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버리겠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거실은 이미 희미하게 밝아져 있었다. 겨울 아침 특유의 허연 빛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어 바닥 위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 솔라는 한동안 눈만 끔뻑였다. 몸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앉은 자세 그대로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뻐근한 팔을 들어 천천히 몸을 펴며 주변을 둘러보니 텔레비전 화면이 켜져 있었다. 채널을 돌리던 제피로스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으며 그랬던 것 같다, 뉴스 같은 건 보기 싫다고. 그랬으니 또 진부한 미드나잇 인 파리나 골랐겠지.
화면에선 프랑스의 밤거리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젖은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지고 오래된 건물 사이로 자동차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달렸다.
솔라는 리모컨을 찾지도 않은 채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이 어땠는지, 언제부터 틀어놓고 있었는지 같은 건 이미 너무 익숙해서 굳이 기억해 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젯밤 자신이 언제 눈을 감았느지, 정확히 어떤 얘기를 하다가 잠들었는지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있는 것 같다가도 막상 붙잡으려고 하면 흐릿하게 흩어졌다. 고개를 뒤로 기대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제 무슨 얘기했더라."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냥 영화가 흘러가듯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저 주인공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어떨 것 같냐고. 익숙한 목소리에 솔라가 번뜩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엔 냉장고 문을 쿵 닫으며 거실로 들어오는 제피로스가 있었다.
방금 일어난 것 같은 비주얼에 손에는 물병이 들려 있었다.
"진짜 이슬만 먹고 사시네요 공주님. 냉장고 꼴이 저게 뭐야, 전기세 아까워. 난 과거로 돌아간다면 말이야, 저 냉장고를 한우로 가득 채워버릴 거야."
"갑자기?"
제피로스는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제 배를 살살 쓸어내렸다. 그래야 지금 당장 내가 배고픈 이유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솔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같이 가서 사 오면 되잖아요."
제피로스는 물병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뭐야, 지금 사 오면 과거로 돌아가는 의미가 없잖아. 솔라는 소파에 몸을 파묻듯 기대며 피식 웃었다.
화면 속 파리는 여전히 밤이었다. 젖은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졌고, 자동차가 천천히 지나가며 그 빛을 끊어 놓을 때마다 간판들은 낡아갔고 옷차림이 변해갔다. 영화는 그렇게 조용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말이야, 제피로스 프랑스로 절대 안 보내. 유학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했을 거야. 그냥 여기 있으라고. 멀리 가지 말라고. 우리가 떨어져 지냈던 그 시간이 너무너무 괴로우니까. 시차라는 게 사람 열받게 만드니까. 그러니까 정말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제피로스 꿈 다 망치는 거죠 뭐."
제피로스는 폭 꺼진 솔라의 정수리를 제 검지로 통통 두들기더니, 솔라의 몸이 들썩일 만큼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소파로 다이빙 했다.
"망치긴 뭘 망쳐.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 솔라 네가 망친 건 오늘의 아침밖에 없으세요."
-
솔라는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잠깐 이어졌다가 끊겼다. 거실 창문 너머로는 어느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골목은 이미 하얗게 덮여 있었다. 주차된 차 위에도 눈이 얇게 쌓여 있었고, 담벼락 위로도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던 탓에 눈송이들은 허공에서 잠깐 멈춰 있는 것처럼 천천히 떨어졌다. 단순히 아침이라기보다는 아직 덜 깬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눈이 발등을 덮을 만큼 쌓였을 때 쯤 솔라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거실로 나왔다. 턱끝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제피로스가 창문 앞에 서 있는 걸 보더니 별 생각 없이 그 옆으로 다가갔다.
"헐, 눈 진짜 많이 왔네."
그 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솔라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소리가 크게 울리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거실에서는 금방 눈에 띄었다. 솔라가 화면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포폰이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오늘 뭐 하냐?
솔라는 제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제피로스에게로 향했다. 반대 손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고선 제 손가락으로 제피로스의 어깻죽지를 쿡쿡 찔렀다. 우리 마트 갈까? 소리를 내뱉는 대신 입 모양으로 한참을 떠들었다. 핸드폰을 멀리 떼어놓거나 음소거를 하면 끝날 일인데도 굳이 입만 오물쪼물 움직이기 바빴다.
제피로스는 모스부호보다도 읽기 어려운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땡그랗게 뜨고서 솔라의 말간 얼굴을 한참 바라보아야만 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입술만 움직이는 용을 보면 누구라도 잠시 멍해지기 마련이었다. 제피로스의 시선이 솔라의 입가에 머물렀다. 다시 한 번 같은 입 모양이 반복됐다. 그제야 이해한 모양이었다. 둥근 눈꼬리가 살짝 접히며 말없이 고개가 한 번 끄덕여졌다.
"나? 그냥."
잠깐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제피로스랑 장 보러 가려고."
핸드폰 너머가 조용해졌다.
솔라는 그 정적을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이미 창가 쪽으로 가 있었다. 제피로스는 창틀에 몸을 반쯤 기대 서 있었다. 특별히 뭘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눈에 먼저 들어오는 자세였다. 솔라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오래 본 얼굴인데도 가끔 저렇게 새삼스럽게 보일 때가 있었다.
창밖을 보고 서 있는 얼굴이 유난히 다정해 보였다. 솔라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괜히 오래 보고 있으면 티가 날 것 같아서였다.
핸드폰 너머에서 포폰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무슨, 누구? 뭐라고? 같은 말이 빠르게 튀어나왔지만 그새 솔라는 제 어깻죽지에 핸드폰을 대충 끼워둔 채로 코트랑 패딩을 두 손으로 저울질하느라 바빴다. 두 벌을 번갈아 들어 올려 보다가 잠깐 멈췄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피로스 쪽으로 향하자 제피로스는 솔라가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금방 알아채곤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어때요? 아니면 요거? 하나씩 들어 올리며 입 모양으로 그리 물었다. 제피로스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솔라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코트를 한 번, 패딩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눈을 가늘게 접었다.
"패딩."
짧은 대답이었다.
엉거주춤 패딩을 걸치면서도, 지퍼를 턱 끝까지 끌어 올리려다 멈칫하면서도 솔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진짜 이거요? 왜지."
"왠지 그게 더 너다워 보여. 동글동글, 귀엽잖아."
꼭 누군가를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게 또 싫진 않아서 비죽비죽 웃었다.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린 뒤 소매를 한 번 털었다. 거울도 보지 않았는데 괜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작이었다. 그동안 수화기 너머에서는 포폰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솔라는 그걸 반쯤 잊고 있었다. 핸드폰이 어깨와 귀 사이에서 조금 미끄러져서 손등으로 다시 밀어 올렸다.
"야, 미안. 내가 지금 바빠서.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포폰의 반응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화면을 눌러 통화를 끊고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거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제피로스가 창가에서 몸을 떼고 천천히 걸어왔다. 발걸음이 급하지 않았다. 특별히 서두르는 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솔라는 그걸 잠깐 바라보다가 괜히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나갈까요?"
현관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제피로스가 솔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패딩이 어깨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퍼는 턱 끝까지 올라와 있어서 그랬나. 그걸 한 번 보더니 한바탕 웃고 나서야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버스 타고 갈 거지? 밖에 엄청 추워. 솔라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말이 먼저 나가고 나서야 잠깐 멈칫했다. 제피로스의 시선이 그대로 솔라의 얼굴에 머물렀다. 왜냐는 질문이 따라올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물었다. 솔라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유를 설명하려다 말아버린 이처럼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별로 멀지도 않고, 답답하잖아요. 오늘 같은 날 다른 용들이 얼마나 많이 타겠어, 아으으."
마지막에는 괜히 몸까지 한 번 부르르 털었다.
"아으으, 추워."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끌어 올렸는데도 찬 공기가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솔라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걸었다. 방금 막 밟힌 눈이 운동화 밑창에 들러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길가에 쌓인 눈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지만 몇 걸음만 옮겨도 발등이 금세 젖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그냥 대중교통 타자니깐."
제피로스는 솔라보다 반걸음쯤 뒤에 있다가 이내 보폭을 맞춰 나란해졌다.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대신 패딩 소매끼리 스칠 듯 말 듯한 간격만이 계속 유지됐다.
솔라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입김이 허옇게 번져 나가는 걸 한 번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별안간 떠오른 것처럼 물었다.
"프랑스는 어땠어요, 거기도 한국만큼 춥나?"
솔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고개를 조금 돌렸다. 바로 제피로스의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 대신 발끝을 내려다본 채 몇 걸음 더 걸었고 제피로스도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닥 춥진 않은데 비만 푸지게 와서 맨날 맞고 다녔어. 거기 애들은 우산도 안 쓰더라."
말투가 특별히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제야 제피로스의 옆태를 슬쩍 바라보니 정말 실망했었다는 듯해 보여서 찬 공기에 얼얼해진 제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한참 웃었다.
"그래도 유럽이니까 볼 거 많았을 텐데."
"수업 끝나면 주구장창 미술관이나 다녔어. 볼 건 거기에 다 있으니까."
참으로 제피로스다운 대답이었다. 솔라가 속으로 그려 두었던 대답이 그대로 제피로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젠가 물어보면 분명 그렇게 말하겠지 싶었던 말이었다.
"참 제피로스답다."
"뭐가?"
"그림 얘기밖에 안 하는 거요."
제피로스는 한참 웃었다. 숨이 가볍게 새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치만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제피로스에게 여행이란 결국 미술관 사이를 옮겨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아침에 문 여는 시간 맞춰 들어갔다가 용들이 빠져나가는 시간까지 버티는 날도 있었고, 한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음 전시실로 넘어가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다가도 두 번, 세 번 다시 돌아와 보는 일이 많았다. 같은 그림 앞에 서서 색이 어떻게 겹쳐 있는지, 붓 자국이 어느 방향으로 남아 있는지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직원이 슬쩍 지나가면 그제야 조금 물러나는 식이었다.
솔라는 그 이야기를 예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프랑스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전화 너머로 제피로스가 미술관 얘기를 한참 늘어놓던 밤이 있었다. 어디를 봤다기보단 어떤 그림을 봤고, 어떤 색이 특이했고, 어떤 붓 자국이 생각보다 거칠었다는 식의 감상평들. 솔라는 솔직히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제피로스가 제 맘에 드는 그림을 설명할 때 말을 하다가도 갑자기 생각난 감상들을 멋대로 덧붙이고, 그러다가 저도 웃겼는지 폭소가 터져버리는 목소리가 자장가보다도 듣기 좋아서.
가끔은 솔라가 먼저 잠에 들기도 했다. 이어폰이 귀에서 빠진 채로 베개 옆에 굴러다니는 날도 허다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훨씬 긴 통화 기록이 남아 있을 때도 있었는데, 제피로스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괜찮다며 넘겼다.
근데 너 코 엄청 골더라, 하는 농담이 가끔 날아오면 그 날엔 눈을 부릅 떠가며 꼬박 날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다.
제피로스는 원래 그런 용이었다. 뭘 좋아하는지 너무 분명해서 가끔은 다른 이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학창 시절 때도 그랬다. 교과서를 펼쳐 놓고도 연필은 늘 다른 데서 움직이고 있었다. 페이지 가장자리나 노트 귀퉁이에 선이 하나씩 늘어났다. 용의 얼굴이기도 했고, 그냥 둥근 윤곽선이기도 했다.
제대로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손이 심심해서 끄적인 낙서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점심시간에 다가온 솔라가 몰래 그걸 들여다보면 제피로스는 늘 종이를 슬쩍 접어 버리곤 했다.
이거 저예요?
제피로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깨만 미세하게 으쓱일 뿐이었다.
저 가져도 돼요?
낙서를 뭐하러 가져? 나중에 내가 기깔나게 그려줄 테니까 그건 그냥 버려.
제피로스의 말 따라 몇 번이나 버리려고 했다. 솔라는 원래 그런 용이었다. 책상 위에 쓸데없는 것들이 남아 있는 걸 잘 못 견뎠다. 쪽지든 매모든 쓸모가 끝나면 바로 접어서 쓰레기통에 넣는 편이었다.
가방 속도 늘 비슷했다. 하루가 지나면 쓸모없는 종이는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제피로스가 그린 것들만은 그게 잘 안됐다. 그래서 아직도 집 어딘가에는 그런 종이들이 남아 있었다. 스케치북도 아니고 제대로 된 그림도 아닌 것들. 교과서 종이에 끄적인 얼굴, 노트 귀퉁이에 남아 있는 연필 선, 시험지 뒤에 대충 그린 동그라미까지. 제피로스는 아마 그걸 전부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집엔 아직도 제피로스 그림이 한가득이에요, 낙서까지 전부."
낙서 얘기에 제피로스는 여태 그걸 가지고 있냐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짜 버리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것처럼. 솔라는 패딩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뒀던 차가운 손가락을 찬찬히 문질렀다. 낙서들을 한데 모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처음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던 선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눈이 조금 더 크게 그려진 얼굴, 괜히 한 번 더 덧칠된 눈동자 같은 것들. 제피로스는 아마 아무 생각 없이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종이들을 넘겨보다 보면 제피로스가 무엇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너무나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걸 어떻게 버려요."
솔라의 말에 제피로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멋쩍은 웃음을 뱉었다.
"아니 그건 진짜 너무 대충 그렸으니까..... 쪽팔려서 그렇지, 이젠 훨씬 잘 그리는데."
"집 벽에 걸려 있는 제피로스 그림 볼 때마다 그건 인정."
제피로스의 입가에 웃음이 조금 더 번졌다. 어떤 걸 말하는 건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아는 얼굴이었다. 솔라는 잠깐 주머니 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 때 그거 그리면서 제피로스가 그랬잖아요, 나중에 여기 가자고.
"우리 다음엔 거기 꼭 같이 가요."
제피로스의 대답 대신 발 밑의 눈이 뽀드득 눌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제피로스는 솔라를 한 번 바라보다가 시선을 조금 비껴 돌렸다.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는데 어딘가 잠깐 멈춰 선 용 같은 표정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잠깐 고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괜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피로스는 한 번 더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남들이 보면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
연말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집 안의 시간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장을 봐 온 것들로 저녁을 간만에 차려 먹고 설거지를 마치자 할 일이 금세 사라졌다. 솔라가 바닥에 대충 몸을 눕히자 제피로스도 옆에 비슷한 모양으로 누웠다.
둘 사이는 팔 하나 정도의 간격이 남아 있었다. 오래 함께 지낸 용들 사이에서는 가끔 그런 거리가 생겼다. 일부러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까이 붙어야 할 이유도 없는 거리.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손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솔라는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은 밤이 되면 조금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낮 동안에는 전화가 울렸고, 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밀려들어 오는데 밤이 되면 그런 것들이 갑자기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숨을 고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괜히 마음을 풀어놓게 되는지도 몰랐다. 낮에는 별것 아닌 일들이 밤이 되면 괜히 생각나기도 했고, 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일들이 갑자기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솔라는 그런 시간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라는 건 생각보다 귀한 것이었다.
한참 후에 고개를 돌리자 제피로스와 눈이 맞닿았다. 언제부터 저렇게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피로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여다보는 눈은 아니었다. 이미 너무 오래 알고 있는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는 이의 시선에 가까웠다. 오래 본 이의 얼굴이라는 건 묘했다. 분명 익숙한데도 가끔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예전에 알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조금씩 겹쳐 보이기도 했고, 그 사이에 훌쩍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문득 또렷해지기도 했다.
그치만 유독 제피로스의 얼굴은 그런 겹침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어느 시간대에 고정축을 박아둔 용마냥 예전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웃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면 더 그랬다. 유난히 앳된 얼굴이었다.
솔라도 굳이 먼저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잠깐 받아 두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오래 바라봐지는 일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나이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제피로스가 저렇게 보고 있으면 결국엔 멋쩍은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왜 그렇게 빤히 봐요?"
제피로스는 눈을 한 번 느리게 깜빡였다.
"그냥."
설명 같은 건 없었다. 제피로스는 가끔 제 생각을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말로 설명하는 순간 괜히 가벼워지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아는 이처럼 굴었다. 그래서 솔라도 더 묻지 않았다. 어떤 말들은 굳이 설명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충분했으니까.
"우리 내년엔 뭐 할래요? 저는 일단 학교도 다녀야 하고, 틈틈이 전시회도 좀 보러 다닐까 해요. 제피로스가 그림 설명해 주면 저도 아는 척 좀 하고 싶어서."
잠시 생각하다가 떠오른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프랑스도 가야 하잖아요, 우리. 바쁘네 바빠."
말을 하고 나서야 괜히 웃음이 났다. 내년이라는 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용들은 늘 그렇게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마치 이미 거기에 도착해 있는 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약속을 하고, 거기에 이런 저런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해두면 정말로 그런 시간이 금방 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솔라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옆을 돌아봤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엔 왜 그림 안 그려요?"
잠깐의 공백이 있었다. 제피로스는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질문을 들으면 곧장 대답하기보다 잠깐 생각을 고르는 용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사이가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솔라는 괜히 바닥에 손가락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다 뒤늦게, 최근에도 그렸다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진즉 그렸는데 솔라가 아직 못 본 것 뿐이라고 덧붙였다.
제피로스는 원래 그림을 그려 놓고도 굳이 먼저 보여주지는 않았다. 다 완성되기 전까지는 괜히 보여주기 싫다느니, 아직 마음에 안 든다느니 하면서 어디 한 쪽에 밀어두기 일쑤였다.
"뭐야, 또 어디 숨겨놨어요?"
제피로스는 고개를 찔끔 기울였다. 원래 숨겨 두는 편이긴 한데 이번에는 굳이 꽁꽁 숨긴 건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냥 네가 확인을 안 했을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솔라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언젠가는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시간이란 게 대개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특히 12월의 마지막 날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흘러갔다. 낮 동안에는 그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밖에서는 연말이라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지만 집 안에서는 그런 기색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연말 방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 용들은 괜히 목소리를 높여 웃고 있었고 솔라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그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한 해를 정리하는 이야기가 몇 번이나 반복됐고 자막에는 곧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말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벌써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용들은 미리부터 들떠 있는 얼굴이었다.
솔라는 리모컨을 손에 쥔 채로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채널을 바꿀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그렇다고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팔을 느슨하게 소파 등받이에 걸친 채, 화면 쪽을 보는 건지 아닌지도 모를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던 제피로스가 생뚱맞게 말을 꺼냈다. 요즘 너무 지쳐보인다고. 목소리는 별다른 힘이 없었다. 그냥 떠오른 생각을 툭 던진 것 같은 말투였다.
솔라는 처음에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처럼 화면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다 몇 초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저요?"
제피로스는 같은 말을 한번 더 하는 대신 솔라를 잠깐 바라봤다. 그냥 그렇게 보였댔다. 솔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모컨을 손 안에서 한번 굴리다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누구 관찰하는 취미가 생겼대요? 그냥 피곤한 날도 있는 거지."
뭐가 그리 심각하냐는 식이었다.
"괜찮은 거 맞아?"
제피로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랬다. 가끔 말을 하다가도 중간에 멈추는 일이 많아졌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별 것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괜히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나중에 자기 없으면 어떻게 살려나, 걱정된다고.
제피로스가 한 문장을 뱉을 때마다 솔라는 입을 까드득 깨물었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잘 쌓아왔던 응어리들이 역류하기 직전이었다. 결국 죄고 있던 리모컨을 툭 소리가 날 정도로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제피로스가 이렇게 만들어놓고 왜 이제 와서 걱정해요? 다 제피로스 때문이잖아. 맨날 쥐도 새도 모르게 혼자 나가버리니까 이젠 눈 감는 것도 무서워. 그래서 자꾸 잠에서 깨고, 또 깨고.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겠고. 문자 하나 남기고 가면 되는 거잖아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
"그래 놓고 한참 있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다시 들어오고. 나만 괜히 바보처럼 휴대폰 들여다보고 있고, 그래서 자꾸 잠에서 깨요. 한 번 깨면 괜히 생각나고. 지금도 어디 나간 거 아닐까 싶어서 눈 떠보고. 옆에 없으면 또 괜히 기분 이상해지고.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걱정된다고 하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
"나 제피로스 없으면 못 사는 거 알면서. 내가 얼마나 더 버텨야 되는데요."
말이 거기까지 쏟아지고 나서야 솔라는 숨을 한 번 고르듯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용들이 떠들고 있었지만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했다. 화면 아래에서는 카운트다운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툭툭 끊기는 호흡을 들이마시며 솔라가 물었다.
"제피로스, 혹시 저랑 헤어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제피로스는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얼굴인지 솔라는 굳이 읽어보려 하지 않았다.
"대답해요. 이번엔 제피로스 말대로 할 테니까."
솔라는 괜히 손가락을 한 번 움켜쥐었다가 폈다. 아까까지 쏟아냈던 말들이 아직 가슴 안쪽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숨이 조금 거칠게 이어졌다. 그 때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난 너랑 헤어지기 싫었어."
잠시 숨이 고였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때도, 지금도."
동시에 텔레비전이 요란해졌다. 화면 아래에서 숫자가 막 0으로 바뀌고 있었다. 용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고 폭죽 소리가 터졌다. 누군가는 서로 껴안고 있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어 폭죽을 찍고 있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새해가, 스물넷이 그렇게 허무하게 성큼 다가왔다. 그 말인 즉슨 이제 제피로스를 처음 만난 지도 꼭 십 년이 됐다는 거였다. 숫자로만 보면 꽉 꽉 들어찬 느낌인데 막상 떠올려 보면 그 사이가 어딘지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학교 복도에서 처음 마주쳤던 날이 아직도 손에 잡힐 것처럼 또렷한데, 그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끼어 있었다. 우린 아직도 어린 학생 같은데. 그 때랑 크게 달라진 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시간만 혼자 앞으로 가 있는 것 같았다.
십 년이라는 말이 갑자기 벅차게 느껴졌다. 시간이라는 건 가끔 그렇게 움직였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계단 몇 개를 한 번에 올라와 버린 것처럼 멀리 와 있는 기분.
"......미안해. 제피로스, 미안해요.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니에요, 알잖아. 순간 짜증나서 그랬어요. 내가 나빴어."
사과를 쏟아낸 솔라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텀이 길어졌다. 숨이 전부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힘이 풀렸다. 솔라는 무너지듯 앞으로 엎어졌다. 소파 위에 무릎을 끌어올리고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얼굴이 팔 위로 묻혔다. 조금만 더 가만히 있으면 어딘가 더 깊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제피로스, 내 손 잡아 줘."
말을 꺼내고 나서 솔라는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들이 버거워서 그랬다.
제피로스가 손을 조금 움직였다. 소파 위에 느슨하게 놓여 있던 손이 천천히 솔라 쪽으로 미끄러져 오더니 솔라의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얹혔다. 손바닥이 겹치자 미적지근한 온기가 손끝에 고였다. 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조금 더 움켜쥐고선 턱을 파묻었다. 눈을 감을 생각은 없었는데 시야가 천천히 흐려졌다.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제피로스는 한동안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웅크린 솔라의 등뼈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 움직임을 가만히 따라보다가 시선을 내려뜨렸을 땐 조금 전까지 잔뜩 구겨져 있던 표정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무릎 위에 파묻힌 볼이 둥글게 올라와 있었다. 아까까지 투덜거리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울먹거리며 말을 쏟아냈던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살짝 벌어진 입 틈새론 숨이 느리게 새어 나왔다.
잠이 들면 솔라의 얼굴은 왜인지 늘 조금 어려 보였다. 어려 보인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앳됐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왔는데도 이렇게 잠들어 있는 얼굴은 옛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더 오래 바라보게 됐다.
제피로스가 손을 조금 더 고쳐 잡았다. 손바닥 안에 들어온 손이 생각보다 작았다. 손가락 끝을 맞대 보았다가 하나씩 천천히 맞물렸다. 괜히 힘을 주지는 않았다. 간만에 깊게 잠든 솔라를 깨우고 싶진 않았다. 솔라를 따라 눈을 감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너는 벌써 스물넷이 됐구나, 내 눈에는 아직도 네가 열네살짜리 어린아이 같은데.
"혼자 둬서 미안해, 솔라."
-
창문을 뚫고 길게 들어오는 햇빛에 못 이겨 눈을 떴을 땐 이미 한낮이었다. 밤새 켜져 있던 텔레비전 화면은 이미 까맣게 식어 있었다. 방송이 끝난 뒤의 정적이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몸을 웅크린 자세 그대로 잠이 들었던 탓인지 목이 조금 뻐근했다.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한 번 바라봤다. 머릿속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옮겼을 땐 어깨 위로 덮인 담요가 반쯤 흘러내려있었다. 솔라가 잠든 후에야 덮인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또 어디 갔어 진짜 짜증 나......"
소파 위에 남아 있는 온기 같은 걸 확인하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솔라는 담요를 어깨 위로 다시 끌어올렸다가 이내 발끝 쪽으로 툭 밀어냈다. 괜히 덮고 있을 필요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에서 막 깨어난 용 특유의 흐릿한 짜증이 가볍게 올라왔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잠깐 나갔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오는 날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오는 날이 태반이었으니 솔라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쓰는 쪽이 오히려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다는 듯이 지나갈 줄 알았던 하루였다. 솔라는 솔라는 저녁이 가까워질 때 까지 집 안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괜히 부엌을 한 번 정리했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가, 다시 소파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휴대폰 화면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제피로스에게서 온 메세지는 없었다. 대신 다른 이름들이 조금씩 쌓였다.
별 뜻 없는 말들이었다. 잘 지내냐는 말, 오늘 뭐 하냐는 말, 새해 인사 같은 것들. 솔라는 그걸 읽고도 한동안 답장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러다 결국 짧게 몇 글자만 남겼다. 별일 없다고. 그냥 집에 있다고.
창 밖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달라지고 골목에 쌓여있던 눈이 더 녹아내릴 때도 솔라는 여전히 집 안에 있었다. 나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잠깐 편의점이라도 다녀올까 싶다가도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여전히 비어 있는 집이 저를 반길까 봐 두려워서.
휴대폰 화면에는 어느새 메시지가 몇 개 더 늘어있었다. 제트가 한 번 더 보낸 안부였고, 포폰이 남긴 짧은 전화 기록도 하나 있었다. 솔라는 그걸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화면을 꺼버렸다.
대신 문 쪽을 몇 번이나 바라봤다. 문득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발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으면 고개를 번쩍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솔라는 그럴 때마다 피식 웃었다. 자기가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사람 발소리처럼 들리고 위층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도 괜히 현관 앞 발걸음 소리처럼 들리는 걸 어떡해.
"온갖 소리는 다 들리면서 내 목소리만 안 들렸나? 이건 그냥 나 무시하는 거 아니냐?"
솔라가 현관문을 열자 제 눈높이에서 떠돌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포폰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모양이 조금 우스웠다. 항상 정갈했던 애가 숨을 몰아쉬면서 어깨를 조금 들썩이고 있었다. 방금까지 문을 두드리다 말고 그대로 굳어 버린 이처럼 손도 어정쩡한 높이에 떠 있었다.
솔라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며칠 만에 익숙한 용의 얼굴을 보는 기분이 낯설었다.
"야, 나 진심 실종신고 각 재고 있었거든?"
포폰은 솔라를 한 번 훑어봤다. 눈 밑이 조금 내려앉아 있었다. 솔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포폰의 시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솔라의 어깨 너머로 넘어갔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거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파 위에는 담요가 반쯤 흘러내린 채 구겨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컵 안쪽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 둔 양말이 한 짝 떨어져 있었고 텔레비전 리모컨은 소파 아래로 미끄러져 있었다. 며칠 째 그대로인 것 같은 모양이었다.
솔라는 학교에서도 책상 위에 종이 한 장 어지럽게 두지 못하던 애였다. 뭐 하나 쓰고 나면 바로 접어서 버렸고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걸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던 애였다.
그래서 포폰은 더 오래 말을 잃었다.
집 안에 용이 사는 기척은 있었는데 생활의 모양은 아니었으니까.
"신고 버튼이 112가 아니라 119 쪽이었네."
이게 용이 사는 집이냐고.
포폰은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이 뒤에서 느리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용 둘이 서 있느라 꽉 들어찬 현관인데도 어딘가 빈 것처럼 느껴졌다. 용이 산다는 건 대게 비슷한 모양을 남겼다. 아침에 마신 컵, 아무렇게나 벗어둔 외투, 잠깐 내려놓은 물건들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았다. 누군가가 치우거나, 아니면 또 다른 움직임이 그 위에 덮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솔라의 집 안에는 그다음 동작이 없었다. 한 번 멈춘 순간이 그대로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며칠 째냐 지금?"
"모르겠네. 아직 일주일은 안 넘지 않았어?"
"내가 네 칩거 생활 날짜까지 세줘야 하니."
"금방 연락도 하려고 했어, 제피로스 오면......"
"뭐라고?"
"원래 그러잖아. 말도 없이 나가고. 며칠 있다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겠지. 날 들들 볶아 아주 그냥."
솔라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포폰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한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포폰은 입을 야금야금 앙다물었다. 사실 전에도 폭탄 맞은 듯한 솔라의 집구석 상태를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 며칠 동안 집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낸 흔적 같은 것들. 그래서 더는 오래 침묵하지 못했다.
"야, 솔라. 정신 차려. 벌써 2년 전이야."
"뭐가?"
"뭐긴 뭐야, 돌겠네 진짜."
"네 제피로스 사고 난 거, 2년 다 되어간다고."
잔잔히 흐르듯 튀어나온 포폰의 말 뒤로 침묵이 방 안을 천천히 채웠다. 귀는 분명히 소리를 받아들였는데 머리는 그걸 의미로 바꾸지 못한 채 한동안 같은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솔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시선이 한 번 허공을 스쳤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방 안의 사물들이 전부 조금씩 낯설어 보였다. 소파, 테이블, 벽에 걸린 그림, 바닥에 굴러다니는 양말 한 짝 까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눈에 들어오던 것들이 갑자기 다른 장소에 놓여있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 뭐래."
솔라의 입에서 겨우 한 마디가 떨어졌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이상한 톤이었다. 그 말은 포폰을 향한 것 같기도 했고 방금 들은 문장을 밀어내려는 혼잣말 같기도 했다.
"제피로스 금방 온다니까."
말하면서도 시선은 포폰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대신 현관문 쪽으로 한 번 미끄러졌다. 그 방향은 요 며칠 동안 솔라의 눈이 가장 자주 향하던 곳이었다.
용이 집 안에서 가장 오래 바라보게 되는 장소라는 게 꼭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용에게는 대개 문이 그런 곳이었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발소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것 같아서, 괜히 시선이 그 쪽으로 계속 향하는 자리.
"제피로스 원래 그러잖아. 말도 없이 나가서 내 속 다 터질 때 쯤 돌아오는 거. 지금도 어디 갔겠지. 괜찮아, 곧 올 때 됐어."
말이 이어질 수록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용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여러 번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확신이 부족할 때 같은 문장을 계속 꺼냈다. 솔라의 말도 그랬다. 포폰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대신 솔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이의 표정이었다.
화를 내야 하는지, 아니면 더 천천히 말해야 하는지. 그 사이에서 잠깐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솔라, 이제 그만해."
포폰의 말이 솔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방 안의 공기가 아주 천천히 식어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솔라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눈썹만 약간씩 들썩였다. 포폰은 그 행태를 더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너 박스도 안 열어봤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솔라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떤 기억이 머릿속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지만, 물속에 돌을 던졌을 때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기포처럼 금방 사라지고야 말았다.
포폰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현관을 지나 거실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갔다. 솔라는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포폰이 어디로 가는지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포폰은 거실 끝, 벽 앞에 놓인 작은 상자 앞에서 멈췄다. 다른 물건들에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완전히 숨겨진 건 아니었다. 다만 몇 달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물건인지라 먼지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거."
솔라의 시선이 상자 위에 멈췄다. 그건 분명히 처음 보는 물건이 아니었다. 몇 개월 전 택배 상자 몇 개가 한꺼번에 도착했을 때 그 중 하나였던 것도 기억났다. 그 날은 유난히 정신이 없었고 누군가 대신 정리를 해줬던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한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박스인지조차 까먹은 건 아니지?"
솔라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상자 위에 가 있었다. 어떤 물건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무엇인지보다 그 물건이 거기에 놓여있게 된 시간부터 떠올리게 된다. 솔라에게 그 상자는 그런 종류였다.
분명 한 번은 손에 들었고, 한 번은 눈으로 확인했고, 어딘가에 내려놓았던 기억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 장면이 이어지지 않았다. 상자를 어디로 옮겼는지, 누가 치웠는지, 언제 저기까지 밀려났는지 같은 것들이 전부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사이만 흐릿했다. 마치 어떤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나간 책처럼.
솔라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시선이 천천히 상자를 훑었다. 모서리에 쌓인 먼지, 접힌 택배 테이프, 위쪽이 약간 눌린 종이 상자의 모양까지. 집 안에서 시간이 흐르면 보통 물건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인데 그 상자만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있었다.
"..... 몰라. 열어본 적이 없어."
포폰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도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대신 상자를 한 번 내려다봤다. 손바닥으로 먼지를 살짝 쓸어내렸다. 얇게 쌓여있던 먼지가 허공에 조금 떠돌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네가 꼭 열어봤음 좋겠어, 더 늦기 전에."
프랑스에서 온 거니까.
솔라는 그걸 한참 바라봤다. 손을 뻗지 않아도 충분히 열 수 있는 거리였는데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전혀 몰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뚜껑이 닫혀 있는 동안에는 그 안의 것들도 아직 현실이 아니었다. 상자를 열어버리는 순간 그 안에 들어 있던 시간들까지 전부 밖으로 나오게 될 것 같았다.
솔라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별것 아닌 종이 상자 하나였는데도 손끝이 무거웠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는 일보다 확인하고 나서 다시는 닫을 수 없게 될 것들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포폰은 더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집 안은 조용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웅웅 울렸다가 멎었다. 그 사이에서 솔라의 시선이 다시 상자 위로 떨어졌다.
결국 손을 뻗어 뚜껑을 들어 올리자 종이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상자 안에는 물건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스케치북 몇 권, 연필이 가득 든 필통, 낡은 노트, 화구통 같은 것들. 솔라는 그걸 한참 내려다봤다.
그 물건들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누가 쓰던 물건인지, 어느 손을 거쳤는지, 그걸 바라보는 용들 둘 다 이미 알고 있었다.
솔라는 손을 넣어 맨 위에 놓인 노트를 꺼냈다. 몇장 넘겨봤다가 내려놓았다. 스캐치북도 한 번 들어올렸다가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넣었다. 그 안에는 익숙한 선들만 있었다. 제피로스가 무심하게 끄적이던 선들. 용의 얼굴 같기도 하고, 그냥 윤곽선 같기도 한 것들.
손이 다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맨 아래에서 얇은 캔버스 하나가 걸렸다. 종이가 아니라 캔버스였다. 잠깐 멈칫했던 엔젤은 천천히 들어 올렸다.
캔버스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단순한 연필 낙서 같은 게 아니었다. 물감이 여러 겹으로 얹혀 있었다. 붓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색이 겹친 자리가 깊었다. 당장 전시회에 걸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공들여 그린 그림이었다.
창으로 넘어오던 햇빛을 받자 그림의 색들이 찬찬히 드러났다. 처음에는 평범한 풍경처럼 보였다. 창가와 햇살, 의자 하나, 여름빛이 들어오는 창틀 같은 것들. 조금 더 가까이 들어 바라본 순간에야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어린 용의 옆모습. 어깨선이 조금 말려 있었다. 유난히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은 그 어린 용의 실루엣이었다. 그 용의 특징 하나하나 따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모양새였는데, 그게 전부 한 데 모여 있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렇다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조금 더 가는 어깨와 덜 자란 아이 특유의 얄쌍한 몸 선. 무릎을 끌어모은 채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 점인지 먼지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눈가 밑에 작게 찍혀있던 흔적. 작품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솔라가 별 생각 없이 캔버스를 뒤집었다.
나무 틀이 십자 모양으로 얹혀 있는 평범한 캔버스엔 오래 붙잡고 있었던 물건인 듯 제피로스의 손때가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솔라의 시선이 천천히 한쪽 구석으로 내려갔다. 거기에 연필로 적힌 글자가 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쓴 글씨였다.
for SL
솔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캔버스 뒤쪽을 가만히 눌렀다. 마치 그 글자가 거기서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솔라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가슴 안쪽에서 이상하게 걸렸다. 한 번 더 들이마셔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더 짧게 끊겼다. 캔버스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흔들리며 무릎 위에 올려둔 그림이 미묘하게 기울었고, 그걸 다시 바로 세우지 못한 채 손가락 끝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솔라는 캔버스를 끌어안고서 한동안 굳어 있었다. 자가 호흡을 못하는 이처럼 가슴이 들쑥날쑥했다.
가슴 속에만 살아있는 상대를 홀로 그리워하는 일은 심장에 화상을 입혀 짙은 흉터를 남기는 것과 같았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어떤 감정은 그렇게, 사라지는 대신 마음 한가운데에 진득히 눌러붙어 남았다.
포폰이 조용히 곁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는 화를 내고 있었는데 막상 솔라가 저렇게 무너지는 걸 보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용을 깨우겠다고 찾아왔는데 그게 정말로 이렇게까지 흔들릴 줄은 몰랐던 얼굴이었다.
솔라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저 캔버스를 끌어안은 채 몸을 조금 더 접었다. 그림이 망가질까 봐 포폰은 순간 손을 뻗을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건드리지 못했다.
둘 사이에 아무 말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솔라의 숨이 조금씩 거칠게 이어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소리 없는 울음이 조금 잦아들 때 까지 포폰은 그저 기다렸다. 괜히 등을 두드리거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울음은 건드리면 더 망가진다는 걸 알고 있기에 가만히 두었다.
"포폰."
"응?"
"제피로스 사고 말이야."
"...... 응."
"그거 사실 나 때문이었어."
내가 제피로스 등 떠밀었어. 제피로스는 안 가겠다고 날 그렇게 붙잡았는데 내가 뿌리쳤어. 꿈이랑 발목 잡기는 죽어도 싫어서 가라고 한 건데, 그게 제피로스의 미래를 통째로 붙잡게 될 줄은 몰랐지. 기회 줄 때 잡을 걸. 제피로스가 준 마지막 기회를 기회인 줄도 몰라서 붙잡지 못했어.
순식간에 들이닥친 그날의 기억에 빠져 허우적댔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소리를 억지로 삼켜내는 것처럼 숨이 몇 번이나 끊어졌다. 포폰은 그걸 보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솔라, 네 탓 아니야. 트램 탈선을 무슨 수로 어떻게 막아. 너 계속 이러고 있으면 네 제피로스 발목 붙잡고 있는 꼴 되는 거야, 갈 길도 못 가게. 넌 충분히 노력했고 충분히 잘 해왔어. 그러니까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하고,
"이제는 네 시간을 살아."
제피로스가 그려놓고 간 거 누군가는 계속 봐줘야 할 거 아니야.
한참 뒤에야 솔라가 손을 움직였다. 무릎 위에 기울여져 있던 캔버스를 다시 조심스럽게 세웠다. 손가락이 나무 틀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제피로스가 이걸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었을까.
캔버스 뒷면에 짧은 글씨를 남기기까지도 제피로스가 얼마나 고민했을지, 붓질 한 번에 얼마나 저를 생각했을지 상상이 됐다. 그걸 떠올리자 가슴 어딘가가 다시 조용히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솔라는 살아야만 했다. 제피로스가 제게 남기고 간 것들이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
상자는 여전히 거실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 날 이후로도 솔라는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쳤다. 그냥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결국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솔라는 잠시 서서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바닥에 다시 앉았다.
안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조금 더 남아 있었다. 완충재를 한쪽으로 밀어놓자 납작하게 묶인 종이들이 드러났다.
스캐치였다.
종이를 묶고 있던 고무줄을 풀자 연필 선이 빽빽하게 겹친 얼굴들이 한장씩 나타났다. 어떤 건 옆모습이었고 어떤 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몇 장은 선이 몇 번이나 다시 덧그어져 있었고, 몇 장은 거의 한 번에 그린 것처럼 단순했다. 솔라는 그걸 한 장씩 넘겼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연필 가루가 조금씩 손가락에 묻어났다.
"...... 이것도 나네."
솔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종이를 한 장 더 넘기자 또 다른 얼굴이 나왔다. 각도가 조금 달랐지만 역시 솔라였다.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었고, 눈은 어딘가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걸 한참 내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제피로스가 이걸 언제 그렸을까. 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생각 많이 했을까.
예전 같았으면 이때 즈음 한마디 얹을 용이 있었다.
솔라가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시선이 닿는 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이 이제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며칠 사이에 이미 몇 번쯤 같은 일을 겪은 이처럼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요즘은 자꾸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말을 꺼내려다가 멈추는 순간,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돌아보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옆자리를 확인하는 순간. 늘 거기 있을 것 같던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걸 그 때 마다 새삼 알게 됐지만 요즈음엔 덜 놀라곤 했다.
처음에는 그럴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는데, 이제는 그냥 고개를 다시 돌리면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서겠지, 용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
계절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고, 솔라가 처음으로 제피로스가 있는 곳을 찾아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실내엔 차분한 온기가 퍼져있었다. 누군가 크게 떠들거나 급하게 움직이면 금방 깨질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몇몇 용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조차 느리게 보였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선 곳엔 이름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걸 제대로 읽지 못했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는데도 머릿속에서 이어지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표지판처럼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익숙한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멈출 수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자 차가운 유리 표면의 감촉이 손바닥에 맞닿았다.
".....제피로스, 왜 이렇게 작아졌지."
유리 너머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두 손으로 들면 충분할 만큼의 작은 크기였다. 정말 오랫동안 함께 지냈는데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이 정도의 부피라니. 수 없이 많은 날들과 말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순간들이 전부 저 안에 꾸역꾸역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함께한 세상은 그렇게 넓었는데 남은 세상은 이렇게 작았다.
솔라는 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꽃다발을 내려다봤다. 길가 꽃집에서 급하게 산 것이었다.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벗기자 물기가 묻은 줄기 자락이 손끝에 닿았다. 꽃을 한 송이 골라 유리 아래 작은 공간에 천천히 꽂아 두었다.
생화였다.
며칠 지나면 금방 고개를 떨굴 것이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그동안 너무 바빴거든요, 다른 용들한테 제피로스 그림 자랑하고 다니느라. 내 얼굴을 하도 많이 그려서 좀 부끄럽긴 했는데 기분 좋긴 좋더라고요. 아주 작게 전시도 열었어요, 한국에서. 개인전은 루브르에서 열고 싶다던 제피로스 목표는 너무너무 높더라. 제피로스도 이해하죠? 그래도 나 제피로스 덕에 프랑스도 가본다? 일부러 맞춘 건 아닌데 제피로스 생일날 가게 됐어요. 내가 미리 주는 제피로스 생일 선물인데 너무 막 고마워하진 않아도 돼요.
대신 가끔씩 내 꿈에도 찾아와줘요.
요즘 좀 많이 보고 싶어.
"곧 제 생일이기도 하니까, 선물로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죠?"
솔라는 가볍게 이마를 콩 찧은 유리 너머에 정갈하게 놓인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만 조금 달싹이다가 결국 더는 벌어지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솔라는 약간 기울어진 꽃을 다시 올곧게 꽂아 넣었다.
"안녕, 꽃 시들기 전에 또 올게요."
-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할 수 있는 건 먹고 자는 일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지루해진 솔라는 좌석 앞 테이블을 천천히 내렸다. 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여러 번 접혔다가 펴진 흔적이 너덜거릴 정도로 남아 있는 얇은 종이였다. 그건 집을 정리하던 중에 방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크로키였다. 제피로스가 아마 처음으로 솔라를 그려냈을 때의 그림일 것이다.
연필로 대충 긋다 만 선들이 모여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얼굴이었다. 그 때의 솔라는 이런 그림이 남아 있을 줄도 몰랐을 것이다. 제피로스가 노트 귀퉁이에 무심하게 그려 두고 접어 두었던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제피로스는 늘 그렇게 솔라를 그리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 진짜. 날 너무 좋아하네."
솔라는 잘게 웃으며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두곤 핸드폰 케이스를 벗겨내 메모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곤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봤다. 이제는 옆자리를 확인하는 버릇도 거의 사라졌다. 그래도 가끔은 문득 생각이 났다.
이 길을 먼저 건너갔던 이가 있었다는 것.
제피로스가 보았던 풍경도 이렇게나 아름다웠을까.
구름 위로 햇빛이 길게 번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된 길을 이제야 뒤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먼저 건너가고, 누군가는 조금 늦게 그 자리에 닿는다.
그 사이의 간격이 전부라는 걸 우리는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길이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다시는 닿지 못할 곳으로 멀어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면 보이게 되는 것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사라지는 대신 그저 앞쪽 어딘가에서 먼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 차이가 전부라는 걸, 솔라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제야 입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오래 붙잡고 있었던 그 이름을 다시 꺼냈다.
"사랑해, 나의 영원한 스물셋 제피로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