도 약하게 닿으며 완곡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사실 나 그림 보는 거 좋아하거든, 전시회 다니는 게 취미일 정도로."
솔라는 제트를 잠깐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 누가 그린 거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대답해 버린 셈이었다, 제피로스가 그린 거라고.
"제피로스?"
말을 꺼내고 나서야 솔라는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할 만큼 중요한 말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설명에 가까웠다. 집에 놓여 있는 물건을 설명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종류였다.
솔라의 끄덕임에 제트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가까이에서 보면 색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걸 알아차린 듯 했다. 처음엔 덩어리로만 보이던 캔버스 안쪽엔 옅은 노란색이 섞여 있었고, 파란색 아래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린 초록이 깔려 있었다. 물감이 마르면서 생긴 거친 표면도 빛에 따라 조금씩 달라보였다.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그림 되게 잘 그리신다."
감탄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말투였다. 솔라는 그 말을 듣고 웃었지만 사실 그게 정말 잘 그린 건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너무 오래 봐서 이제는 판단이 안되는 주관적인 쪽에 가까웠으니까. 그걸 이렇게까지 오래 바라보는 이는 별로 없었기에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보통은 잠깐 눈길을 두었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기 마련인데 제트는 마치 무언가를 천천히 더듬어가는 이처럼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제피로스가 떠올랐다. 제피로스도 가끔 저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곤 했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밤이 깊어 거실 불이 모두 꺼지고 작은 스탠드 불빛만 남아 있을 때면, 제피로스가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던 날들이 있었다.
사실 가까이서 보면 제피로스의 그림은 완전한 추상은 아니었다. 아래쪽에는 어둡게 번진 색이 넓게 깔려 있었고 그 위로 돌로 쌓은 건물처럼 보이는 형태가 겹겹이 올라가 있었다. 맨 위에는 가느다란 탑 같은 선이 하나 서 있었는데,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실수로 잘못 그은 선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예전에 제피로스가 장난처럼 말했던 적이 있었다.
언젠가 둘이 프랑스에 가게 된다면 꼭 같이 가고 싶은 곳이라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성 같은 섬이라면서, 물이 들어오면 길이 사라져서 완전히 섬이 된다고 했다. 이름이 조금 어려워서 그 때는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했고 솔라는 그냥 '그래요, 같이 가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기억 뿐이었다.
트리 전구가 느리게 깜빡이며 거실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자 솔라는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솔라, 나 잠깐 화장실 좀."
제트가 들어간 화장실 문이 닫히자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대화가 어딘가 애매하게 끊긴 채로 남아버렸고, 그림 이야기를 하다가 괜한 제피로스의 이름이 나왔던 것도 머릿속 한 쪽에 어정쩡하게 매달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굳이 다시 꺼내 생각할 만큼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수도 틀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가 다시 조용해졌는데 그 순간에도 거실 안에서는 트리 전구가 느리게 깜빡이는 것 말고는 딱히 움직이는 게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둘이 웃으면서 장식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 안이 비어버린 것처럼 조용해지니 괜히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리 밑에 떨어져있던 작은 오너먼트를 하나 주워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소파 위에 뒤집혀 있던 쿠션을 바로 세워 놓고,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스트레칭을 몇 번 하다가 문득 안방 문 쪽을 한 번 바라봤다. 낮에 반쯤 문을 열어둔 채로 약속을 나갔을 때와 동일한 상태였는데, 굳이 닫아둘 필요도 없었으면서 이상하게 그게 눈에 걸렸다. 솔라는 별 생각 없이 안방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문을 조금 더 밀어 열었을 때 방 안은 거의 어둡다시피 했다. 커튼이 반쯤 쳐져 있어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만 들어오고 있었는데, 솔라가 그쪽을 제대로 바라본 건 사실 몇 초쯤 지나서였다. 처음에는 그냥 방이 어둡다고만 생각했고 당연히 안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시선이 제대로 닿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침대 끝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솔라는 그대로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제피로스?"
목소리는 거의 날숨처럼 새어 나왔다. 앉아있는 실루엣이 너무 익숙한 탓에 오히려 처음에는 머릿속에서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있는 자세 같은 것들이 전부 어디선가 수없이 봤던 모습이라서, 한동안은 그게 진짜로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치만 분명 제피로스가 맞았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어도 솔라가 그걸 다른 용으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 낯선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왜 그렇게 놀라?"
훅 들어온 제피로스의 목소리는 매우 태연했다. 작정하고 놀래킨 게 분명한데 저리 물으니 솔라는 퍽 당황스러웠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어요?"
한참 전부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집에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없더라, 꽤 기다렸거든. 솔라는 눈을 한 번 찡그렸다. 놀란 심장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근데 왜 그러고 가만히 있어요. 놀라게."
"손님 오신 거 같길래. 방해될까 봐."
그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서 솔라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방해라니. 자기 집이면서도 방 안에만 가만히 앉아 있었던 모양이라 생각하니 이유 없이 짜증이 났다. 굳이 그렇게까지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솔라는 문간에 기대듯 서 있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켠이 조금 불편하게 울렁거렸다.
"말을 진작에 좀 하든가요."
심장 떨어지게 불 다 끄고 뭐하는 거예요, 귀신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완전히 화가 난 어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방금까지 남아 있던 놀람이 아직 조금 남아있어서인지, 짜증을 내려다가도 어딘가 어색하게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제피로스는 여전히 침대 끝에 앉아있었다. 아까부터 거의 자세도 바꾸지 않았다. 고개만 조금 기울인 채 솔라를 보고 있었다. 그게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보통 같았으면 진즉 밪받아치면서 방 안을 헤집고 뛰어다녔을 텐데.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다느니, 미안하지만 서프라이즈 대성공이라느니, 뭐 그런 식으로 말을 덧붙일 것만 같았는데 제피로스는 그냥 조용히 앉아있기만 했다.
솔라가 다시 입을 떼려는 순간 화장실 쪽에서 희미하게 문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거실 바닥을 밟는 소리에 솔라의 어깨가 미묘하게 굳었다. 방 안 공기가 갑자기 조금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솔라?"
물기 있는 손을 털던 제트가 보였다. 그제야 솔라는 쫑쫑 걸음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몸이 안방 문 앞을 은근히 가리는 모양이 되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서 있었다.
"제트, 나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생각해 둔 뒷말도 없이 튀어 나간 말이었다. 어, 그, 저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해서, 이제 슬슬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툭툭 끊어지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솔라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하나 정리하는 척 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장식을 조금 옮기고, 소파에 있던 담요를 접었다.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는 일들 뿐이었다.
"아 그래?"
제트는 의심 대신 늦은 시간까지 있어서 되려 미안하다며 급하게 가방을 챙겼다.
현관 불을 켜자 거실보다 조금 밝아졌다. 신발을 신는 동안에도 솔라의 시선은 몇 번이나 거실 쪽으로 돌아갔다. 안방 문은 여기서도 보였다. 다행히 반쯤 열린 채 그대로였고, 집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솔라의 인사말을 끝으로 현관문이 닫혔다.
"제트 보냈으니까 이제 빨리 좀 나와요."
현관 앞에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서 있다가 그렇게 말했다. 문 너머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리고 나서야 솔라는 몸을 조금 풀었다. 그제야 집 안 공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는 뭔가 숨을 참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안방 쪽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문틈 사이 어둠이 조금 움직이더니 제피로스가 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느슨해진 어깨로 문틀에 기대듯 서서 솔라를 한 번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방금 그 말 되게 내연남한테 치는 대사처럼 들린다, 그치.
솔라는 눈을 한 번 굴렸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방금 전까지 죄 없는 제트를 급하게 내보내느라 온갖 부산을 떨었던 게 생각나자 더 그랬다.
"제피로스가 숨겨진 남친처럼 그렇게 숨어 있었잖아요."
숨은 건 아니라며 제피로스는 숨도 안 쉬며 반박했고 질세라 솔라도 곧장 받아쳤다.
"그럼 뭔데요."
제피로스는 잠깐 생각하는 척 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타이밍 놓친 바보? 그 말투가 정말 바보처럼 들려서 솔라는 결국 피식 웃었다. 우당탕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금세 차분해졌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트리가 그대로 서 있었다. 전구 불빛이 여전히 깜빢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장식 상자가 열린 채 놓여 있었고 리본 몇 개는 트리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옆에 있었던 흔적이 잔뜩 남아있던 것이다.
솔라는 테이블 위에 있던 장식을 괜히 한 번 만지작거렸다. 손에 잡히는 걸 만지지 않으면 어딘가 어색할 것 같았다. 제피로스의 시선이 거실을 한 번 훑고 지나가는 게 솔라에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피로스랑 매년 같이 만들던 거니까 준비한 건데, 옆에 없길래."
공기의 흐름을 슬슬 읽더니 솔라가 잽싸게 선수를 쳤다. 말은 툭 내뱉어놓고선 손에 쥐고 있던 장식을 괜히 한 번 더 굴렸다. 제피로스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트리를 한 번 바라봤다. 가지 사이에서 깜빡이던 전구의 색을 따라 제피로스의 낯빛이 붉으락 푸르락 변했다. 결국에는 예쁘게 잘 만들었네, 하는 말이 조용히 뒤에 붙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끝나기 전에 오긴 왔네요, 안 올 줄 알았는데. 내가 많이 보고 싶다고 맘속으로 소원 빈 거 들었나 봐?"
"내가 산타야? 그걸 어떻게 들어. 그냥 내가 너 보고 싶어서 온 거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솔라는 괜히 고개를 숙인 채 트리 아래쪽만 바라봤다. 웃어 보일 타이밍은 지나간 것 같아서였다. 나도 바보가 됐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니 그것도 어색해서, 결국 어깨를 조금 으쓱했다.
"나도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
못 들었다길래, 알아두라구.
괜히 쭉쭉 뻗은 가지들만 쓰다듬던 솔라의 뺨은 전구 빛이 반짝이지도 않았는데 잔뜩 붉었다. 제 주변을 빙빙 알짱대는 모습에, 그제야 제피로스가 정말 제 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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