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품에 한 아름 안긴 건 초콜릿 대신 새 전기장판이었다. 그리고 패딩 주머니에 처박힌 허쉬 초콜릿 하나. 피닉스에게 먹으라고 건네줬지만 단칼에 까였으니 허쉬 넌 당분간 주머니 속에서 햇빛 볼 일은 없을 거다.
확실히 겨울은 낮이 짧았다. 오후 네 시 언저리인데 해는 이미 수평선으로 넘어갈 준비를 끝냈다. 피닉스는 끝까지 올린 패딩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고 난 후드를 뒤집어썼다. 살 에는 바람에도 꾸역꾸역 걸었다. 오가는 대화는 딱히 없었다. 시선 깔고서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새 한강변이었다. 살얼음 띄운 강물이 일렁였다.
춥네.
그러게요.
"이제 어디로 가?"
"저 파이어씨 따라온 건데요?"
"나도 너 따라온 건데?"
동시에 폭소가 터졌다. 어차피 넌 곧 크럭스로 갈 거면서 왜 날 따라온 거야. 파이어씨야말로, 내가 거기 갈 거 알면서도 왜 날 따라왔대요. 내 시선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피닉스의 얼굴에라도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휘어진 눈꼬리 속 눈동자. 네 얼굴엔 정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네. 피닉스와 함께 있으면 난 똥개도 되었다가 우주비행사도 됐다. 꿈꾸지 않아도 뭐든 꿈꿀 수 있었다.
그게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급하게 떨어졌다. 기껏 그래봤자 한 발자국 차이였지만. 피닉스는 따가운 내 시선을 받으면서도, 혼자 나가떨어지는 날 보면서도 군말 안 했다. 대신 블록을 툭툭 털더니 한강을 마주 보고 앉았다.
고민이 있으면 종종 오곤 했단다. 이를테면 질병의 원인을 도저히 알 수 없어 답답할 때라던가, 백신 개발에 진전이 없어서 짜증 날 때라던가. 참으로 피닉스다웠다. 생긴 건 무진장 화려하게 생겨서 하는 일이라곤 고리타분한 것들 뿐이었다.
스물 둘 치곤 너무 딥한 거 아니야?
그럼 피닉스씬 그 나이 때 무슨 생각하고 살았는데요?
정말로 사랑이 꼴랑 이게 다 일까... 하는 생각?
스물 둘에 만났던 문창과 과탑 전여친은 이전 시대에 유행하던 로맨스 소설과 사랑 노래를 몰래 떼어와 팔았지. 불법인 걸 알았지만 악법도 법이 되는 세상이니까 돈이나 많이 벌자길래 굳이 말리진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 텅 빈 과방에서 아이스크림 물고 반팔티를 펄럭이고 있으면 전여친은 팔고 남은 얇은 책 한 권을 제 바지춤에 꽁쳐왔다. 책 표지를 넘기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 타령하는 노래 가사에서 줄창 듣던 증상이었다.
'읽어 봐, 애인끼리는 호칭도 정한대. 둘만의 이름 같은 거.'
'자기야.'
소설에서 나온 호칭을 그대로 부럴줬다.
그게 어떻게 좋냐? 무슨 의미인진 알아?
전여친은 의미 따위 됐고 그저 마음에 쏙 든다며 과방을 온통 헤집고서 뛰어다녔다. 걔가 좋아 죽겠다길래 나도 그냥 눈치껏 좋다고 했다. 사랑해 보자고 약속했는데 정작 사랑을 몰라서 우린 소설을 그대로 배꼈다. 빠른 심장 박동이 귓바퀴를 맴돌아도 멈추지 못했다. 우린 곧 죽는 거야? 그것 또한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여친은 자주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주 싸웠다.
소설에 나왔던 거 그대로 했으면 사랑하는 거 아니야? 나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했짢아. 어, 사랑해, 사랑한다고. 증상이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면 감염돼도 모르는 무증상이거나 나한테 면역이라도 있는 건가 보지. 자기야 무슨 내가 노력을 덜 해, 언제 한 번 분명 열 올랐었어. 너도 느꼈잖아. 이제 적당히 좀 해, 넌 죽으려고 사랑하냐?
사랑을 모르기에 나조차 증명할 수 없는 내 사랑. 답답한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며칠 후 전여친이 죽었다. 하필 뒤지게 싸운 그 날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난 여전히 숨 헐떡이며 살고 있는데, 진짜 이게 끝이야? 믿을 수 없었다. 고작 이것 뿐인데 왜 이전 시대 용들은 사랑을 갈망했을까. 열이 오르긴 했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긴 했지만 더지진 않았다. 우리 엄만 이딴 게 뭐가 좋다고 나를 낳았을까.
난 홀로 남은 과방 소파에 드러누워 전여친이 자주 듣던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곤 했다.
"잘 자길 바라는 것도 사랑이래."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던 피닉스는 고개를 넌지시 끄덕였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쓰이면 사랑이라는 뜻인가 봐요. 사랑 그거 진짜 위험한 거네. 뭐가 맞는지 정의할 수는 없지만 지금 시대에 위험하다는 건 확실하죠. 나도 맞장구 치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해가 저물어 까맣게 물든 강물을 응시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곳에 고민을 털어놓으니 왜인지 속이 시원했다. 앞으로 나도 한강에 자주 오게 될 것 같아.
"내가 노력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거 다 해서 너한테 도움이 될게."
언젠가는 사랑이 뭔지 우리가 직접 정의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