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어씨, 이건 노력이 아니라 그냥 귀찮게 구는 거잖아요."
팬드폰에서 들려오는 피닉스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 피닉스는 현관문을 알아서 벌컥 열고 들어오며 전화를 끊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야, 이번엔 또 무슨 문젠데요? 귀찮다는 양 눈으로 날 대충 훑는다.
그러니까 처음 피닉스를 불렀던 이유는 열이 났기 때문이었다. 재난 문자 알람 소리에 잠에서 번뜩 깼을 땐 온 등짝이 축축했다. 왜인지 자꾸만 졸린 것 같고 몸은 가벼운데 정신이 몽롱했다. 식겁한 마음에 눈도 다 못 뜬 채로 피닉스에게 전화했다.
피닉스, 나 일 년 전 증상이 이제야 나타나나 봐.
괜히 심장도 쿵쿵 뛰었다.
쭉 뛰어온 건지 급하게 찾아온 피닉스의 호흡이 가빴다. 주머니에서 체온계부터 해열제까지 온갖 의료 용품을 와르르 쏟아냈다. 아, 지금 제 손 너무 찬데. 두 손 모아 입김 호호 불고 바지춤에 쓱쓱 닦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두 눈으로 한참을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저거."
"어?"
피닉스는 내 머리 맡을 가리켰다. 전기장판 온도조절기 빨간 불빛이 오컬트 영화에 나올 것처럼 발광한다. 제대로 된 전기장판 쓸 생각에 들떴던 나. 뜨겁게 덥혀두고 온도를 내려야겠다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로 잠들었나 보다. 정신이 몽롱한 이유는 지금이 이른 아침이라 파이어씨가 잠에 취해서 그런 거구요, 자는 동안 통구이 안 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해요.
난 쪽팔림에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고 피닉스는 탄식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이불을 걷어내려 들었다. 간지러운 손길에 참을 수 없어 이불을 박차고 벌떡 앉자 피닉스는 내 팔뚝을 살폈다.
"저온화상 입었을지도 몰라요."
"약간 붉어진 게 다야."
"그래도 연고 가져다줄 테니까 일단 물로 식히고 있어요."
온갖 가능성 예측하며 약이란 약은 다 들고 왔지만 차마 전기장판 때문일 생각은 조금도 안 해서 결국 화상 연고를 가져오게 만드는 똥개 훈련을 피닉스에게 시키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점심 즈음 됐을까. 온갖 장기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길래 반사적으로 또 피닉스를 찾았다. 이건 원인을 알고 있어, 내가 아침을 너무 급하게 먹었어. 미안하지만 도저히 걸을 힘이 없어서, 아까보다 땀이 더 많이 나서. 피닉스는 못 말린다며 소화제를 한 움큼 가져다주었다.
그러니까 밥은 항상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요, 누가 쫓아와요? 빨리 먹는 거 습관 되면 건강에 좋을 거 하나 없다니까요.
아아 몰라, 몰라.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아이고야 나 죽겠다, 죽겠어.
그리고 해도 저물어버린 지금. 눈앞의 피닉스가 전화를 끊은 줄도 모르고 난 핸드폰에 대고서 얼버무렸다.
"이상 증후가 생긴 거 같으면 무조건 연락하라며."
"...... 그래요, 잘 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라며?"
"지금은 아파 보이진 않는데, 제가 필요한 거예요?"
"아니 뭐래, 무슨...... 그냥 나 이제 배 안 아프다는 거 알려주려고 한 건데 네가 쓸데없이 너무 빨리 달려온 거야."
개판 오분 전. 적반하장이다.
나도 안다. 뭐랄까 나는 , 매번 말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할 것을. 쓸 데 없는 억지고 보잘것없는 자존심이지만 그거라도 지키겠다고 악을 쓴다.
그래서 전여친과도 너 죽자 나 죽자 하며 싸워댔었지. 끝끝내 상대 입에서 미안하단 소리가 나와야 끝나곤 했지. 어거지로 받아낸 사과에 괜히 또 자존심 상할 때가 많았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고 가진 것에 신물 내고 말았지.
이렇게 타고난 걸 어쩌겠어, 변명만 늘어놓곤 했으나 왜인지 몰라도 이번엔 내키지 않았어. 자존심 지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낯간지러워 그동안 먼저 내뱉지 못했던 말을 건네보았다. 무작정 쌓아두기만 하다가 속을 꽉 막아버린 케케묵은 욕심들이 뻥 뚫리며 쓸려내려 갔다. 잔뜩 꼬였던 속이 이제야 완전히 편안해졌다. 정말로 난 괜찮았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놀랐다.
나가자, 저녁 사줄게. 크럭스 카드 들고서도 이딴 얘기 잘만 했다. 그러나 피닉스는 손사래 쳤다. 넌 초콜릿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어떻게 사니, 아직 일하는 중이라서? 아뇨, 퇴근하긴 했는데
"배가 아직 안 고파서 그래요. 굳이 안 사줘도 돼요."
"그럼 그냥 잔칫상 차렸다 생각하고 앞에 앉아있기라도 해."
"왜요?"
"너보다 내가 밥 더 잘 챙겨 먹는 거 보여주려고 한다, 왜! 나한테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쓸려내려간 억지와 자존심 한 가닥만 다시 주워왔다. 하루아침에 사람 고쳐 쓰려다 보니 역시 버겁네. 쪽팔려서 어그 구겨 신으며 빠르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 눈 온다."
밖은 가루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다급히 복도 밖으로 손을 내밀자 작은 눈 결정들이 닿기도 전에 녹았다. 쌓이지도 않을 눈이면서 괜히 날씨만 춥게 만드네. 다시 현관문을 젖혔다. 피닉스가 나올 때 침대 옆 선반에 있는 핫팩 그거 써, 밖에 눈 와. 하도 말 안 듣는 똥개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는지 피닉스는 입을 앙 다물고서 제 관자놀이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밥 먹기가 그렇게 싫으면 말던가."
"아녜요, 괜찮아요. 가요, 밖에 눈 온다며."
영업 종료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동네만 빙빙 돌다 간 곳은 결국 KFC였다. 햄버거든 치킨이든 다 시키라고 으스댔다가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거 왜 그러냐는 꾸중만 바가지로 듣고서 갓 나온 핫 크리스피 한 통 피닉스에게 안겨주고 난 양손에 콜라 라지 사이즈 들었다.
근데 매장 샷다 내릴 시간을 고려 못 했네.
엉덩이 잠시 붙이지도 못하고 밖으로 쫓겨났다. 난 눈치만 보다가 피닉스의 입이 열리기 직전에 빨대 꽂은 콜라를 가져다 댔다. 미안, 한강 갈까? 이 추운 날에요? 미안, 아니 너 고민 많아 보이길래. 저 안색 안 좋아 보여요? 또 미안. 평생을 입 밖으로 못 내밀던 사과가 피닉스 앞에서는 이렇게나 쉬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강변 방향으로 앞서 걸어가는 피닉스. 나는 똥개가 되어 뒤만 졸졸 쫓았다. 강추위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빠르게 식어가는 치킨 껴안고서 쿰쿰한 주황빛 조명 켜진 굴다리로 향했다. 꽁지 쫓듯 피닉스의 뒤에서 알짱거리니 잰걸음으로 걷던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엎치락 뒤치락 의미도 보상도 없는, 누가 술래인지조차 모르는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아, 파이어씨 빨리 뛰지 마요. 나보다 먼저 가면 다리 다 내 거!
그래라, 너 다 먹어라. 난 똥개니까 신나게 뛰어다니련다.
둘만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며 굴다리를 가득 채웠다.
가쁜 숨 고르며 블록에 자릴 잡았다. 피닉스는 추위에 떨면서도 내 손에 있는 콜라를 먹으려 참새처럼 입을 쭉 내밀었다. 난 겨울바람 맞고 돌덩이 된 치킨을 씹어대도 웃기만 했다.
평화로웠다. 차들은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고 꺼질 줄 모르는 빌딩 숲 불빛에 눈이 따가워지고 냉기에 얼어가는 강물에도 평화로웠다. 그 속에서 피닉스만 튀어 보였다. 복잡함이 묻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한 번 올 생각이긴 했어요."
"고민 있는 거 맞네."
"네, 근데 조금 많이 막막해서."
"그렇구나."
"무슨 고민인지 안 물어봐요?"
"막막하다는데 그걸 뭐 하러 캐물어. 니가 먼저 애기해주면 듣는 거고 아님 마는 거지."
"듣고 싶어요?"
"아니, 안 들을래."
"......그래요, 그럼."
그간 피닉스를 가만 보고 있으면 울적한 생각 따윈 떠오르지 않았는데. 피닉스의 깊은 눈동자가 이젠 찬란한 우주가 아니라 새벽의 한강보다도 어두운 심해 같아서. 바닥도 보이지 않는 검은 수면에 나도 아득해져서. 그 깊이에 빠져버리면 헤어 나오지 못할까 봐. 깊게 잠겨 모두 죽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더 묻는 대신 강 너머 휙휙 지나다니는 차들의 붉은 빛만 정신 없이 눈으로 쫓았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손에 잡히길래 강물을 향해 휙 던졌다. 팬데믹이 끝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에게 면역이 없으면 어떡하지. 난 마음껏 사랑하면서 죽을 걱정 따윈 안 하고 싶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꿱 죽고 싶지 않아. 출국 금지가 빨리 풀려서 저기 떠다니는 요트보다 열 배는 큰 요트 타고 발 닿는 대로 떠돌고 싶어. 어차피 목적 없이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그렇게 살고 싶어.
"저는 만약 팬데믹이 끝난대도 사랑 그딴 거 평생 안 할 거예요."
"야, 너는 안 하면 되지. 내가 너보고 하라고 한 적 없는데 갑자기 왜, 왜 울 것 같은 표정이야. 당황스럽네."
"안 울어요. 사랑 최악이야 진짜."
"그래, 그건 인정. 생각 정리 다 끝나면 얘기해. 오래 있으면 지독한 감기 걸린다."
나는 어찌할 줄을 몰라서 그저 한강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돌멩이나 멍하니 바라보며 애써 무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