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만에 맞이한 피닉스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우리 집 현관문 열어두고서 오 분 째 패드 펜슬 꽁다리를 개껌 씹듯 잘근 씹어댔다. 누군가 또 죽었냐 했더니 그건 일상이란다. 난 그저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앞코만 톡톡 두들겼다.
"피닉스, 나 근데 이제 좀 발이 시려서......"
"이 방향이 아닌 건가."
연구에서 얻어낸 게 또 없다는 뜻이구나. 잇자국 가득한 펜슬을 패드에 붙이고서 이젠 입 자체를 까드득 깨문다. 피닉스는 짜증이 나면 뭔갈 자꾸 씹고 싶어지나? 괜히 패딩 주머니를 뒤적였다. 영수증과 오백원, 그리고 방 온기에 녹아내려 짓눌려진 허쉬 초콜릿이 줄줄이 딸려 나온다.
이건 이제 먹을 수도 없겠네. 애초에 초콜릿은 씹는 맛도 없을 거다. 다음에 또 마트에 가면 껌이라도 사둘까 싶다. 스물넷을 목전에 두고서도 여전히 내 고민은 이딴 것들 뿐인데.
스물 둘 피닉스는 순식간에 통계학자도 됐다가 화학자도 됐다. 병원체부터 시작해서 mRNA인지 뭔지, 첫 마디부터 이해 불가능한 고민의 향연이라 난 고개를 끄덕일 수조차 없었다. 초라해진 발가락이나 움츠렸다. 난 홀로 생각했다. 수십 년간 온갖 과학적 방법을 총동원해봐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거라면. 마치 용들을 솎아내는 것만 같던 사랑의 질병화는,
"어쩌면 지구에 내재된 자원을 마음껏 낭비하며 토양과 대기를 더럽힌 용들을 향한 지구의 복수일 수도 있고, 용 스스로 정해버린 끝일지도 모르지. 더 큰 것을 탐내던 이기적인 용들이 지구를 잔뜩 집어삼키고도 여전히 만족을 채우지 못해서 결국 자멸을 택한 것일지도?"
어때 내 주장? 듣고 있긴 하니.
피닉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건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증명할 수도 없는."
"증명할 수 없으면 뭐 어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귀신이나 외계인도 다들 잘만 믿던데. 뭐든 진심으로 믿으면 그게 사실이 되고 세상이 돼."
그래봤자 들은 체도 안 하는 듯 싶다. 머리는 잔뜩 쥐어 뜯고 있고 꽉 깨문 탓에 입에서는 피라도 나올 지경인데. 얼씨구, 차라리 소리를 지르지 왜 본인 몸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이러다 내 발가락은 겨울바람이 죄다 뜯어갈 것 같아서 피닉스의 손목을 붙잡고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침대 전기장판을 켰다. 고민할 거면 차라리 여기서 해라. 피닉스를 앉혀두고 찬장을 뒤적였다. 먼지 쌓이기 직전의 티백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이거 봐, 맥심 둥글레차 녹차 옥수수수염차 핫초코에 무슨 없는 게 없는 파이어네 호텔 같다, 야. 페퍼민트? 이건 또 뭐야, 별 게 다 있네.
됐다며 사양하던 피닉스가 페퍼민트 소리에 흠칫한다. 난 파악했다는 듯 고갯짓으로 박자 타며 물 올렸다. 뜨거운 거 쥐여주니 그제야 머리 붙잡던 손이 떨어졌다.
"너 요즘 부쩍 머리 자주 쥐어뜯는다?"
"머리 복잡해서 잠깐 그런 거예요, 괜찮아요."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 거면 차라리 그만하면 안돼? 위암도 백 년 전엔 손도 못 써보고 죽었다잖아, 지금은 기껏해야 감기랑 비슷한 수준인데. 그러니까 사랑도 우리 세대엔 절대 해결 못 할 불치병일 수도 있다는 거야. 백 년 후의 용들이나 우리를 보고 비웃겠지. 우리가 해결 못하면 뭐 어때. 이대로 그냥 살아도 괜찮잖아. 살 수는 있잖아."
"내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남 일에 신경 써요?"
"...... 그냥!"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이젠 니 걱정도 하면 안되냐? 넌 지금 내 앞에서 이만큼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난 그거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너 때문에 나까지 스트레스 받잖아. 넌 어차피 평생 사랑 그딴 거 안 할 거라며. 그럼 백신을 만들든 말든 너랑은 관련 없는 일이잖아. 근데 뭐 하러 연구에 쩔쩔매고 힘들어하는데?
홧김에 송두리째 부정해버린 피닉스의,
"내 존재의 이유가 그거니까요!"
목적. 존재의 이유.
크럭스에서 진행하는 백신 개발 성공을 위해 사랑 없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애.
그치만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요즘 너 볼 때 마다 머리 쥐뜯고 있어서 이젠 나까지 머리가 아파. 네가 잘못됐다는 건 아닌데, 목적 없이 살면 좀 어때. 나도 이렇게 잘만 사는데. 넌 매사 너무 완벽하게 굴려고 하잖아 어린 애가.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뭐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었어. 그냥 네가 조금만 편하길 바랐을 뿐이야, 어린 애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하나 싶어서. 난 그게 다였어.
"그러니까 왜 그런 걱정을 하냐고요, 쓸 데 없이."
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내가 왜. 난 애초부터 목적 그딴 거 없이 태어났으니까 감히 네 목적은 이해도 못하는데 그치. 내가 원하는 모습만 너무 갈구했나 봐.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진 모르겠는데.
바닥에 뒹구는 패딩을 주워 걸쳤다.
나갔다 올 테니까 넌 할 일 남았으면 하고 가. 페퍼민트 그거 따뜻할 때 마시고.
파이어씨 방인데 왜 파이어씨가 나가요.
피닉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선수 쳤다. 거친 힘에 현관문이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삽시간에 찾아온 적막. 침대 옆 선반에 놓인 컵에선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여튼 쟤 요즘 이상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괜한 말까지 다 했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거의 그대로 남은 컵을 씻어 정리했다. 주머니에서 딸려 나왔던 영수증을 버렸다. 녹아버린 초콜릿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포장을 뜯었다. 손에 묻혀가며 한 입 베어먹었다. 씹는 맛은 모르겠고 단맛은 있네. 그렇게 한참을 음미하다가,
아야.
입 안이 욱신거렸다. 충치가 생겼나. 입을 크게 벌리고서 거울을 살폈다. 보이지 않길래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서 구석구석 살폈다. 다 자란 줄로만 알았던 어금니 그 뒷공간. 좁아터진 공간을 비집고서 딱딱한 무언가가 생살을 찢고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뒤늦게 자라나 가장 아프게 괴롭힌다던, 꽁꽁 숨은 채로 머리까지 아파오게 만든다던.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나 자꾸만 혀로 쓸게 만드는 나의 첫 사랑니.
온 신경이 저릿했다.