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 VILLAGE

  • 스토어

  • 틱톡

  • 플러스친구

  • 유튜브

  • 인스타그램

소설 게시판

  • 드래곤빌리지
  • 뽐내기 > 소설 게시판

유저 프로필 사진

런투u 03

3 익명의독자
  • 조회수6
  • 작성일03:19











크럭스 측에서 기본으로 제공해 준 전기장판은 여전히 먹통이라 새벽 내 잠을 설쳤다. 간만에 일찍 일어난 김에 클렌징폼으로 세수도 하고 양치하며 후드티도 꺼내 입었다. 며칠 내내 바닥에 널브러뒀던 과자 포장지와 부스러기를 드디어 쓸어 담아 버렸다. 노크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현관문을 벌컥 열고 난 후에야 떠올랐다. 



아, 오늘 피닉스 쉬는 날이구나. 



괜히 아침부터 혼자 유난 떨었다. '간만에'가 '하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내친김에 장이나 봐야겠다 싶어 CRUX 명칭 새겨진 카드 하나 챙겨 들고서 어그 부츠를 신었다. 피닉스가 건네준 계란 한 알은 진즉 먹어 치운 지 오래고 정수기가 없어 사 먹는 물도 이제 거의 다 떨어졌고 엔젤씨께 부탁했었던 새 전기장판은 크럭스 측에 전달되지 않은 건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니 그냥 내가 직접 가서 사는 편이 빠르겠어. 





창 너머로 구경만 하던 그 길거리를 걷는 건 간만이었다. 방화의 여파로 검게 그을린 주택의 수가 그새 늘었다. 곳곳에 휘날리는 폴리스 라인. 웃음소리 대신 겨울바람 소리만 맴도는 놀이터. 나는 변한 거 하나 없는데 세성은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 사랑 빠진 시대에 맞게 잘 적응하고 있는 건데 나 홀로 적응하지 못하는 걸지도. 



사랑을 갈구하던 시대에 살아본 적이 없었음에도 사랑이 질병이라는 말에 순응하며 살기 싫었다. 피닉스의 말처럼 이 또한 용의 본능적인 욕구일까. 아님 내가 정말 돌연변이라던가, 면역체이기라도 한 걸까. 혼란은 부아를 낳았다. 


만약 문창과에서 만난 전여친 때문에 사랑이라는 질병 바이러스에 이미 잔뜩 노출되어 느리게 죽어가는 중인 거라면 너무 억울한데. 날 낳은 엄마의 유전자를 그대로 받고 태어나버려서 태생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라면 너무너무 억울한데.





온갖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처음으로 손에 쥔 것은 마트 앞 진열대에 널린 초콜릿이었다. 피닉스가 이걸 봤으면 또 안된다고 했겠지. 혈당이 어쩌고 저쩌고 또 시답잖은 잔소리나 늘어놓았겠지. 


괘씸한 마음에 멋대로 금기를 깼다. 카트 끌고 과자 코너를 싹쓸이 하듯 쓸었다. 양심상 계란과 토마토도 얹어주었다. 





가전 코너엔 유독 용이 없길래 카트에 몸을 기대어 발을 굴렀다. 깔끔하게 트인 매장을 총알처럼 가로질렀다. 어린 애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 무안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용은 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단 한 용만 빼고. 





"단 거 그렇게 많이 먹으면 곧 있을 건강검진에서 당수치 높게 나올 텐데요."


결과가 나쁘면 지원이 끊길지도 몰라요, 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 거니까. 



페이스 가드 없는 말간 낯. 매일같이 입던 슬랙스 대신 낯선 바지. 그러나 카트에 올라타 총알처럼 지나쳐가며 봐도 너무나 익숙한 얼굴. 피닉스의 시선은 여전히 내 카트 속 초콜릿 무덤에 고정이었다. 난 시선을뺏기 위해 받아쳤다. 



"내가 먹을 거 아닌데? 피닉스 너 주려고 담은 거야."



내가 들어봐도 이건 가당치도 않은 변명이었다. 나의 속내를 또 읽어냈다는 듯 눈썹만 으쓱이던 피닉스의 모습에 나의 무대뽀 기질이 또 다시 발현되었다.


하도 밥 안 먹고 일만 하는 거 같아서 중간중간 이거라도 챙겨 먹으라고. 넌 맨날 나한테 잔소리나 해대면서 정작 너는 왜 안 챙겨? 아니, 너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나만 잔소리 듣는 거 억울해서 그래. 밥 먹는 건 네 목적에 없냐? 니 성격상 어련히 알아서 잘하는 거 나도 아는데, 몰라. 그냥, 갑자기 짜증나네. 



".....혹시 잡생각이랑 짜증 많아지는 것도 증상 중 하나야?"


"네."


"헐."


"초콜릿 금단 증상이요."



피닉스는 킥킥대며 카트에 손 넣어 초콜릿을 한 움큼 빼냈다. 뭐가 됐든 이건 너무 많아요. 뜯어말릴 새도 없이 차곡차곡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허쉬는 양보 못해. 하나 남은 초콜릿에 알량한 자존심을 걸어본다. 나의 금단 증상을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막상 손에 쥐고 나니 쪽팔렸다. 고작 이게 뭐라고. 괜히 티 내진 않았다. 어차피 이미 피닉스가 간파했을 게 뻔하니까. 





"넌 왜 여기 왔어? 쉬는 날에 하필."


"전기장판 사러 왔어요."



고장났다면서요. 자잘한 요구사항까지 들어줄 연구원은 없나 봐요. 그래서 제가 왔어요.



분명 피닉스에겐 전기장판 얘기를 한 적 없었는데. 엔젤씨한테 들었어? 전기장판을 모델 별로 훑던 피닉스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휘적거리던 손도 움직임을 멈췄다.



"네. 마지막으로 전해 들은 얘기가 전기장판이라서."


"꽤 친했나 봐, 그런 자잘한 것까지 얘기할 정도면."



피닉스가 끄덕였다. 유일하게 친한 친구였단다.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피닉스는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크럭스에선 스무 살이 되면 자동으로 역학 조사관이 돼요. 원래대로라면 지금 구역 담당은 이 년 전부터 저였어야 했는데, 의도치 않은 사고가 있어서 그동안 엔젤이 저 대신 일 했거든요. 제가 맡은 구역에 있었던 용들이 전부 죽었어요. 막상 전 사랑해본 적도 없는데 나 때문에 용이 계속 죽었대요. 나만 잘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라구요. 용 살리겠다고 파견된 조사관이 자꾸 이런 결과를 도출하면 안되잖아요. 페이스 가드를 쓰게 된 것도, 엔젤이 대신 맡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어요.



엔젤은 옥시토신 억제제까지 따로 챙겨 먹어가면서 일했어요, 더는 피해 끼치기 싫다고. 근데 알잖아요, 그거 하나도 효과 없는 거.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요. 사랑은 순식간에 빠져요. 뇌도 자각하지 못할 속도예요. 


처음부터 내가 더 조심했다면 엔젤이 감염 될 일은 없었겠죠? 미안하다는 말을 못 전해서 아쉬운데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요 뭐. 로봇 사들일 비용보다 인건비가 훨씬 저렴한 우리 사회라도 탓하면서 마음의 짐을 털어내야죠. 



"처음부터 계속 있었다면 네가 죽었을 수도 있잖아."


"그럼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됐겠죠."


"......"


"이거, 전기장판 이 정도 사이즈면 딱 맞죠?"





피닉스는 웃을 때면 영락없는 애 같다가도 이럴 때면 통달해버린 냉혈한 같았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 대체 뭐라고 널 이렇게 훌쩍 커버리게 만들었을까. 넌 좀, 어렵다 어린 애가.










  

댓글0

    • 상호 : (주)하이브로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영동대로 432 준앤빌딩 4층 (135-280)
    • 대표 : 원세연
    • 사업자번호 : 120-87-89784
    • 통신판매업신고 : 강남-03212호
    • Email : support@highbrow.com

    Copyright © highbrow,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